꼭 사랑이라 말하지 않아도
<유열의 음악앨범> 정지우
글 정지혜 사진 소동성 / Interview / 2019-09-19

사람의 기질과 성정은 좀처럼 바뀌지 않는다. 만약 그렇다 해도, 태생적인 내면의 세계에 약간의 변화를 불러오는 보이지 않는 힘이 있다면 그것은 무엇이고, 어디서 왔을까. 이러한 질문에 정지우 감독이라면 주저 없이 사랑이라고 답할 것이다. 그는 자신의 멜로드라마를 통해 사랑의 힘, 그 다양한 파장에 관해 숙고해왔다. 한 번 되짚어 보자. <해피엔드>(1999), <사랑니>(2005), <은교>(2012)에서 사랑은 어떠했는가. 사랑이 세상의 금기를 성큼 넘어서자 견고하게만 보이던 그들의 세계는 파문과 균열, 파탄과 붕괴에 이른다. 시대 배경을 옮기거나 장르의 외피를 두른 <모던보이>(2008)나 <침묵>(2017)에서도 우리는 자신의 모든 것을 사랑에 건 위태로운 인물들을 목격할 수 있다. 8월 28일 개봉한 <유열의 음악앨범>에서 정지우 감독은 사람의 기질과 성정, 사랑의 진척과 양상에 관해 더 직접적으로 파고든다.

20대에 들어선 미수(김고은)와 현우(정해인)는 우연히 만나 서로에게 호감을 느끼지만 그 사랑을 제대로 확인할 만큼 충분한 시간을 갖지 못한 채 한동안 떨어져 지낸다. 재회의 순간은 짧거나 어긋나고 또다시 다음을 기약할 수밖에 없다. 이런 상황의 안타까움을 극대화하거나 이들의 마음의 상태를 표현하는 주요한 방편으로 <유열의 음악앨범>은 라디오와 음악이라는 고전적 매개를 가져온다. 영화의 제목인 <유열의 음악앨범>은 실제로 1994년 10월에 첫 방송을 시작한 동명의 라디오 프로그램으로, 영화 속 주인공들은 이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을 듣고 사연에 귀 기울이며 서로를 그리워하기도 한다. <사랑니> <침묵> 등에서 보여준 정지우의 정교한 구조의 묘와 비교하면 이번 영화는 선명하고 명쾌하고 단순하다. 대신 시간과 음악의 흐름 속에서 두 인물의 내적 상태와 감정의 공명, 관계의 진전이 그려진다.

<유열의 음악앨범> 개봉 다음 날, 정지우 감독과 만났다. 인터뷰에 앞서 잠시 숨을 고르는 틈을 타 그는 고개를 가만히 숙이고 침묵 속에서 작은 동심원을 그리듯 이리저리 몸을 움직여 걸어본다. 신작으로 이제 막 관객을 만나기 시작한 감독에게서 전해지는 약간의 긴장과 흥분이, 바쁘게 돌아가는 홍보 일정을 소화하면서 오는 피로가 뒤섞인 듯했다. 막상 인터뷰가 시작되자 그는 특유의 힘 있고 경쾌한 말투로, 단어 하나하나를 신중히 골라 나갔다. 또 좀 더 정확한 설명이 필요하다 싶으면 덧붙임의 말과 구체적 예시로 자신의 세계를 설득했다. <유열의 음악앨범>을 통해 그가 구현하고자 했던 세계와 사랑, 그 둘의 역학에 관한 이야기였다.

 

 

언론 시사 때 “제발 (이번 작품이 관객들에게) 통했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전했는데 일단 출발은 순조로워 보입니다.

조마조마합니다. 제가 액션 블록버스터를 만드는 감독은 아니니까요. 늘 개봉할 때면 그런 마음이 듭니다.

 

멜로물이 환영받기 어려운 시장 상황에서 멜로드라마를 오랫동안 만들어온 감독으로서는 고민이 깊을 것 같습니다.

TV의 멜로드라마는 익숙한데 멜로영화는 관객들에게 낯선 장르가 돼버렸어요. 상대적으로 멜로물이 많지 않으면 오히려 멜로가 신선하고 강점으로 받아들여져야 하는데 오히려 멜로영화가 설 시장이 없어지는 거죠. 극장에서 멜로드라마를 볼 기회 자체가 많지 않아 관객의 관람 습관이 생기지 않는 것도 있을 거예요. 또 배급이 영화에 미치는 영향이 정말 커졌잖아요. 사실 감독은 그 영역과는 전혀 관련이 없고 그 과정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조차 잘 모를 때가 많아요. 강 건너에서 보는 수준이랄까요. 어리둥절한 상태로 따라가는 것 같습니다.

<유열의 음악앨범>

가수 유열 씨가 1994년부터 13년간 오전 9시부터 11시 사이에 진행한 라디오 프로그램을 영화 안으로 적극적으로 가지고 들어왔습니다. 그 프로그램을 매개 삼아 서사가 진척되기도 하고 인물들의 감정이 전달되기도 합니다. 왜 이 프로그램이었을까요. 오랜 팬이라고 했던 <배철수의 음악캠프>도 있을 테고, 그 시대에 애청했던 또 다른 라디오 프로그램도 있었을 법한데요.

<유열의 음악앨범>에서 오랫동안 구성작가로 일한 이숙연 작가가 이 영화의 최초의 각본을 쓰신 것도 있겠고. 아마도 제가 어린 시절에 많이 들었던 프로그램이라고 한다면 <별이 빛나는 밤에>일 텐데요. 심야 라디오 방송은 사람의 감성을 풍부하게 해주고 여러 가지 상상을 하게끔 하는 장점이 있고 그게 큰 매력이에요. 그런데 이 영화의 제목이기도 한 <유열의 음악앨범>은 오전 시간대에 방송을 하죠. 그 시간은 많은 사람이 일하는 시간이에요. 이번 영화에 시대적 배경(1994년에 시작해 2005년까지의 시간)을 녹여내고 싶었고 그 프로그램과 아주 잘 붙을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동일 인물이라도 아침 시간에 일하며 라디오를 듣는 것과 혼자 심야 라디오를 듣는 건 굉장히 다른 경험일 거예요. 영화 중간에 미수가 공장에서 일할 때만 해도 그곳이 워낙 시끄러워 라디오를 들을 수 없는 상황이죠. 그런 차이가 이제 막 사회생활을 시작하고 어른이 된 주인공들의 상황과 굉장히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습니다.

 

연출 제안을 받은 건 언제입니까. 그간의 작업을 돌이켜보면 원작이 있는 경우라고 해도 직접 시나리오를 쓰고 각본으로 크레디트에 이름을 올렸는데요. 이번에는 각본 이숙연, 각색 정지우라고 돼 있어서 어떤 식의 협업이 있었을까 궁금했습니다.

<침묵>을 다 마친 이후에 처음 원안을 읽었고 이숙연 작가의 초고를 바탕으로 제가 각색이라는 이름으로 시나리오를 쓰기 시작했습니다. 협업이 이뤄지기에는 객관적으로 어려운 조건이 있어서 사실상 작가님과 같이 작업한 건 없는 셈입니다. 초고를 읽고 솔직히 ‘영화화할 자신은 없다. 하지만 영화로 만들어지면 꼭 보러 가고 싶다’는 비겁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그런 저에게 이번 작품을 같이 제작한 무비락의 김재중 대표가 ‘영화로 만들어 낼 수 있다’며 용기를 많이 줬습니다. 혼자서는 절대 할 수 없었을 겁니다.

 

어떤 면에서 ‘자신이 없다’라고 판단했던 건가요.

여성 주인공의 내면이 일면 모호할지는 몰라도 굉장히 풍부하게 그려져 있었어요. 영화화하면 참 매력적일 거 같았죠. 그런데 만들기는 참 어려운 조건이겠구나 싶었습니다. 주 52시간 노동시간을 지켜가며 일하기도 쉽지 않을 거 같았고요. 작고 소소한 내면을 다루는 이야기가 상업영화로 만들어지는 경우가 거의 없다 보니 도전할 용기를 갖기도 어려웠어요.

ⓒ소동성

본격적으로 시나리오를 쓰면서는 어떤 방향에 더 집중했는지요.

미수의 내면을 그릴 때 상대방인 현우가 좀 더 눈에 보이는 방식에 관해 고민했습니다. 현우의 동선, 그의 과거, 현재, 미래를 하나씩 만들면서 미수와 현우 사이의 관계를 조금 더 쉽게 풀 수 있는 방법을 찾으려 했어요. 대사로 직접 전할 수도 있고 어떤 행동을 해볼 수도 있겠죠.

 

현우의 역할이 좀 더 커졌다는 말로 이해하면 될까요.

그렇습니다. 하지만 단순히 물리적으로 역할을 키웠다는 차원의 도전은 아니었어요. 영화의 전체 구조상 화자는 미수이지만 그 역할을 현우와 조금은 나눠서 지려는 방향으로 간 겁니다. 예를 들면 미수가 ‘내가 후져서 다른 사람도 후져 보인다’, ‘네가 웃는 게 진짜일까라는 의심도 든다’라는 말을 할 때 그것에 대답하는 현우의 신을 넣었는데, 관객이 영화에 좀 더 공감하거나 쉽게 받아들일 수 있게끔 한 것입니다.

 

정지우식 첫사랑 멜로라고 하면 <사랑니>를 떠올리게 됩니다. 이번 영화는 그와 비교하면 구조적으로 훨씬 단순합니다.

<사랑니>의 이야기에는 선생님과 학생이라는 사회적인 금기가 일종의 백그라운드로 자리하고 있습니다. 사실 그 소재가 중요한 건 아니었지만요. 어쨌든 상대방의 조건이나 상태가 중요했던 면이 있었죠. 반면 <유열의 음악앨범>은 처음 준비 단계서부터 제가 대단히 집중하며 영화적으로 도전해 보고 싶었던 게 있었어요. ‘사랑에 있어 나의 기질이 걸림돌이 돼 그 사랑이 어려워지는 과정을 그려보고 싶다’입니다. 상대의 사회적 신분이나 나이 때문에 이뤄지기 어려운 사랑이 아니라 나의 성격이나 기질, 내면의 상태 때문에 관계에 문제가 생기는 경우에 관심이 갔고 그로부터 시작된 이야기가 <유열의 음악앨범>입니다. 조형래 촬영감독에게 시나리오 초고를 보내면서도 ‘인물의 기질이 사랑이 이뤄지는 데 커다란 어려움으로 자리하는 멜로드라마’라고 짧게 설명을 덧붙이기도 했죠.

 

본성이란 이미 갖고 태어난 것으로서 쉽게 바뀌지 않는다는 속성 때문에 비극을 유발하곤 합니다. 본성과 기질의 문제에 관심을 갖게 된 계기가 있습니까.

저 또한 나이를 먹으면서 내가 가진 어떤 면면 때문에 동일한 실수를 반복하고 비슷한 어려움을 겪게 된다는 걸 많이 느낍니다. 그런 순간마다 ‘어째서 조금 더 나은 상태로 만들지 못했는가’를 생각해봤지만 아무리 생각해봐도 쉽게 그게 조정되거나 조절되지는 않더라고요. 말씀하신 대로 기질과 성정은 잘 바뀌지 않기에 똑같은 상황을 맞닥뜨리면 또 같은 실수를 합니다. 그런 나를 발견할 때면 자신에게 화가 나고요. 그럼 이 문제는 어떻게 해야 나아질까요. 내 내면을 인정하고 드러내 보는 겁니다. 그리고 어떤 사람이나 상황이 다가오면 ‘내가 이런 상황에 참 취약하지’라며 좀 더 생각하고 천천히 판단해보려는 데까지는 해볼 수 있을 거 같았습니다. 물론 인간인 이상 득도의 경지에 이르지 않고서야 문제를 단박에 해결할 수는 없겠죠. 그래도 아주 조금은 나아지는 게 있지 않을까요. 그런 생각을 하면서 이 영화의 주인공들이 시대를 달리하면서 조금은 달라지고 그 달라진 면면을 주고받으면서 마지막 장에 이르러서는 어쩌면 조금은 좋아질 수도 있지 않겠냐고 기대하며 엔딩까지 다다른 겁니다.

 

본인의 기질은 어떻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굉장히 내성적이고 감정의 기복이 심한 편이에요. 단단한 마음으로 감정 상태를 무심하게 유지해나가질 못합니다. 그런 부분 때문에 실수하고 어려움을 겪어요. 나이가 들어서도 그런 면이 잘 바뀌지는 않더라고요.

<유열의 음악앨범>

그렇다면 미수와 현우의 기질과 성정은 어떻게 설정했나요. 그 기질 때문에 이들 사랑에 난관이 생기는 걸 텐데요.

대사에도 있듯이 미수는 두려움이 있어요. 마음대로 잘 안 되는 일은 미리 대비해두며 살아야 한다는 압박도 있고요. 안전해지고 싶다는 바람이죠. 이런 기질의 사람은 본인의 속은 힘들어도 맡은 일은 되게 잘할 거로 생각했어요. 영화에서 핑클의 ‘영원한 사랑’이 나오는 장면, 즉 미수와 현우가 서로 만나지 못하는 순간을 생각해 보면 그때도 미수가 잘못한 건 하나도 없거든요. 그런데도 미수는 현우에게 ‘좋은 때에 다시 만나자’고 말하죠. 자신이 지금 웃고 떠들 순간이 아닌 거 같다고 여기는 거예요. 그건 앞서 말한 미수의 기질이 반영된 거겠죠. 그냥 현우에게 “너 왜 그랬어?”라고 말하면 될 것을 미수는 ‘내가 뭔가 부족한가, 잘한 걸까’라고 자문하죠. 그런 기질이 작동하는 사람이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미수가 현우 사이에 여러 문제가 있을 때 미수가 현우에게 “언제까지 불안해야 하냐”고 묻는 것도 같은 맥락이고요. 그런가 하면, 현우는 뭔가 잘못을 한 거 같진 않은데 잘못한 것으로 낙인이 찍혔고 그런 상황으로 옴짝달싹 못 하죠. 그 낙인을 지울 수도, 바꿀 수도 없는 상황이 있고 현우의 삶이 오랫동안 그 상황에 영향을 받는 것으로 보여요. 미수보다는 현우가 더 영화적인 인물이고 좀 더 사실적이고 현실적인 감독 개인이 반영된 건 미수에요.

 

두 사람의 전사가 구체적으로 드러나진 않지만 현우는 고교 시절 예상하지 못한 사건에 휘말려 죄를 지었고 그게 이후 현우의 삶, 특히 미수와의 관계를 이어나갈 때도 크게 영향을 줍니다. 현우의 과거와 미수-현우의 관계가 어떤 균형을 이루며 전개되길 바랐나요.

누구 한 사람만 따라가는 서술 구조만큼은 정말 피하고 싶었어요. 균형이라고 했을 때 단순히 각 인물이 등장하는 신의 숫자가 비등하다는 의미의 균형은 아닐 겁니다. 서술의 중심을 미수에서 현우로 다시 미수로 넘나들게 하는 식의 기회를 얻고 싶었어요. 미수의 서술이 이어짐에도 불구하고 영화의 마지막에는 현우가 찍은 미수의 사진을 배치한 것도 같은 이유이겠지요. 둘 사이의 서사적 균형이 얼추 맞았으면 했어요. 두 인물 중 누구에게 감정 이입해 따라갈 것인가는 관객의 취향과 기질에 따라 나뉠 거예요. 좀 더 쉽게 따라갈 수 있는 건 현우라고 생각하고요.

 

멜로물인 만큼 배우 캐스팅이 관건이었을 겁니다. 미수 역의 김고은 배우와는 그녀의 장편 데뷔작이기도 한 <은교>에 이어 오랜만에 재회했습니다.

김고은 씨는 되게 건강하게 20대를 보내고 있는 거 같아요. ‘건강하다’는 건 20대의 많은 사람이 할 법한 고민과 갈등을 고은 씨도 그대로 겪고 있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여성 배우의 삶이라는 게 자칫 잘못하면 되게 제한적일 수 있잖아요. 그런데 고은 씨는 그런 것에 위축되지 않고 넓은 시야로 자신의 생활을 꾸려가고 작업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제가 고은 씨에게 받은 그런 인상과 기분을 영화에 온전히 담기만 하면 될 것 같았어요. 영화를 함께했으면 좋겠다는 얘길 하면서 특별히 뭘 더 해달라고 말한 건 없었어요.

<은교>
<유열의 음악앨범>

<은교>의 은교와 <유열의 음악앨범>의 미수를 표현할 때 어떤 면모가 좀 더 드러나고 표현되길 원했는지요. 

<은교>를 시작할 때 고은 씨는 정말 호기심이 많은 아이 얼굴이었어요. 은교에게는 호기심이 가장 중요했고 <은교>는 그런 호기심이 없다면 출발조차 할 수 없고 존재할 수도 없는 이야기에요. 그 당시 고은 씨와 호기심이라는 단어는 정말 잘 어울렸어요. 지금의 고은 씨는 그간 어마어마한 선배들과 연기해오면서 내면이 상당히 풍부해졌다고 봐요. 그래서 미수를 연기할 때 그냥 있는 그대로의 고은 씨의 모습, 지금 상태 그대로 자연스러우면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물론 ‘자연스럽다’는 게 가장 어려운 일이죠. 저도 좀 전에 사진 촬영할 때 ‘자연스럽게 해주세요’라는 요청을 전혀 수행하지 못했잖아요. (웃음)

 

정해인 배우를 현우 역에 캐스팅하고 난 뒤 어쩌면 대사의 일부가 수정된 게 아닐까 싶기도 했습니다. 이를테면 현우가 자신의 과거와 연관된 친구들을 따라 미수의 제과점을 떠날 때, 은자(김국희)가 “얘 갈 거 같지? 돌아오지 않을 거 같지? 너무 잘 생겼어”라고 말해요. 이때의 ‘잘 생겼다’는 말은 고운 현우의 얼굴이 위태로운 기운으로 이어질 거라는 불안한 암시처럼 들립니다. 또 미수가 현우에게 “너 어떻게 그렇게 웃어?”라고 말하는데 정해인 배우 특유의 해사한 얼굴을 아주 적극적으로 표현한 게 아닐까 싶습니다.

맞습니다. 해인 씨를 가까이에서 보면 단박에 그 이유를 알 수 있을 겁니다. 예를 들면 키가 190m인 사람이 있다고 해요. “너 키가 커서 그러냐, 왜 그렇게 멀대 같이 굴어”, “키 크니까 잘 보여. 바로 너인 줄 알 수 있다”라고 말해요. 이런 말이 특정 외모를 비하하거나 칭찬하려는 게 아니라 그 사람의 고유함을 담은 관용어구가 된 거 같아요. 정해인 배우를 보면서 그의 고유함을 담아낼 만한 말을 하는 게 과장이 아니라는 생각을 했어요. 그런 대사는 진짜 그런 기분이 들어서 보태게 됐습니다. 하지만 해인 배우에게 신뢰와 더 큰 호기심을 갖게 된 건 단순히 그의 웃음이나 얼굴 때문이 아니라 정말 최선을 다해서 진실하게 연기에 임하는 자세 때문이에요. 혹시 마주 앉아 이야기를 하게 된다면 그런 기분이 들기까지는 그리 긴 시간이 걸리지 않을 겁니다. 대화를 잘 이어나가기 위한 그의 의지가 전해지고 말 한마디 한마디를 아주 신중하게 찾아가는 사람이니까요.

 

프레스 킷에도 배우 정해인을 두고 ‘바르고 정직하려고 무진 애를 쓰는 게 보입니다’고 말했습니다. 기질과 성정에 관한 앞선 이야기와 이어서 생각해보면, 배우의 그런 면모가 현우라는 인물에게 중요했다고 보신 거 같습니다.

정말 중요하죠. 현우의 대사 중에 “가진 게 많으면 다 갖고 싶지만 난 강력한 한 두 개만 있으면 되는데”라는 게 있습니다. 일종의 거짓말이죠. 인간이 어떻게 그러겠어요. 아주 잠깐 그런 순간은 있을 수 있겠지만요. 대신 그 말을 진짜인 거처럼 보이게 해줘야 했어요. 그걸 정해인 배우가 해준 겁니다. 정해인 배우가 멜로드라마에 어울린다면 그건 그의 외모 때문이 아니라 그 진짜인 것처럼 믿게 되는 그 사람의 태도에서 오는 거 같습니다.

<유열의 음악앨범>
<유열의 음악앨범>

감독으로서는 그런 정제된 이미지를 깨고 방향을 달리 가보고 싶을 때도 있지 않나요. 전혀 예상하지 못한 면모를 보고 싶은 마음이요.

그런 시도가 이번 영화에 있습니다. 미수와 현우가 만화책을 함께 보는 신이에요. 두 사람의 유쾌한 모습으로만 찍어도 됐는데 현우가 딴전을 피우면 안 될까 싶은 기분이 드는 거예요. 그 장면은 미수가 현우에게 다가가고 현우를 감정적으로 몰아가는 건데 현우는 그러지 않았으면 했어요. 미수는 현우를 좋아하는 게 막 보여요. 근데 현우는 조금은 냉랭한 듯, 이미 냉담해진 게 아닌가 싶은 오해를 불러일으킬 만한 느낌으로 받아쳐 주길 바랐죠. 저희끼리 ‘3일의 휴가’(극 중에서 미수와 현우가 재회해 사랑을 나누며 3일간 함께 보내는 시간)라고 이름 붙인 그 신만 놓고 보면 둘은 지금 정말 좋은 삶의 한때를 통과하고 있어요. 근데 시퀀스로 좀 더 넓혀서 그 신을 보면 사람이 계속 그렇게 유쾌한 상태로만 있으면, 똑같은 표정으로 같은 말을 계속하는 것만 같거든요. 그럼 그다음에 오는 좋은 순간에는 오히려 힘이 없어 보여요. 그래서 표현을 좀 달리해보려고 했던 거죠.

 

미수, 현우에 집중되는 멜로극이다 보니 김고은, 정해인 두 배우와 사전 리딩과 리허설 때부터 상당히 밀도감 있게 대화해나갔을 겁니다.

배우와 이야기를 많이 나누는 편이에요. 제가 지금 이 인물을 통해 뭘 하고 싶은지, 왜 그런지를 설명해요. 그렇다고 아주 구체적인 요구를 하지는 않고요. 특히 이번 작업이 어렵지 않았던 데는 김고은이라는 통역자가 있었기 때문이에요. (웃음) 초반에 정해인 배우로서는 제가 무슨 얘기하는지 잘 모르겠다 싶을 때가 있었을 거예요. 그럴 때 김고은 씨가 통역자가 돼줬고 거기에다 본인의 주석까지 덧붙여줬어요. 그래서 아주 쉽게 빨리 안착했습니다.

 

김고은 배우가 구체적으로 어떻게 통역을 했다는 걸까요. 현장에서 감독님은 어떤 방식으로 배우에게 디렉션을 주나요.

이러 저러한 걸 원하는데 제가 그걸 직접적으로 이야기하긴 싫은 거예요. 왠지 얘기하면 오해가 생길 거 같아서요. 배우의 동작과 표현의 구체성을 말하는 건 적절하지 않다고 생각해요. 예컨대 여기 있는 컵을 30센티만 옮기고 싶어요. 근데 그렇게 말하는 건 그걸 연기할 배우를 옴짝달싹 못 하게 묶어두는 것과 다르지 않아요. 그 배우는 제가 아니잖아요. 컵을 옮기고 싶은 정도와 옮길 때의 속도, 옮기는 방식에는 그 배우만의 것이 있을 거예요. 다만 저는 왜 컵을 30cm 옮겨야 하는가, 그 이유에 관해서만 배우와 정확히 공유하면 됩니다. 촬영 현장은 시간에 쫓기다 보니 조금만 마음이 급해져도 ‘여기서 30cm 옮기라’고 말하고 싶어질 때가 있어요. 그러면 바로 찍을 수 있으니까요. 그런데 그렇게 되면 배우로서는 이유를 알 수 없는 행동을 하게 되는 거라 완전히 실패한 연기가 돼요. 그렇게는 하지 않으려고 해요. 배우의 몸이 움직여야 하고 감독은 배우의 몸이 결정한 대사, 행동, 감정을 기다려야 하는 겁니다.

<유열의 음악앨범> 촬영 현장
<유열의 음악앨범> 촬영 현장

앞서 ‘자연스럽게 한다’라고 한 말도 이러한 방식으로 배우의 몸이 반응하게끔 하는 것과 이어지는 것이겠지요.

이어지죠. ‘자연스럽게 한다’는 말에 조금 더 말을 보태볼게요. 예를 들면 어떤 장면에서 배우가 굳이 행동으로 뭘 보여주지 않아도 되는데 인물의 마음이 막 왔다 갔다 하는 상태인 거예요. 그럴 땐 나와 배우가 서로 얘기를 해서 인물이 지금 그러한 마음의 상태라는 것만 공감이 되면 무슨 행동을 하는가는 문제가 되지 않아요. 그건 배우의 몸이 반응하고 결정한 거니까요.

 

관계의 본질을 드러내는데 삼각관계가 효율적이라고 말하며 삼각 구도에 깊은 애정을 드러낸 바 있습니다. 이번에는 미수, 현우, 미수가 다니는 출판사의 대표인 종우 (박해준)로 이어지는 삼각형입니다.

이번에는 고급스러운 삼각을 만들었다고 자부하며 박해준 배우와 함께 종우를 정말 야심차게 만들었습니다. 그게 잘 작동된 경우는 종우를 두고 열렬한 지지를 보내주셨고요. 그렇지 않은 관객들에게는 종우가 아침 드라마의 ‘실장님’ 같다고 얘기하시더라고요. 종우는 꽤 고유한 캐릭터인데요. 삼각관계의 한 축을 담당하면서도 이 사람이 유치하지 않고 격이 있길 바랐어요. 키다리 아저씨의 성격도 얼마간 있고요. 박해준 배우가 정말 기대대로 멋지게 소화해줬어요. 종우의 말이 미수에게 중요한 의미로 다가갔을 거예요. 예컨대 종우는 미수에게 어째서 기쁨에 대해 그토록 소극적이고 표현하고 힘든 일 앞에서는 그토록 힘들어하는가와 같은 의미의 말을 하죠. 연적 현우가 이 영화에서 어쩌면 가장 과격한 말인 “난 당신이 싫다”고 하는데도 종우는 현우에게 “난 너 좋다”고 얘기해요. 저로서는 종우와 같은 성격이 정말 부러워요. 그건 돈이 많고 적고의 문제는 아닐 거예요. 종우의 단단한 내면에서 가능했다고 봅니다. 그런 게 미수에게 영향을 미쳤을 거예요.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미수가 현우에게 ‘네가 최고야’라고 열렬한 몸짓을 해 보이는 것도 그런 영향의 일면이겠죠.

 

수영에 천부적인 재능이 있지만, 그 실력을 제대로 이어가지 못하는 <4등>의 광수, <침묵>에서 사건 해결을 위해 고군분투하는 동성식 검사에 이어 박해준 배우와는 세 번째 작업입니다.

그간 워낙 강렬한 안타고니스트를 연기했고 또 굉장히 매력적으로 보였는데요. 제가 알고 있는 그의 매력을 좀 보여주고 싶었어요. 실제로 그는 되게 부드럽고 어떨 땐 허당기 가득하고 또 엄청 재미있어요. 그의 이런 모습을 보여줄 자신도 있었습니다. 그만큼 이번에 종우 캐릭터를 잘 그려가 보려 했습니다.

<유열의 음악앨범>

<4등>을 함께한 조형래 촬영감독과 다시 만났는데요. 음악이 흐르듯 흘러가는 카메라의 움직임이 눈에 띕니다.

철저하게 배우의 마음의 상태에 따라 카메라 무빙을 가져갔어요. 카메라가 이 자리에서 이렇게 움직이면 멋지게 보일 수 있을 거 같다 싶을 땐 그걸 참아내는 게 중요했고요. 조형래 촬영감독이 그런 지점을 공감해줬습니다. 이미 <4등> 때 호흡을 맞추며 서로 간의 학습이 된 부분이 있었죠. 특히 미수의 빵집 내부는 정말 좁아서 예상치 못한 움직임이 조금이라도 있으면 촬영 자체가 어려웠을 텐데 조형래 촬영감독이 그걸 다 견디고 참아냈습니다.

 

카메라의 움직임이 아주 도드라지는 경우의 한 예로 현우가 군대 가기 전날 밤, 미수의 자취방에서 미수와 현우가 처음으로 손을 잡는 장면이 있습니다. 카메라가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서서히 수평 움직임을 보인 뒤 바닥과 침대에 각각 누워 있는 인물의 위치 차를 이용한 수직 움직임으로까지 이어집니다.

지금 말한 장면은 배우들은 움직이지 않고 대사로서 관계를 드러내야 할 경우입니다. 연출적으로 약간의 장난을 쳐보고 싶은 마음도 있었고요. 현우가 군대 가기 전날 밤, 젊은 남녀가 한 방에 있는데 어떻게 있을까를 최대한 제한된 프레임으로 보여주면서 정보를 하나씩 하나씩 드러내는 방식으로 진행한 것이죠. 무슨 일이 벌어질지에 관한 긴장을 유지하면서요. 미수의 얼굴만 보이는데 현우의 목소리가 들리고 현우가 어디에 있는 건지에 대한 정보를 한 템포 늦게 포커스를 따라가며 주고. 서로 위치 차가 있는 상태로 누워 있다는 게 그제야 보이고. 그런 다음 대사에 인물의 심리가 드러나고 있다고 느껴지는 순간을 따라 포커스가 오가는 식이에요. 장면의 구체성을 계획하고 간 경우입니다.

 

고등학생 시절 현우가 겪은 비극적 사건의 현장을 암시하는 듯한 학교 옥상 장면은 특히 좀 다르게 찍힌 거 같습니다. 극도의 앙각으로 옥상의 위태로운 경계와 구름 한 점 없이 너무도 새파란 하늘을 둡니다.

두 번 등장하는 옥상 장면은 서로 다른 계절에 찍었고 완전히 다른 무드인데 그 두 개가 연결된 듯 보이길 바랐습니다. 그 연결을 생각해서 첫 번째 옥상 장면을 좀 더 힘줘서 찍었고요. ‘어떤 이유로 나중에 또 나올 거예요. 이 장면을 기억해주세요’라는 의도가 괄호 쳐져 있어요. 제가 촬영 들어가기 두세 달 전쯤 조형래 촬영감독에게 ‘이 영화를 한 종류의 렌즈로 찍는다면 무엇으로 찍고 싶은가’라고 물은 적이 있습니다. 촬영감독이 한참 고민하다가 ‘35mm로 찍고 싶다’고 하더라고요. A, B 카메라를 모두 35mm로 쓸 수는 없어서 최종적으로 35mm와 40mm 렌즈로 영화의 약 98%를 찍었습니다.

 

35mm로 찍었을 때 얻을 수 있는 효과는 무엇이었나요.

35mm로 찍으면 렌즈의 광각적 차이로 텍스트의 뉘앙스가 바뀌지는 않기에 영화 속에서 시간이 흘렀다고 해도 배우의 연기와 공간이 일종의 동일성의 원칙을 유지하게 됩니다. 시대가 계속 바뀌는데도 그 차이가 크게 만들어지지 않는다고 할까요. 찍기는 더 어렵죠. 가까이서 찍으려면 더 가까이 다가가야 하고 와이드로 찍으려면 실제로 뒤로 물러나야 하니까요. 조형래 촬영감독과 <판소리 복서>(2018, 감독 정혁기)로 장편 촬영감독에 데뷔한 강민우 B 카메라 두 사람이 <4등>에 이어 다시금 호흡을 맞추며 다가가거나 물러서면서 카메라의 위치를 찾았습니다. 좁은 빵집 촬영이 정말 어려웠는데 그 어렵고 불편한 촬영 환경을 반대로 적극적으로 활용해서 어떻게 영화적으로 보이게 할까를 고민해줬습니다.

<유열의 음악앨범>
<유열의 음악앨범>

미수와 현우는 짧은 만남 뒤 긴 헤어짐의 시간을 갖고 서로를 그리워하다 재회합니다. 크고 작은 만남과 이별을 거듭하는 구조로 자칫 지루하거나 작위적으로 보일 수도 있어 선택할 때 조심스러웠을 거 같습니다. 앞서 인물의 기질이 멜로의 전개에 걸림돌로 작동한다고 했는데요, 계속되는 헤어짐과 만남의 구조와 기질의 문제는 어떻게 연결해보려 했습니까.

얼핏 외적으로만 보면 상업적으로 꽤 안정적인 형태의 영화를 만든 게 아니냐고 할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저로서는 이번에 어마어마한 모험을 했어요. 기본적으로 이 영화는 신청곡과 사연이 번갈아 가며 이어지는 라디오 프로그램과 같은 구조를 띠고 있어요. 그사이에 인물의 기질이 반복되고 있기도 하고요. 우연히 만남과 이별이 반복된다고 설명하는 건 기승전결의 서사 구조의 틀을 전제했을 때 제기될 수 있는데 저로서는 그런 구조를 전제하지 않았던 거죠. 지금의 구조에 음악을 배치해 조응해가는 방식을 취했습니다. 음악도 그렇습니다. 메인 테마곡을 하나 정해두고 시작의 지점, 클라이맥스, 엔딩에서 그 곡을 써서 감정을 움직여나가는 방식을 몰라서 안 쓴 게 아니에요. 그 방법이 아니라 시대별로 각기 다른 음악을 선별해서 영화에 넣은 건 사람의 내면이 어렵지만, 조금씩이나마 변화한다는 걸 음악과 조응해가며 보여주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그런 변화를 굳이 발전이라고 표현하지 않더라도 변화하는 상태에 있다면 다른 국면이 열릴 수 있을 거 같았습니다. 영화적으로 대단히 모험적인 시도를 했다고 생각하고 그 과정은 상당히 재밌었고요.

 

그런 만큼 음악 선곡에 굉장한 공을 들였을 텐데요. 300곡 정도의 리스트를 만들어 스태프와 회의를 거쳐 추렸다고 들었습니다.

초고부터 음악은 포함돼 있었어요. 그 이후 계속해서 곡들이 들어왔다가 나가길 반복했고요. 그러면서 다시금 깨달은 건 가요는 확실히 가사가 들린다는 거예요. 가사가 의도치 않게 영화의 이야기에 적극적인 내용으로서 들어오게 되거나 가사가 압도적이라 음악이 주인공이 되고 영화의 주인공들이 뮤직비디오의 한 장면처럼 보이는 경우는 배제했습니다. 또 저희가 영화에 맞는 스코어를 따로 만든 게 아니다 보니 어떤 곡은 1절은 영화와 어울리는데 2절은 뜬금없어 보이더라고요. 그런 곡은 쓸 수가 없었죠. 그런 시행착오를 겪었습니다. 가사가 들려도 이것이 내용의 일부로서 들려오면 그런 곡은 선택했습니다. 이소라, 루시드 폴의 곡은 노래 자체가 자기 옆에 곁을 내주는 것 같아 택했습니다.

 

콜드플레이의 <픽스 유>를 엔딩 곡으로 썼습니다. 워낙 유명한 곡이고 메시지도 강렬한데요.

그 곡의 선곡만 앞선 선곡의 과정과 반대로 진행됐어요. 음악이 영화 장면을 불러낸 경우죠. 제가 공연이나 뮤직비디오에서 뛰는 크리스 마틴의 모습에 중독돼 있었어요. 미수가 뛰는 순간에 <픽스 유>를 꼭 붙이고 싶었습니다. 이 욕망은 이번 영화를 하기 한참 전부터 갖고 있었어요. (웃음)

 

이번에 영화를 준비하면서 새롭게 알게 된 곡도 있나요.

신승훈을 모르는 대한민국 국민은 없잖아요. 그런데 저는 이번에야 <오늘같이 이런 창밖이 좋아>라는 곡을 알게 됐어요. 그리고 핑클의 <영원한 사랑>. 그 곡이 이 정도로 ‘해피 바이러스’를 뿜어내는 곡인 줄은 몰랐습니다.

<유열의 음악앨범>

작디작은 제과점이 미수와 현우가 처음 만나는 곳이자 두 사람이 첫 번째로 재회하는 공간으로 나옵니다. 빵을 빚어 만들고 미수, 현우, 은자가 좋은 한 때를 보내는 공간으로서도 상당히 로맨틱한 공간으로 자리합니다.

제과점은 초고에서부터 정확하게 있던 설정인데요. 처음에는 코너에 떡 하니 자리 잡아서 아주 잘 눈에 띄는 기름집을 섭외했어요. 다들 그 공간을 꾸며 제과점으로 쓴다고 생각하고 있을 때 제가 그 기름집의 귀퉁이 일부만 제과점으로 쓰겠다고 했어요. 그 결정은 지금 생각해도 참 잘한 거 같아요. 미수의 제과점이 어깨가 떡 벌어진 사람처럼 눈에 확 띄었다면 마음에 들지 않았을 거예요. 뭔가 잘 풀리지 않던 미수, 현우가 멈출 수밖에 없는 곳이 이 빵집 앞이라는 이야기의 목표에 부합하는 적절한 위치와 크기였습니다.

 

미수가 살았던 자취방은 시간이 흐른 뒤 현우의 자취방이 됩니다.

초고의 설정이긴 한데 공간을 구할 때 핵심 키워드는 사실 골목이었어요. 골목이 굉장히 복잡하게 엇갈려 있는 곳에서 촬영하고 싶었습니다. 골목 한쪽으로 사람이 나왔다가 또 다른 골목으로 사라져서 이내 보이지 않는 거죠. 그런 골목들이 길게 이어져서 마치 길을 잃을 것만 같은 그런 곳이길 바랐어요. 그런 골목 한쪽에 빵집이 있고 또 다른 쪽에 자취방이 있는 구조를 원했어요. 그런 지도를 그리던 중 제작부에서 지금의 자취방을 구했어요. 앞과 뒤로 창이 나 있어서 기이하게 긴 구조가 만들어졌죠. 창밖으로는 고저 차이가 나는 산언덕을 따라 이어지듯 붙어 있는 주택들이 있고 멀리 구도심이 보입니다.

 

실제 그 동네는 어딘가요.

골목과 자취방은 서울 종로구 창신동이고요, 빵집은 인천 동구 화수동이에요. 창신동의 골목 한쪽에 화수동을 이어붙인 지도를 그린 셈이지요. 자취방은 세트로도 지었는데 완벽하게 실물과 똑같은 크기로 지었습니다.

<유열의 음악앨범>

미수가 다니는 출판사가 있는 동네, 미수, 현우, 종우의 삼각관계가 극적으로 전개되는 동네는 <사랑니>의 인영(김정은)의 집이 있던 삼청동에서 그리 멀지 않은 종로구 북촌 일대입니다. <사랑니> 때와 비교하면 그곳도 많이 바뀌었지만 그런데도 오래된 동네 특유의 야트막한 언덕길과 고도가 느껴지는 공간감이 남아 있고 그게 영화에서 활용됩니다. 얼마간은 영화적 환상을 채워주는 공간으로써 멜로드라마의 극적 긴장감을 고조시키기에 좋겠다고 판단한 거 같습니다.

이 동네를 제가 참 좋아합니다. 기존의 것을 밀고 재개발에 들어간 공간은 위도 경도의 의미가 없어진 거 같아요. 그런 의미에서 강남 대치동이나 부산의 해운대나 저에게는 완벽하게 똑같아 보이는 곳입니다. 어디서 찍어도 상관이 없을 정도예요. 공간이라는 의미가 없는 무대가 만들어진 거라 재미가 없어요. 그에 비하면 이 인근은 물론 정말 빠르게 변하고 있고 과거보다는 그 맛이 덜해졌지만 적어도 우리가 여기서 살고 있다는 기분을 느끼게는 해주죠. 물론 이 역시 판타지겠지만요. 제 스태프 중에 대학 시절에 <사랑니>를 보고 ‘아, 나도 서른 살쯤 되면 직업을 갖고 영화에 나오는 그런 집에서 살 수 있겠구나’라는 생각을 했다고 해요. 나중에 보니까 그건 정말 말도 안 된다는 걸 깨달았다고 하더라고요.

 

이 동네에서 현우가 종우의 차를 타고 자신을 떠나려는 미수를 쫓아 죽을힘을 다해 달리는 장면이 있습니다.

며칠 걸려 찍었어요. 정말 사력을 다해서 뛰길 원했습니다. 배우에게 카메라 세팅이 이러 저러하니 그것에 맞춰서 뛰어달라고 한 게 아니라 정말 사력을 다해 뛰면 그걸 어떻게든 찍어내겠다고 말하고 그 방법을 연구했어요. 결국 찾은 방법이 카누와 축구 선수들 10명 이상을 섭외해 2인 1조로 팀을 짜고 그분들에게 카메라를 들고 뛰어 주십사 청했죠. 계주하듯 구간별로 각 팀이 뛰면서 카메라를 다음 팀에게 넘기고. 그 동네가 워낙 골목이 많아서 도로를 완벽하게 통제할 수가 없었어요. 누군가는 참 쓸데없는 데 힘을 뺐다고 할 수도 있겠지만 제게는 정말 중요한 장면이었거든요. 그 정도로 사력을 다해 뛰어야 하는 현우의 마음을 표현해야 했으니까요. 그렇게 뛴 뒤 현우의 목덜미에서 흘러내리는 땀을 기억해준 관객분이 있었어요. 정말 고맙더라고요. (웃음)

<유열의 음악앨범>

사람은 쉽사리 변하지 않지만 조금이라도 변할 수 있다면 그 결정적 계기는 사랑이라고 말해왔습니다. <유열의 음악앨범>을 만든 현재는 어떤 마음일까요.

제가 지금 나이가 들고 늙어서…. (웃음) 아마도 조금은 부드럽게 만들지 않았을까 싶어요. 그리고 사람의 기질은 변하지 않지만, 서로가 주고받는 영향으로 조금은 행복하고 따뜻하게 마무리될 수 있는 게 아닐까 싶고요. 지금의 제게 사랑이란 그런 상태입니다. 그것을 꼭 사랑이라고 표현하지 않아도 되고, 우정이거나 믿음일 수도 있지요. 조금 더 그 의미가 넓어지고 있어요. 무한대로, 절대적으로 그런 감정의 상태를 유지해나가면 변하지 않을 거 같던 사람도 약간의 달라짐을 보일 수 있다는 데 동의합니다. 지금으로서는 그런 기분이 들어요.

 

또 다른 멜로드라마를 준비하고 있나요.

계속 잘해보고 싶습니다. 만약에 제가 쓸데없는 짓을 하지 않고 앞으로 20년간 멜로드라마만 만든다면? 2년에 한 편씩 10편을 만들 수 있으려나요? 제 건강이 허락되고 세상의 운을 다 다 받아서요. 그럼 우리가 오랫동안 존경해온 감독들이 만든 영화의 근처에라도 갈 수 있을지도 모르겠네요. 근데 생각해보면 그것이야말로 진짜, 진짜 어려운 일이잖아요. (인터뷰 장소의 책장에 있던 책) 『꽁치가 먹고 싶습니다』를 읽고 싶었는데 아직이네요. 최근에 오즈 야스지로의 <부초>(1959)를 블루레이로 다시 봤어요. 너무 마음이 힘들어서 마음으로라도 도망을 가고 싶어서. 역시나 그 위대함을 다시 한 번 느꼈습니다. 동시에 오즈 야스지로 감독이 이런 작업을 오랫동안 계속해 왔다는 게 얼마나 힘든 일이었을지도 생각해보게 됐습니다.

 

오랫동안 준비한 <로기완> 프로젝트는 결국 멈춘 건가요. 그렇다면 차기작은 아예 다른 작품이 될 가능성이 높아진 것이겠지요.

<로기완>은 그렇게 됐습니다. 잘 만들려면 제가 현지에서 3~4년쯤 머물며 준비해 정말 마이너한 시나리오를 쓰고 말도 안 되게 많은 제작비가 필요할 거 같았어요. 저도 누군가에게 설득할 방법이 없어 보였습니다. 정말 허들이 높은 프로젝트라는 걸 뒤늦게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아예 다른 프로젝트를 구상합니다. 다음 영화를 또 할 수 있기를 진심으로 바라며 열심히 하려고 합니다.

ⓒ소동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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