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일요일 오후, 아홉 명의 배우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더위와 습기로 우중충한 날씨였지만, 스튜디오에는 활기가 넘쳤다. 한쪽에서는 조명을 설치하고, 다른 한쪽에서는 의상을 갈아입었다. 누군가는 카메라 앞에 서서 포즈를 취했고, 다른 누군가는 인터뷰어와 마주 앉아 이야기를 나누었다. 분주하게 실내를 돌아다니다가 어느 모퉁이에서 마주치면, 서로 다정한 눈짓과 씩씩한 웃음을 주고받았다. <리버스>는 지난 일 년 동안 만나왔고, 앞으로 계속 만나고 싶은 배우들을 떠올리며 초대장을 발송했다. 강진아, 공민정, 김시은, 김예은, 이재인, 이태경, 임선우, 정하담, 한해인 배우가 흔쾌히 여름 나들이에 응해주었다. 이제 막 작품 활동을 시작한 새로운 얼굴부터 연기의 여러 가지 맛을 알아가는 중인 고민 깊은 얼굴까지, 각양각색의 매력을 지닌 아홉 명의 배우들을 한 가지 단어로 수식하기는 어렵다. 젊고, 재능 넘치는, 여성 배우라는 공통된 설명 역시 막연하다. 이번에 그들을 만나며 느낀 교집합은, 아홉 명 모두 각자의 자리에서 열심히 오늘을 살아내는 사람들이라는 점이다. 이들은 평범한 일상과 특별한 꿈을 엮어 매일매일 자신만의 길을 만든다. 지금 이 순간, 연기와 삶을 향해 누구보다 용기 내어 걸어가는 아홉 명의 배우들을 소개한다.
글 손시내 정지혜 차한비 사진 소동성 김혜미 의상 HALEINESHOP, NAIN 메이크업이유정
혼자여도 씩씩하게
<극장 쪽으로> <물비늘> 김예은
쌍꺼풀 없이 크고 깊은 눈과 중저음의 매력적인 목소리. 무표정으로도 어떤 사연과 깊은 울림을 전하는 김예은을 두고, 관객은 <킹덤>에서 좀비 떼에게 희생당하는 지율헌 의녀를 먼저 떠올릴 것이다. 한데, 실제 김예은은 피식 웃기만 해도 환하게 풀어지는 얼굴을 지녔다. 긴 생머리를 날리며 시원시원하게 걸을 때는 풋풋하고 건강한 젊음이 느껴지기도 한다. 헤어진 옛사랑의 연락을 기다리던 수줍은 <은하 비디오>(김현정, 2015)의 은하. 선망하던 교사 앞에 당당하게 등장하는 <겨울 꿈>(김태진, 2015)의 소정. 그리고 무료한 일상을 잊게 해 줄 만남을 기대하며 골목을 헤매는 <극장 쪽으로>(유지영, 2017)의 선미. 배우 김예은을 섣불리 규정할 수 없음을 분명하게 보여주는 캐릭터들이다.
신수원 감독이 tvN 단막극 <물비늘>(2018)을 찍으면서 염두에 뒀던 것도 김예은이 지닌 극단적으로 상반된 이미지가 아니었을까. 극중에서 소문난 왈가닥 여고생과 사연 많은 도도한 여성을 동시에 연기하면서 얼마간의 자유를 맛봤지만, 정형을 요구하는 세상이 여전히 갑갑하다. 그녀가 최근 BBC 드라마 <킬링 이브>에 푹 빠져 있는 것도 그런 이유에서다. 아름다운 여성 사이코패스 킬러와 병적인 흥미로 그녀를 좇는 정보국 요원의 이야기에 사로잡힌 김예은은 아쉬움을 이렇게 전한다. “여자도 찌질할 수 있어요. 남자보다 더 찌질할 수 있죠. 소위 덕후처럼 밖에서 보는 아름다움의 기준을 떠나서 자기 일에 몰두하는 사람, 또는 굉장히 프로페셔널해 보이지만 허점 있는 사람을 언젠가 연기해보고 싶어요.”
그런 그녀가 요즘 빠져든 ‘덕질’은 게임 <배틀그라운드>. “제게 약간 이상한 파괴본능이 있나 봐요. 오락실도 일주일에 두 번씩은 꼭 가는 거 같아요. 전보다는 많이 줄었지만. (웃음)” 덕질도 하나로는 부족하다. 그녀는 풋살에도 맛들였다. 월정액 내고 일주일에 한 번씩 풋살 경기에 뛰어든다. 코치를 제외하면 모두 여성들이다. “여자들끼리 같이 할 수 있는 게임이 얼마 없잖아요. 넘치는 에너지를 그렇게 빼내고 있어요. (웃음)” 유튜브 영상을 매일 뒤지는 메릴 스트립도 빼놓을 수 없다. “자신의 단단한 철학을 아주 소중하게 잘 지켜온 분인 것 같아요. 멋있고 존경할만한 인물을 연기하더라도 그 인물의 나약한 면모를 드러내는, 흔치 않은 배우죠.” 얼마 전, 김예은은 소속사를 나왔다. 제 힘으로 제 길을 찾아보려는 마음이다. “혼자이지만 씩씩하게 해보려고요. 이제, 정말 독립한 거죠! (웃음)”
김선명
더 긴 호흡으로
<밤의 문이 열린다> <폭설> 한해인
머리를 굉장히 짧게 자른 한해인을 처음에는 잘 알아보지 못했다. 주연을 맡은 두 번째 장편영화 <폭설>(감독 윤수익)의 보충촬영이 있었단다. “올해 초 촬영을 끝내고 머리를 꽤 길렀는데. (웃음) 결국 다시 잘랐어요.” <폭설>에서 한해인은 자신의 삶과 연기에 모두 만족하지 못하는 배우 역을 맡았다. “주인공은 학창 시절의 기억, 친구 혹은 연인 같은 감정을 나눴던 과거의 인물을 떠올리면서 현재를 곱씹어보고 얼마간 성장하죠.” 극 중 인물로 변신하기 위해 머리만 자르게 아니다. “강원도에 한 달 동안 머물면서 열심히 서핑을 배웠어요. 제가 이래봬도 운동 신경이 조금 있어요. 얼마 안 돼서 보드를 좀 타게 됐는데, 막상 촬영에 들어가니까 서핑 장면을 찍지 않는다고 해서. (웃음) 지금은 실력이 다시 제자리예요. (웃음)”
단편 작업에 주로 참여했던 배우 한해인은 보폭을 조금씩 넓혀가고 있다. 어릴 때부터 연기를 시작했고, 대학에서 연기를 전공했지만, 자신이 보다 좋아하고 위로받는 ‘영화’에 집중해 관객과 만난 지는 채 몇 년이 안 된다. 그래서일까. 뒤돌아보지 않고, 내달리는 중이다. “장편은 단편에 비해 인물의 여정을 좀 더 긴 호흡으로 보여주잖아요. 배우 입장에서도 좀 더 자세하게 인물을 구성할 수 있어서 좋았어요.” 그녀는 처음으로 주연을 맡은 장편영화 <밤의 문이 열린다>(감독 유은정, 2019) 개봉과 후반작업에 들어간 두 번째 장편 <폭설>의 보충 촬영 사이에, 본인이 직접 연출하고 주연한 단편 <우리의 실수>도 완성했다. “계속 감독할 거냐고요? 아니요, 아니요. (웃음) 모르겠어요. 대단한 작품을 연출하고 싶은 욕망이 있는게 아니고요. 평소에 그림 그리듯이 어떤 이야기를 풀어내고 싶을 때 주변 친구들의 도움을 빌려서 그냥 작은 영화를 만들지 않을까 싶어요.”
그동안 한해인은 주로 여성 배우들과 연기 호흡을 맞춰왔다. <밤의 문이 열린다>에서도 전소니와 함께 주연을 맡았고, <폭설>은 서핑하는 두 여성이 주인공인 퀴어 영화다. 연출작 <우리의 실수>도 임신중절의 상처를 공유하게 된 두 여성이 극을 이끌어간다. 차분한 분위기와 저음의 목소리 때문인지 무거운 분위기의 역할이 대부분인데, 이제는 “소모되지 않는 주체적인 역할”, “조금 더 편안하고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는 역할”을 연기하고 싶은 마음이 크다. ‘현재’를 고민하는 <폭설>의 주인공에 한껏 빠져든 것도 그 때문이다. “서핑을 배우고 나서 몸을 많이 움직이는 취미를 하나 가져보고 싶었어요. 그래서 무용을 해볼까 고민하기도 했고. 한데, 취미가 너무 많아서 아직 시작도 못했지만. (웃음) 독립영화든, 상업영화든 앞으로는 가리지 않고 계속해서 부딪쳐 보려고 해요. 연기는 인물이 지닌 세계관을 공유하는 거잖아요. 한 작품 한 작품 할 때마다 제가 조금씩 커가는 느낌이에요.”
김선명
마음이 부르면 어디든지
<내가 사는 세상> <모두의 거짓말> 김시은

지난 3월 <내가 사는 세상>(2018)의 개봉으로 김시은을 만났다. 그때 그녀는 “이대로 가면 안 되겠다 싶어서 1년 정도 느슨히 쉬어 보려 한다”고 말했다. 슬럼프, 한계, 벽이라는 단어들 앞에서 그녀는 자신에게 '안식년'이 필요하다고 판단했다. 그로부터 4개월. 김시은은 어떤 상태일까. 잘 쉬고 있는 걸까. 성큼성큼, 김시은이 스튜디오로 들어선다. 머리는 한껏 짧아졌고 옷차림은 더없이 가볍다. “10월 방영 예정인 OCN 드라마 <모두의 거짓말>을 한창 촬영 중이다. 밝고 쾌활한 왈가닥 형사 역할이다. 머리보다 몸이 앞서는 그야말로 열혈 형사라 스타일도 좀 바꿨다. 나름 액션 연기도 있어서 헬스장도 다니고 달리기도 하고 살도 찌우고 있다. (웃음)” 확실히 건강하고 경쾌해진 인상, 그런데 가만, 안식년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물론 ‘느슨한’이라는 수식이 붙긴 했지만 말이다. “재충전? 이미 됐다. 아주 잘! 올해 상반기 내내 작품을 하지 않고 쉬었다. 그사이 2주간 스페인 여행도 다녀왔다. 혼자서 해외여행은 처음이다. 배우로서의 내 일을 처음부터 다시 생각해보고 싶어서 떠났는데 다녀오길 정말 잘한 거 같다.”
지난해 김시은은 ‘과부하’였다. 드라마 <미스터 선샤인>(2018), <손 the guest>(2018)에 이어 영화 <사자>(2019) 에 출연하면서 지칠 대로 지쳤다. 연기에 있어 의욕과 에너지는 최고라고 자부했건만 “내가 온전히 일의 주도권을 쥐고 있는가”를 자문했을 때 ‘그렇다’고 말할 수가 없었다. “<내가 사는 세상>에 이어 내가 극을 끌어가는 장편 주연 작품 촬영에 들어갔다. 나만 잘하면 된다는 강박이 생겼고 잘한다는 걸 보여주고 싶은 마음이 컸다. 그런데 스케줄이 계속되면서 스스로 만족하지 못했고 자꾸 헤맸다.” 준비 없이 욕심만 부린 자신을 발견하고서 그녀는 단호해지기로 했다. 심기일전. 딱 이 말대로 다시 시작했다. 판단이 서자 휴식은 문제가 아니었다. 그 뒤 김시은은 오디션, 미팅 스케줄 관리, 의상 챙기기, 운전해서 현장 가기 등 모든 일정을 직접 챙겼다. 내가 원하는 방식으로 내 일을 해보려는 심산이었다. 그렇게 재정비 한 이후 다시 시작한 첫 작품이 <모두의 거짓말>. “이번에 형사 현직 강력계, 광수대 형사분들을 직접 만났다. 광수대는 여성 형사가 거의 없더라. 이 작품 이후 여성 비율이 현저히 낮은 직업군에서 일하는 역할을 맡아보고 싶어졌다.”
김시은은 지금의 “편안한 마음 상태를 계속 유지하며 연기할 방법”을 찾고 있다. “어렸을 때부터 ‘꿈은 항상 크게 가져라. 뭘 하든 1인자가 돼라’는 얘기를 많이 들어서일까. (웃음) 내가 되게 잘하고 있다고 생각했고 최고가 될 거라는 야망도 컸다. 그런데 쓸데없는 욕심이 사람을 얼마나 피폐하게 하는지. 그동안은 최고였다면, 이제는 최선이다. 연기도 부족함을 알았으니 정말 최선을 다하는 수밖에 없다. 그리고 앞으론 원하는 곳이라면 위험을 감수하고서라도 자유롭게 가보고 싶다. 넓은 바다에서 자유롭게 헤엄치는 고래처럼 말이다. (웃음)”
정지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