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들을 믿으면 된다
<우리집> 윤가은
글 정지혜 사진 소동성 / Interview / 2019-08-27

장편 데뷔작 <우리들>(2015)로 관객과 평단의 주목을 받은 윤가은 감독이 두 번째 장편 <우리집>(2019)을 만들었다. 윤가은 감독은 전작에 이어 또다시 ‘우리’라 서로를 부르는 아이들의 세계를 탐구한다. <우리들>이 아이들 세계의 이면을 들여다보고 사랑의 역학을 파고들었다면, <우리집>은 가족을 지키고자 하는 아이들의 순수한 마음과 그들의 의기투합에 초점을 맞춘다. 단편 <손님>(2011), <콩나물>(2013) 등에서부터 윤가은 감독은 당면한 문제를 어떻게든 자력으로 해결하려 애쓰는 소녀들의 시도와 그들이 맞닥뜨려야만 하는 차가운 현실의 간극을 꾸준히 그려왔다. <우리집> 또한 그 연장선에서 말해야만 한다. <우리집>의 개봉을 앞두고 윤가은 감독과 마주 앉았다. 연출자로서 그가 거듭 말하고 싶은 지점, 영화로 이를 구체화할 때 아이들의 세계를 불러오는 이유와 그 세계의 매혹에 관해 물었다.

 

 

 

<우리들>(2015)에 이어 제작사 아토와 함께했다. 그간 아토가 만든 작품 가운데 가장 큰 제작비(순제작비 5억)가 들어간 것으로 안다.

<우리들>을 만드는 과정이 정말 좋았다. 아토를 이끄는 4명의 프로듀서가 온 마음으로 장면 하나하나를 같이 고심해줬다. 스태프들과도 합이 잘 맞았다. 이번에도 아토의 김지혜 프로듀서가 그러더라. “네가 하고 싶은 영화가 내가 만들고 싶은 영화다.” 나를 믿어주는 동료들이 있다는 게 얼마나 든든한지. 그래서 어떻게든 아토에 돈을 벌어다 주고 싶다. 내가 이런 얘기를 하면 “돈 벌 수 있는 영화를 하면서 그런 말을 해라”라고 말하는 분들도 계실지 모르겠다. (웃음) 다행히 <우리들> 때는 적지만 수익을 냈고 스태프들과 지분계약을 해 그 수익을 나눴다. <우리집>은 손익분기점이 6만 명이다. 온 가족이 함께 볼 수 있는 영화, 100% 대중영화라고 생각하고 만들었다. 어떻게 하면 어린이 관객이 좀 더 편안하고 쉽게 볼 수 있을까를 고민한 영화기도 하다.

 

장편 데뷔작 <우리들>로 제37회 청룡영화상 신인감독상, 제25회 부일영화상 신인 감독상, 제53회 백상예술대상 영화 시나리오상, 제36회 한국영화평론가협회상 신인감독상 등을 수상하며 큰 관심을 받았다. 두 번째 장편을 만드는데 상당한 부담으로 작용했을 거라 짐작한다.

두 번째 영화는 첫 번째보다는 조금 더 편안하게 만들 수 있겠지 싶었는데 전혀 아니더라. ‘아, 영화 만드는 게 매번 이렇게 어려우면 어떡하지’ 싶었다. <우리들>의 관심과 호평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개봉조차 염두에 두지 않고 만든 영화였으니까. 그러다 보니 그 모든 과정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사실 잘 몰랐다. 주변에서 조언을 많이 해줬는데 되레 갈피를 못 잡겠기도 했다. 그런 상황에서 그나마 아토와 작업해서 내가 의지한 부분이 크다. 만드는 내내 ‘이걸 완성할 수 있을까, 개봉할 수 있을까’를 걱정했는데, 이렇게 여름에 개봉할 수 있게 돼 정말 감사할 따름이다.

 

예를 들면 어떤 조언들이 있었나.

‘다음 영화는 큰 영화를 해야지, 기반을 다져야지, 상업적으로 어떻게 해나갈 수 있는지 발판을 빨리 만들어라, 성인 배우들과 작업해라, 진짜 영화를 만들어야지’ 등등. 그런 말을 들으면 ‘지금껏 내가 만든 건 영화가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 모든 말이 내 안에서 소화가 되지 않았다. 도대체 어떤 큰 영화를, 어떤 방식으로 만들라는 말인지. 

ⓒ소동성

힘이 돼준 말도 있었나. 

<우리들>을 좋아해 주신 많은 분의 얘기를 듣다 보면 ‘잘 만든 영화란 무엇인가, 도대체 어떤 의도와 목적을 갖고 영화를 만들어야 하나’ 혼란스러워진다. 과대평가 받았다는 생각도 들었다. 사실 영화라는 건 얼마간은 우연의 산물이 아닌가. 되게 큰 혼란의 시기를 보냈다. 그때 이정향, 이경미, 임순례 감독님이 들려준 이야기가 큰 힘이 됐다. 요지는 "절대로 오래 고민하지 마라. 두 번째 영화를 빨리 만들어라. 그리고 세 번째 영화부터 고민해라"였다. 지금 할 수 있는 것을 해라, 사람은 크게 바뀌지 않는다, 해오던 것과 완전히 다른 것을 할 수는 없으니 그런 고민은 하지 말고 네가 할 수 있는 걸 하라는 뜻이었다. 그 말이 그렇게 힘이 됐다. ‘잘해야 한다’는 생각이 제일 큰 부담이니까. 부딪혀야 배우는 게 있겠다고 생각했다.

 

<우리집>을 본 봉준호 감독도 응원의 편지를 보냈더라.

눈물이 나려 한다. (웃음) 장점을 애써 찾아봐 주신 거 같아서 몸 둘 바를 모르겠다. 동시에 상당히 큰 힘이 된다. 너무 좌절하지 말고 계속 영화를 만들라는 의미 같다. <우리들> 때도 봉준호 감독님과 우연히 마주쳤는데 “윤 감독, 영화 잘 봤어요. (다음 영화) 빨리 만들어요”라고 말씀해주셨다.

 

<우리들> 이후 큰 예산의 상업 영화 프로젝트의 제안도 여럿 받았을 거라 짐작된다.

감사하게도 정말 많은 제안이 있었다. 조건도 좋았다. 하지만 내가 잘 할 수 있을까를 두고 고민했다. <우리들>까지 만들고 보니 책임진다는 것에 관해 생각해보게 됐다. 단편이야 정 안 되면 내가 제작비를 들여 찍을 수도 있겠지만 사실 영화는 스태프들과 함께 만드는 작업이고 그 공동 작업에 내가 감독으로 책임을 지는 거잖나. 그렇다면 나는 어떤 작품, 어떤 현장을 책임질 수 있을까. 내가 감당할 수 있는 작품을 해야겠다는 생각을 다시 한번 했다.

<우리들>
<우리집>

애초에는 <소라>라는 작품을 준비하다 지금의 <우리집>을 먼저 풀어야 한다고 판단해 방향을 선회했다. 

<우리들>이 어떤 상황에 들어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아이들의 이야기다 보니 영화를 끝낸 뒤 피로감이 쌓였다. 상황을 직시하고 행동을 해 보이는, 움직이는 아이들의 이야기를 해보고 싶었다. 그게 <소라>였다. 내 자전적 경험에서 출발한 이야기다. 중학교 2학년 소녀 소라가 가정 폭력에 시달리는 초등학생 아이와 친구가 되고 그 집의 문제를 발견한 뒤 그 아이를 자기 힘으로 구하는 소녀 영웅담이다. 아주 오랫동안 내 안에 있던 이야기다. 특별한 사건이 아닌 일상 속에서 서사를 풀어내고 싶었다. 시나리오를 1년 반 가까이 개발했다. 처음에는 밝고 건강한 인물로 시작했는데 소재 자체가 무겁다 보니 정리가 잘 안 됐다. 가정 폭력을 집중해 들여다보다 보면 결국 어둡고 괴로운 이야기로 흘러갈 수밖에 없었다. 제작진의 반응은 나쁘지 않았지만 내가 과연 이 작품을 연출할 수 있을지 의문이었다. 영화화할 때 내가 과연 어린이 배우들을 만나 이 상황을 설득할 수 있을까. 또 당시에 <미쓰백>(2018)이 후반 작업 중이었는데 스태프들 사이에서 영화가 잘 나왔다는 이야기가 있었다. 짐작했을 때 그 영화의 플롯과 <소라>의 그것이 큰 맥락에서 비슷할 거 같았다. 그렇다면 <소라>에서 조금 다른 방향으로 풀어낼 건 없을까를 생각했다. 가족 문제 가운데 너무 심각하지 않으면서 지극히 보편적인 문제 하지만 누군가에게는 특별할 수 있는 문제에 집중해갔다. 그렇게 <우리집>의 가닥이 잡혔다. 그러니 <소라>에서 완전히 새롭게 방향을 틀어 쓴 건 아니다.

 

<우리들>의 피로감이라고 하면 서사가 전개되는 방식에 관한 부분이겠다.

배우들과 극 중 캐릭터들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더라. 배우들은 연기하면서 그런 힘든 상황을 경험해야 했으니까. 그런데 다행히 어린이 배우들은 연기하면서 재밌고 속이 시원했다고 말하기도 하더라. 편집하면서도 괴로웠다. 영화 안에서 계속 살아 있는 캐릭터로서의 아이들이 계속해 마음을 다치니까. 선(최수인), 지아(설혜인), 보라(이서연)가 안쓰러웠다. 아이들이라고 해서 상처만 주고받는 건 아니다. 아이들은 어른들이 모르는 시간에 어른들이 모르는 곳에서 서로 굉장한 힘을 주고받으며 엄청난 일을 한다. 그걸 담아보고 싶었다. 그와 동시에 아이들이 움직이는 걸 보고 싶었다. <우리들>은 사소한 대사 하나하나가 중요했다. 이번에는 몸을 움직여 나가며 상황으로써 표현이 되는 방식으로 찍고 싶었다.

 

가족의 문제를 떠안은 비슷한 또래의 아이들이 서로의 상황을 공감하며 의기투합한다. 하나(김나연) 캐릭터가 서사의 출발이 됐을 테고, 유미(김시아), 유진(주예림) 자매와의 관계는 어떤 과정을 거쳐 보다 구체화했나.

<소라> 때부터 계속돼온 고민이 있었다. 소라라는 인물은 다른 환경에 있는 아이에게 관심을 기울이고 그 아이를 들여다보고 싶어 하며 심지어 그 아이를 힘든 상황에서 벗어나게 하고 싶어 하는 인물이다. ‘소라는 왜 그럴까. 누구나 타인에게 그런 관심을 두는 건 아닐 텐데 어떻게 다른 사람에게 그토록 감정 이입을 할 수 있을까.’ <소라>를 써 내려갈 때 가장 큰 의문이었다. 그 질문을 풀기 위해 소라의 집을 들여다봐야 했다. ‘어째서 소라는 외부 세계에 관심을 가질까’라고 했을 때 자기 안의 문제를 외부에서 발견하는 거 같았다. 나랑 완전히 다른 세계에 매혹되는 게 아니라 저 아이에게서 나랑 비슷한 지점을 찾았기에 관심이 가는 거다. 어쩌면 소라는 자신의 문제가 너무도 크게 다가와서 상대방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구하고 싶었던 걸지도 모른다. 그러면서 결국 가족이라는 테마로 돌아가게 되더라. 가족이라는 게 한 인간이 태어나 자라는 가장 기초적인 환경이잖나. 나의 개인적 경험일 수 있지만, 부모의 불화는 정도의 차이나 화해 여부에 차이가 있을 뿐 모든 가정에 보편적인 문제다. 가족에게 정서적 결핍을 느끼는 아이가 외부 세계에서 자신과 비슷한 처지의 아이를 보면 좀 더 시선이 가지 않겠나. 그렇게 하나, 유미, 유진의 캐릭터를 찾아갔다. 가족 문제라는 건 아이의 힘으로는 어떻게 할 수 없는 일일 때가 많다. 그런데도 아이는 온전히 자기가 그 문제를 떠안으려 한다. 그런 하나의 마음을 어루만져줄 친구가 있길 바랐다. 하나는 경제적으로 결핍이 있진 않지만, 집에서 정서적 불안을 느끼고, 유미, 유진은 그 반대다. 하지만 본질적으로는 세 아이는 자신이 해결할 수 없는 힘든 가족 문제가 있다는 점에서는 서로 분명히 통할 거 같았다. 그렇게 서로서로 보완해가길 바랐다. 그럼 아이들이 너무 괴롭거나 외롭지는 않은 여름 방학을 보낼 거 같았다.

<우리집>

아이들 가운데서도 특히 소녀들의 세계에 좀 더 많은 흥미를 가진 거 같다. 특히 <우리들>은 소녀들의 세계에서 관계를 만들어가는 방식과 그것이 때론 얼마나 과격하고 폭력적인지를 보여준다. <우리집>은 소녀들의 자매애, 공감과 연대의 감수성을 그려간다. 본인이 하고자 하는 이야기가 소녀의 세계를 통해 좀 더 효과적으로 그려갈 수 있다고 보는 것 같다.

듣고 보니 그런 거 같다. 생각해보면 내가 생각하는 여자아이들의 세계나 나를 포함한 여성들의 세계라는 것이 서로에게 공감하고 연대하는 게 아주 큰 힘이 돼주는 세계다. 그런 힘으로 여성들의 세계가 구성된 면도 크다. 그렇기에 공감이나 연대의 힘을 받지 못했다고 느낄 때 오히려 상처가 훨씬 더 크게 다가온다. 나 역시 그런 세계에 살고 있기에 나도 모르게 그런 걸 드러내고 싶었나 보다.

 

이들 소녀는 돌봄의 능력이 탁월하다. 다른 식으로 말하면 너무 일찍 성숙한 아이들이기도 하고 많은 짐을 떠안은 아이들이기도 하다.

자신이 해결할 수 없는 일임에도 자신의 일이라고 생각하는 아이들이다. 사실 그런 게 없어야 개인으로서는 더 행복하고 자유로운 법이다. 어떤 면에서는 여자아이들이 사회화와 교육 과정에서 사회가 바라는 가치를 답습하게 된 면도 있을 거다. 또 가만히 보면 여전히 한국 사회는 엄마들이 아빠들에 비해 떠안게 되는 짐이 더 많은 거 같다. 소녀들은 그런 엄마를 보고 자라지 않나. 그런 면면에 내가 관심이 많은 거 같다.

 

위기의 가족을 어떻게든 봉합하고 싶은 하나가 할 수 있는 일, 또 어떻게든 하고자 하는 일은 가족들을 식탁에 모이게 해 밥 한 끼를 같이 하는 것이다.

밥이 뭐라고. (웃음) 부모가 싸우면 가장 먼저 밥을 같이 안 먹지 않나. 아이들은 그 상황을 고스란히 맞이해야 한다. 하나가 요리를 계속하는 건 취향이 상당 부분 반영된 결과다. 먹는 거 좋아하고 관심 많은 아이기도 하다. 하나는 요리에, 유미는 만들기에 취미가 있다. 아이들도 다 취향과 개성이 다르니까 그런 게 아이들의 캐릭터가 되길 바랐다. 하나는 흔히 말하는 ‘정상 가족’처럼 자신의 가족을 만들고 싶은데 "엄마. 아빠 화해해"라고 직접적으로 말하지는 못하겠고 최대한 자연스럽게 티 나지 않은 방식으로 가족을 한자리에 모이게 하고 싶었을 거다. 그게 ‘밥 먹자’이고, 실상 그 말은 ‘얼굴 보고 얘기 좀 하자’이다. 밥하는 것 자체가 굉장히 마음을 쓰는 작업이기도 하다.

ⓒ소동성

그간의 작업을 살펴보면서 아이들의 세계를 무대 삼아 일종의 멜로드라마를 쓰고 있다는 생각을 해봤다. 또래 혹은 가족에게 사랑받기를 원하지만, 그 사랑이 뜻대로 되지 않고 좌절하는 경험이 멜로드라마의 전개처럼 보인다. 

그렇게도 볼 수 있겠다. (웃음) <우리집>은 가족을 향한 구애로 볼 수 있다. 돌이켜보면 아이들의 세계를 들여다보길 좋아한다. 영화도 영화지만 어린이 문학의 오랜 팬이다. 취향이기도 하고. 내 안에 해소되지 않는 자전적 이야기가 있는데 그걸 붙잡고 어떻게든 갈무리하고 싶은 마음도 상당히 크다. 어떤 식으로든 내 안의 문제를 받아들이고 이해하고 떠나보내고 싶다. 하지만 영화를 만들었다고 그렇게 되지는 않더라. 현실의 가족은 여전히 여러 문제가 있고 그런 가족을 대하는 나의 태도에 관해서도 많은 생각을 하게 된다. <우리집>을 공개하면서 굉장히 부끄럽고 창피하기도 하다. 극 중 인물에 내가 너무 많이 들어가 있는 거 같아서 내 마음을 들킨 거 같다. 그래서 또한 아이들에게 나의 바람을 담은 면도 있다. 그럼에도 이런 과정이 내게 힘을 주기도 한다. 어쨌든 마음속에 있던 걸 밖으로 끄집어냈고 불특정한 관객들이 그걸 보고 또 뭔가 이야기를 해주니까. 영화를 통해서 관객과 내가 서로 어떤 부분을 건드리고 그게 또 다른 이야기로 이어지는 과정이 위로로 다가온다.

 

아역 배우들과의 작업은 쉽지 않지만, 예기치 못한 즐거움도 있을 것이다.

만약 내가 정해진 대본대로, 정해진 약속을 수행해야 하는 프로덕션을 운영한다면 나 역시 아이들과의 작업이 쉽지 않았을 거다. 내가 다루는 이야기 자체가 그 시기를 지나는 아이들의 마음이 담겨야 하니까. 반쯤은 열어두고 진행한다. 아역 배우들이 내 생각을 실현해주길 원하는 게 아니라 아이들의 이야기를 듣고 싶고 내가 미처 발견하지 못한 걸 아이들이 구체화해줄 거로 생각한다. 오히려 나로서는 믿을 구석이 생기는 거다. 나는 그저 내가 쓴 이야기와 아이들 사이에서 균형을 잡으면 되더라. 그 작업이 어렵지만, 굉장히 재밌다.

<우리집> 촬영장 

아역 배우들과 개별 미팅을 짧게 진행하고 현장에서 즉흥극을 진행하는 방식을 택했다. 캐스팅 때 눈여겨보는 부분이 있다면.

나와 대화가 잘 통하는 친구인가, 혹은 저 아이와 친구가 되고 싶은가가 제일 중요하다. 어린 친구들이라고 해도 대화가 잘 진행되는 경우가 있다. 조금 더 쉬운 말로 표현할 뿐 성인 배우의 대화와 별반 다르지 않다. 반대로 어린이 배우가 내게 질문하는 것도 유심히 듣는다. 서로 주고받는 반응이 중요하다. 꼭 말을 잘 해야 대화가 잘 됐다고 볼 수는 없다. 그 친구가 온몸으로 표현하는 반응이 더 크게 다가온다. 그런 대화의 시간을 갖고 즉흥극을 한다.

 

하나 역의 김나연 배우가 감당해야 할 몫이 크다.

굉장히 솔직한 친구다. 실제로 오빠가 있는 귀엽고 당찬 막내다. 그러면서도 가족을 굉장히 살피는 아이다. 극 중 하나처럼 요리를 굉장히 좋아한다. 나연 배우에게 미안한 게 많다. 현장에서 아무래도 큰 언니다 보니 동생들이 나연 배우를 보며 많이 닮아갔다. 그래서 나연을 붙잡고 “너만 믿는다”고 부담을 준 것도 있었다. 내가 나연의 품성에 많이 의지했다.

 

<미쓰백>으로 데뷔한 김시아 배우나 막내 역의 주예림 배우의 캐스팅 과정은 어땠나.

애초에는 지금보다 좀 더 강한 기운의 유미를 원했다. 시아 배우를 처음 봤을 때 굉장히 순하고 여린 느낌을 받았는데 막상 대화해보니 정말 재밌었다. 실제로 동생이 세 명 있는 집의 맏이다. 동생들을 일일이 챙기고 부모님의 일도 도우며 학교생활도 열심히 하고 배우 활동도 한다. 즉흥극 때 언니 배우들이랑 있을 때는 확실히 동생 역할을 하고 동생들과 함께할 땐 언니가 되더라. 그런 다양한 면을 좀 더 보고 싶었다. 예림의 경우, 캐스팅이 정말 힘들었다. 짐을 짊어지고 있는 언니들 사이에서 관객의 숨통을 터줄 캐릭터가 유진이다. <우리들>의 막내 윤(강민준)처럼 말이다. 동물적 감각이 있는 친구였으면 했다. 예림 친구는 거의 크랭크인 직전에 캐스팅됐는데 자기 존재를 확실히 증명하는 친구였다. 즉흥극 때도 ‘예림아, 여기서 빵을 고르고 있자’라고 하면 다른 누가 뭘 하든 온통 그 일에 집중하더라. 놀라운 면이 있었다.

<우리집> 촬영장

본인은 어떤가.

장녀이고 남동생이 있다. 그래서 누구보다 장녀의 마음을 잘 안다. 아이들, 특히 맏이가 나오는 영화는 내게 그 자체로 내게 트리거다. 그런 인물이 등장하는 영화를 사랑할 수밖에 없다. 심적으로든 실제로든 자기 일이 아님에도 그 일을 떠안고 책임감을 느끼며 살아가는 아이들이 세상에는 아주 많다고 생각한다. 그런 마음을 가진 아이들을 볼 때 오히려 내가 위로를 받곤 한다.

 

<우리집>의 촬영에 앞서 직접 ‘어린이 배우들과 함께하는 성인분들께 드리는 당부의 말씀’이라는 내용의 수칙을 만들어 시나리오 북 맨 앞장에 붙여 스태프들과 공유했다.

반성문이라고 생각해주면 좋겠다. 현장에서 어린이 배우들과 작업하면서 나부터 실수하는 게 많았다. 앞으로도 어린이 배우들과 계속 작업하고 싶다. 그들과 함께한다는 건 내가 그들의 동료이자 보호자의 역할을 동시에 수행해야 한다는 의미다. 나의 인권 감수성이 바뀌지 않으면 안 된다. 앞으로가 더 고민이라 만들게 됐다.

 

<콩나물> 때도 그랬지만 집을 나섰다가 다시 집으로 돌아오는 형식을 이번에도 취했다. ‘우리집’ 문제에 골몰하던 아이들이 ‘우리집’을 떠나 임시적이고 잠정적인 그들만의 ‘우리집’에 머물렀다가 다시 현실의 집으로 돌아온다.

이번에는 너무 멀리 보냈나 싶다. (웃음) 나의 바람이 강력하게 담긴 장면이다. 성취될 수 없는 꿈을 계속해서 꾸는 아이들이 얼마나 답답했을까. 그럼에도 제힘으로는 절대 해결할 수 없는 일이 있다는 현실과 직면해야만 했다. 아픈 진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그런 생각을 하다 보니 지금 있는 공간이 아닌 다른 곳으로 가서 일종의 정서적 환기를 하길 바랐다. 아이들만이 오롯이 있을 수 있는 곳에 도착해서 온전히 현실을 대면하는 거다. 그 순간, 아이들은 서로가 있어서 다행이기도 하다. 세상 끝에 다다른 듯한 마음이 공간적으로 구현됐으면 했다. 더는 물러설 곳이 없을 때 사람들은 새로운 선택을 하고 새로운 생각을 하기도 하니까. 그때 예상하지 못한 화학적 작용이 발생할 거라는 기대도 있다.

 

일정 부분 동화적이고 환상적인 아이들의 모험, 여정을 넣었다. 제작진들 사이에서 이견도 있었을 것이다.

그 선택에는 판타지 요소가 들어가 있다. 사실 팀 내에서도 마지막까지 계속 얘기가 됐던 장면이다. 편집 과정에서 달리 가보기도 했다. 특히 <우리들>을 보신 분들이라면 이런 장면이 작위적이라고 느낄 수도 있을 거 같았다. 그럼에도 일상에서 흔히 만날 수 없지만 어쩌면 일어날 수도 있는 기적의 순간을 아이들에게 마련해주고 싶었다. ‘인생에서 말도 안 되는 일이 일어났다’라고 할 때 바로 그런 날인 거다. 여름방학에 많은 일을 겪는 아이들에게 적어도 그 하루는 기적의 날이길 바랐다.

ⓒ소동성

신년마다 연례행사처럼 오즈 야스지로의 <안녕하세요>(1959)를 챙겨보고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영화를 사랑한다고 말한 걸 기억한다. 

아, 내가 올해 신년에도 <안녕하세요>를 봤던가. (웃음) 오즈의 영화는 교과서와 같다. ‘저런 이야기를 해도 영화가 될까?’ 싶은 아주 평범하고 지극히 일상적인 이야기를 평생 해온 감독이다. 자신의 관심사를 꾸준히 밀고 나가면서 영화라는 장치로 풀어가는 게 내게는 놀라움 그 자체다. 그런 방식에 관심이 많다. 또 지난해 <어느 가족>(2018)을 보면서도 눈물을…‘ 이렇게 좋은 영화가 있는데 내가 영화를 만들어야 할 이유가 있나 싶을 정도로 감동했다.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영화는 인물을 대하는 감독의 시선이 특히 좋다. 극 중에서 아무리 비중이 작은 역할이라도 감독이 함부로 인물에 관해 가치 판단을 하지 않는다. 인물을 그 자체로 바라보게 하는 감독의 시선 덕분에 극 중 인물이 실제 존재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특히 그 시선에는 냉소가 아니라 인간을 향한 존중이 묻어 있다. 그것이 항상 나를 자극한다. 어떻게 하면 그렇게 만들 수 있을까.

 

<소라>는 어떻게 되는 건가. 좀 더 발전시킬 건가. ‘우리’ 시리즈를 한 편 더 만들어볼 계획도 있는 거 같다.

<소라>에 물론 애정이 있지만 그런 유의 이야기는 이미 만들어진 거 같다. <우리들> <우리집>을 개발하다 보니 시리즈로 또 다른 ‘우리’ 이야기를 해보면 어떨까 싶더라. 그냥 인정해야겠다. 나 이런 이야기 되게 좋아하는구나! (웃음) 좀 더 아이들의 이야기를 진솔하게 해보고 싶다. 몇 편 작업하고 끝내는 게 아니라 아주 오랫동안 꾸준히 해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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