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구의 힘
SIWFF 2019 <욕창> 심혜정 & <영하의 바람> 김유리
글 차한비 사진 이영진 / Festival / 2019-08-22

제21회 서울국제여성영화제 한국장편경쟁에 나란히 오른 두 작품의 감독을 만났다. 김유리 감독은 <자위전쟁>(2008) <상실의 기억>(2010) 등 작업 초기부터 여성과 가족을 향해 꾸준히 질문을 던져왔고, 동시에 여러 상업영화에 스태프로 참여하며 경력을 쌓았다. <영하의 바람>은 그의 첫 장편영화로, 제23회 부산국제영화제와 제25회 브졸국제아시아영화제에서 수상하며 연출력을 입증한 작품이다. 심혜정 감독은 미술과 영화라는 분야를 넘나들며 영역을 확장해온 작가이다. 그의 작업은 매번 다른 시도를 한다는 점에서 형식적 실험에 그치지 않는다. 장편 데뷔작인 <욕창>은 감각적인 영상미와 탄탄한 내러티브를 고루 만족시키며, 관객과 평단의 지지를 얻었다.

<영하의 바람>과 <욕창>은 줄거리를 요약하기 어려운 작품이다. 등장인물은 선인인지 악인인지 경계를 구분하기 힘들고, 연출자의 시선은 한 인물이 아니라 인물이 맺는 관계 전반에 가닿는다. 무엇보다 자극적인 말하기 방식에 익숙해진 입장에서, 영화가 다루는 사건을 정리하기란 난감한 일이기도 하다. 인터뷰 중에 두 감독 모두 시놉시스를 작성하며 어려움을 느꼈다고 고백했다. 타자화된 인물을 이야기할 때, ‘막장 드라마’로 소비되지 않도록 설명하기가 쉽지 않았다는 뜻이다. 서울국제여성영화제(8월 29일 개막) 관객에게 전할 인사말을 요청하자, “꼭 극장에서 직접 영화를 봐주시면 좋겠다”는 답변이 돌아왔다. 전형적이지 않은 인물들이 영화 안에서 어떻게 생각하고 움직이는지 함께 지켜봐 주길 바라는 마음이다.

 

 

첫 장편영화로 올해 서울국제여성영화제(이하 SIWFF)를 찾는다. 소감이 어떤가. 이전에도 SIWFF와 인연이 있었는지 궁금하다.

김유리_ SIWFF는 관객으로서도 연출자로서도 처음이다. 대학을 부산에서 나왔고, 현재는 서울과 부산을 오가며 작업하는 중이다. 이번 상영에 기대가 크다.

심혜정_ 두 차례 단편을 상영한 적이 있다. 미술을 전공했는데, 영상과 설치 위주로 작업해왔다. 2009년에 <외출준비>와 2011년에 <노래는 노래한다>라는 실험작품으로 인연을 맺었다. SIWFF는 관객으로서가 아니라 작가로서 참여한 첫 영화제이기도 하다. 갤러리라는 공간에서 작품을 전시하고 상영할 때 늘 아쉬움이 있었다. 아무래도 일반 관객에게는 극장보다 문턱이 높지 않나. 친구들과 우스갯소리로 “우리가 생산자이자 곧 소비자”라고 말하곤 했는데, 영화제에 참가하면서 그 갈증을 해소했다. 극장에서 내 작품을 상영하는 경험도 좋았고, 그해 SIWFF에서 마련한 네트워킹 파티도 기억에 남는다. 다른 작업자와 교류하면서 여러모로 자극을 많이 받았다. 나에게는 각별한 영화제다.

 

심혜정 감독은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해왔다. 영화로만 한정해도 극, 실험, 다큐멘터리까지 작업 폭이 넓다. 장편 극영화 연출은 아티스트로서 또 하나의 도전이었을 텐데.

심혜정_ 제정신이 아니었던 거지. (웃음) 힘들지만 재밌다. 이상하게 들릴 수도 있지만, 힘든 즐거움이 최고의 즐거움이라고 생각한다. 작업할 때 스스로 즐거워지라고 나름 미션을 세워놓는다. 처음엔 극영화 만들기에 도전했고, 두 번째 작품은 아주 수다스러운 영화를 찍어보자고 마음먹었다. 다음에는 이미지와 색깔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작업을 했고, 거기까지 마친 후에 “이제 장편을 만들자” 했다.

 

어떻게 보면 극과 극의 작업을 연속해왔다. 첫 장편인 <욕창>은 등장인물도 많고 내러티브가 큰 힘을 차지하는 작품이다.

심혜정_ 내가 말이 많은 편이다. 시나리오를 쓰다 보면 대사가 엄청나게 길어진다. (웃음) 사실 대학에서 문학을 공부했다. 이후 서른아홉이라는 늦은 나이에 회화 전공으로 대학원에 입학했다. 그림을 좋아해서 들어가긴 했는데, 막상 가보니 잘 그리는 사람이 너무 많더라. 잘 못한다는 생각이 드니까 재미도 없고 부담스럽게 느껴졌다. 그때 실험 작업을 시작했다. 여러 친구와 공동으로 영상과 사운드 작업을 했는데, 훨씬 자유롭고 즐거웠다. 아무리 못 만들어도 예전처럼 괴롭지는 않더라. (웃음) 그 과정에서 내게 내러티브 중심의 영상작업이 잘 맞는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심혜정 ⓒ이영진

<욕창>과 <영하의 바람>은 SIWFF 한국장편경쟁에서 상영되는 단 두 편의 극영화다. 장편 데뷔작이자 가족 드라마라는 공통점을 지니고 있는데,  서로의 작품을 감상하면서 어떤 점이 가장 눈에 들어왔나.

김유리_ 수옥(강애심)이 요리하면서 창식(김종구)과 대화를 나누는 오프닝에서 엄청난 활기를 느꼈다. 특히 강애심 배우의 존재를 이미 아는데도, 화면 속 인물이 그 배우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내가 모르는 전혀 다른 배우인 줄 알았다. 캐릭터들 모두 인상적이어서 어떻게 배우를 캐스팅하고 연출하셨는지 궁금하다. 강애심 배우의 경우, 사투리를 사용하는데 무척 자연스럽더라.

심혜정_ 강애심 배우가 출연하는 연극을 몇 번 봤는데, 이미지와 에너지가 마음에 들었다. 예전에 <연변엄마> 라는 공연을 하셨을 때, 연변 사투리를 사용하신 적이 있기도 하다. 물론 오래전 작품인데다 본래 자기 말투가 아니다 보니 많이 잊어버리셨다고 하더라. 재중동포 한 분에게 부탁해서 대사를 녹음하고 계속 들으며 연습하셨다. 영화에서는 완벽하게 사투리를 구사한다기보다 살짝 표준어와 섞인 말을 사용한다. 처음부터 끝까지 일정하게 사투리를 쓰며 연기해보기도 했는데, 오히려 영화가 딱딱해지더라.

김유리_ 그럼 대사가 다른 버전의 시나리오도 썼던 건가.

심혜정_ 그렇다. 해보니 알겠더라. (웃음) 사투리를 완벽하게 구사할수록, 도리어 캐릭터와 안 어울리고 전체적으로 어색한 느낌이어서 수정했다. 실제로 한국에서 생활하는 재중동포를 만나보면, 사투리 억양을 지우려고 애쓰기 때문에 말투가 섞이더라. 수옥 역시 그렇겠다고 생각했다.

김유리_ 말투뿐만 아니라 캐릭터 자체에 생동감이 있다. 강애심 배우는 이전까지 영화에서 본 적은 거의 없었는데, 캐스팅이 어렵지는 않았나.

심혜정_ 사실 시나리오 단계에서부터 마음속에 점찍어둔 배우였다. (웃음) 연극계에서 유명하지만, 단편영화 작업도 종종 해온 것으로 안다. 개인적으로 다작을 한 배우를 선호하는 스타일은 아니다. 작품이 많으면 그 안에서 쌓인 이미지 역시 많기 때문에 부담스러운 면이 있다. 게다가 독립영화 제작 여건을 고려할 때, 섭외가 쉽지도 않다. 같이 시나리오에 공감해주고 기꺼이 함께해줄 배우를 찾았다. 지수(김도영)의 딸 미라를 연기한 김주아 배우 한 명만 오디션을 통해 만났고, 나머지 배우들은 직접 출연을 제안했다. 사전에 출연작도 보고 공연도 가면서 조사를 많이 했다. 말 그대로 프러포즈였지. (웃음)

 

<영하의 바람> 캐스팅도 궁금하다. 중심인물인 영하와 미진은 영화에서 12세, 15세, 19세로 변화한다. 이 과정을 보여주기 위해 각각 세 명의 배우를 기용했다.

김유리_ 제일 어려운 숙제처럼 느껴졌다. 미진이 같은 경우는 체형도 고려해야 했다. 전체 스태프를 꾸리기 전에 PD와 함께 캐스팅 오디션을 길게 진행했는데, 가장 먼저 19세 역할의 배우를 선택했다. 이후 그들의 이미지에 맞춰서 15세, 12세 순서로 캐스팅을 마무리 지었다. 어린 친구들과 함께 작업해보니 타고난 끼나 뛰어난 공감 능력보다는, 결국 캐릭터에 맞는 감수성을 가진 배우가 자연스럽고 좋은 결과물을 만들어낸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캐스팅에 주력한 만큼 리허설도 많이 했다. 나와 소통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배우들끼리도 친해져야 하는 상황이기에 자주 만났다. 다만 성인 배우를 제외한 나머지 배우들에게는 전체 시나리오를 공개하지 않고, 연기하는 장면의 대본만 주었다. 아이들이 영화 뒷부분에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자신이 연기한 인물이 어떤 상황에 부닥치는지 알게 되는 것이 불필요하다고 생각했다. 12세 영하가 15세 또는 19세 영하를 만나는 상황도 일부러 만들지 않았다. 미래 모습을 보여주지 않는 것이 배우에게도 영화에도 나은 선택이라는 판단이었다. 작년 부산국제영화제 상영할 때, 처음으로 배우들이 다 같이 만났다. (웃음)

<욕창>
<영하의 바람>

리허설은 현장 리허설을 말하는 건가. 리딩 과정도 만만치 않았을 것 같다.

김유리_ 19세 영하와 미진을 연기한 권한솔, 옥수분 배우가 성인이기는 해도 연기 경험이 많지 않은 상태였다. 본격적인 촬영에 들어가기 전, 리허설을 녹화한 다음 그 영상을 모니터링하며 연기를 준비해나갔다. 자신이 화면에 어떻게 보이는지 아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현장에서도 모니터링을 정말 많이 했다. 어딘가 원활하게 진행되지 않으면 테이크마다 끊어서 함께 보고 이야기하는 방식이었다.

심혜정_ 대단하다. 현장에서 그러기가 쉽지 않다.

김유리_ 나 역시 처음 시도해본 방식인데, 어느 순간 그 작업이 좋은 방향으로 흘러간다는 확신이 생기더라. 한편 영하 엄마를 연기한 신동미 배우와 새 아빠 역할의 박종환 배우는 또 다른 고민이 있었다. 아이들은 극의 흐름에 맞춰서 외양에 변화가 생기는데, 두 배우는 그렇지 않은 거다. 영하와 미진이 12세에서 15세로, 15세에서 19세로 넘어갈 때, 사이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 세세하게 보여주지 않고 ‘점프’하듯 장면이 바뀐다. 신동미, 박종환 배우 또한 말로 상황을 설명하기보다는, 관객이 자연스럽게 유추할 수 있도록 표정과 분위기로 감정을 드러내기를 바랐다. 두 분이 정말 고생 많으셨다. 박종환 배우는 어떻게 하면 더 나이 들어 보일지 고민하면서, 일부러 머리를 엉망으로 자르기도 했다.

심혜정_ 말씀하신 것처럼 작품이 설명적이지 않고, 처음부터 끝까지 묘한 긴장감을 유지한다. 연출에는 어디까지 보여줄 것인가 하는 경계선이 있지 않나. 그 선을 넘어가면 보기 싫은 설정처럼 되어버리고, 너무 드러나지 않으면 주인공의 심리를 파악할 수 없게 된다. 감정이 쌓이는 대신 느닷없이 튀어나온 것처럼 보이니까. <영하의 바람>은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고 끝까지 집중력 있게 이야기를 진행한다. 특히 어떤 커다란 사건이 아니라, 일상적인 순간을 모아서 긴장감을 만들어내는 방식에 놀랐다.

 

<욕창> 또한 비슷한 강점을 지녔다. 잔잔해 보이지만 들여다보면 인물마다 입장이 첨예하게 엇갈리면서 점차 갈등이 확장된다. 극이 진행될수록 인물과 사건에 관해 옳고 그름이라는 판단을 내리기 어렵다는 것도 공통점이다. 결국 두 영화 모두 어떤 질문에 답을 구하는 과정처럼 느껴지더라.

심혜정_ 실제로 어머니가 길순(전국향)처럼 오랫동안 투병생활을 하셨다. 10년이 넘는 시간 동안 딸 입장에서 모든 과정을 지켜보면서, 노인 문제에 자연스럽게 관심이 생기더라. 흔히 노인이라고 하면, 욕망이 없거나 욕망마저 늙었다고 생각하지 않나. 하지만 내가 관찰하고 겪은 바로는 그렇지 않았다. 오히려 인간은 정말 죽을 때까지 욕망하고, 어떻게든 살기 위해 노력한다는 생각이 들더라. 심지어는 젊은 누구보다 노인의 욕망이 훨씬 강력하고 절박할 수도 있겠다 싶었다. 노인은 영화에서 대부분 주변적인 존재로 묘사된다. 중심 화자로서 노인이 전면에 등장하는 영화가 거의 없다. 해볼 만한 이야기라고 생각했고, 꼭 하고 싶은 이야기이기도 했다.

김유리_ 어머니 간병인도 실제 재중동포였나?

심혜정_ 맞다. 이야기는 완전히 허구인데, 그때 경험이 캐릭터 구성에 도움을 주었다. 집안 분위기나 가족 구성원 각자의 고충, 상황이 불러일으키는 감정을 충분히 알고 느꼈기 때문에 좀 더 캐릭터에 밀착할 수 있었다.

김유리_ 리얼한 장면들이 많다. 예컨대 수옥이 길순의 욕창을 치료해줄 때, 후후 불어주는 디테일에서 현실감을 느꼈다. 수옥은 정말 길순에게 최선을 다하지 않나.

심혜정_ 최선을 다하는 사람을 좋아한다. (웃음) 영화에 나오는 인물 모두 열심히 산다.

김유리_ 맞다. 다들 최선을 다하는데 갈등이 자꾸 불거지는 거다. (웃음) 나 역시 가정이라는 집단에 주목하면서 그런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집은 태어나서 처음으로 어떤 갈등이나 오해, 부조리한 상황을 겪는 곳 아닐까. 가정폭력이나 아동학대 관련해서 최근 많은 이야기가 나오는데, 언론에서는 종종 끔찍한 사건 정도로만 소개한다. 뉴스나 기사를 접할 때마다 막막한 기분이었다. 도대체 어쩌다가 이런 일이 가정에서 일어났을까 싶더라. 사실 하루아침에 벌어진 일이 아니지 않나. 어른이 아이에게 행하는 폭력, 가정 내 폭력은 쉽게 묵인되거나 은폐되는 경향이 있다. 결국 표면적으로 드러나는 부당한 행위 이전에, 누군가가 한 일이 아니라 하지 않은 일이 점진적으로 쌓이면서 여기까지 온 것은 아닐까? 라는 질문이 생겼다. 바로 그 하지 않은 일이 무엇일지 고민하다가 <영하의 바람>이라는 이야기가 나왔다. 시기마다 화두로 놓는 주제나 감수성이 달라지는데, 한 번 시간이 지나면 예전으로 되돌아가기는 어려운 것 같다. 지금의 내가 제일 잘할 수 있고 또 하고 싶은 이야기여서, 꼭 첫 영화로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했다. 더 나이 들면 어색하고 거짓처럼 보일 것 같더라.

김유리 ⓒ이영진

가족이라는 사적 관계를 바탕으로 사회를 해석하는 시각이 돋보인다. <욕창>은 이주민과 불법체류자 문제를, <영하의 바람>은 친족 성폭력을 다룬다. 두 작품 모두 서사가 중요한 위치를 점하는 동시에, 줄거리를 요약하기 어려운 영화이기도 하다. 시나리오 작업에서 가장 집중했던 지점은 무엇인가.

김유리_ 허구의 이야기가 가지는 힘에 집중했다. 허구이기 때문에 가능한 범위 내에서 최대한 이야기를 풀어내려고 노력했다. 서사 자체는 픽션이지만, 나 또한 가족의 일원으로서 살아오며 느낀 답답함이 오랫동안 화두로 남아 있었다. 태어나고 싶어서 태어난 것도 아니고, 성별이나 외모를 선택할 수도 없지 않나. 태어난 순간 정해진 모든 것을 받아들여야 하는데, 마치 이 가정이라는 공간의 입구조차 못 보고 들어온 기분이었다. 자연스레 그럼 출구는 있을까 싶더라. 사람마다 경중은 다르겠지만, 각자 그 출구를 찾으며 관통해온 성장기가 있으리라 생각한다.

심혜정_ <영하의 바람> 또한 전통적인 내러티브 영화임에도, 선악 구도가 아니라 인물 중심으로 풀어갔다는 점이 <욕창>과 비슷한 것 같다. 내 경우 시나리오 초반에는 인물마다 이야기가 더 많이 붙어 있었다. 이야기의 집중력과 러닝타임을 고려하여, 창식(김종구) 중심으로 정리한 것이 현재 버전이다. 시나리오 작업할 때마다 주변에서 왜 이렇게 대사가 많으냐며 놀란다. (웃음) 쓸 때는 쭉 써 내려간 다음, 불필요한 이야기를 걷어내는 편이다.

김유리_ 대사가 되게 찰지다. 인물이 나누는 대화에 집중하게 되더라. 나는 대사를 잘 못 써서 그런 능력이 부럽다.

심혜정_ 많이 압축했다고 해도, 여전히 많기는 하더라. (웃음) 컷을 잘게 나누지 않고 긴 호흡으로 찍은 다음 편집하는 스타일인데, 다행히 배우들도 무대 경험이 많은 편이라 잘 맞았다. 컷을 쪼개는 것이 효율적이기는 하지만, 배우 입장에서 연기에 몰입하기 좋은 방식은 아니니까.

 

영화에는 가족 내 여성의 역할과 여성의 노동이라는 주제도 자연스럽게 드러난다. <욕창>에 등장하는 주요 인물은 제각기 돌봄노동을 수행한다. 끊임없이 누군가를 보살피고, 집안을 가꾸고, 음식을 해먹이고, 타인의 기분을 맞춘다. <영하의 바람>은 자본 없는 여성이 어떤 일자리를 택하는지 보여주는데, 이 과정에서 여성 캐릭터가 지닌 모순적인 면모와 남성 캐릭터의 무능함이 동시에 드러난다.

심혜정_ 나 또한 줄곧 돌봄노동을 해왔기에, 어느 시점부터 자연스럽게 문제의식을 느꼈던 것 같다. 오랜 시간 여성의 가사노동은 화폐 가치가 없는 하찮은 일로 취급되었고, 돌봄노동 역시 그 연장에 있다. 아이를 키우고 부모님을 병간호하면서 여러 생각이 들더라. 돌봄노동이란 결국 기계적으로 하는 일이 아니라, 감정을 투입하는 일이자 고강도의 육체노동까지 동반한다. 특히 환자를 간호하는 일은 타인의 생명을 좌지우지하는 위치에 있다는 점에서 노동 강도가 굉장히 높다. 그런데 이 일이 가족 문제가 되면, 여성에게서 여성으로 노동이 대물림되는 분위기가 만들어지더라. 결국 태어날 때부터 죽을 때까지 돌봄에서 자유로울 수 있을까 싶다. 여성인 내가 돌봄을 받지 않거나 누군가를 돌보지 않으며 보낼 수 있는 시간은 길어야 채 10년도 되지 않는다. 상대적으로 남자는 그 일에서 너무 쉽게 빠져나가는데, 가사노동 역시 임금노동 못지않게 중요한 노동이라는 인식이 높아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김유리_ 가정에서 경제력은 굉장히 중요한 힘이다. 그 주도권을 누가 잡느냐에 따라서 문제를 문제 아닌 것으로 만들어버릴 수도 있다. 가정폭력이 폭력으로 드러나지 않고 묵인된 배경에는, 가해자의 경제적 위치와 힘이 작용한다고 생각한다. 사실 영화를 만들 때는 여성의 모습을 두드러지게 보여주는 것이 목표는 아니었다. 최종적으로 아이들의 모습이 관객의 마음에 남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기에, 아이들 입장에서 시나리오를 쓰고 봐왔다. 그런데 영화가 공개된 후에 예상보다 여성에 집중하는 반응이 많더라. 내 안에 두 가지 정체성이 강하게 자리 잡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유년기를 거쳐 오며 고민해왔던 부분과 여성으로서의 정체성이 같이 읽히는 것 같다. 예를 들면 은숙이라는 인물은 성별을 떠나서 캐릭터 자체가 흥미롭다고 생각했다. 일반적으로는 왜 저런 행동을 할까 싶겠지만, 은숙은 어떤 난관에 대처하는 자기만의 방식이 있고 스스로를 굉장히 야무지고 똑똑한 사람으로 여긴다. 근데 어떤 관객은 “같은 엄마이지만 이해할 수 없다”고 하시더라. (웃음) 은숙은 결국 딸인 영하를 두고 집을 나가는데, 나는 영하에게 은숙의 부재가 나쁜 일만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다만 영하가 은숙의 말처럼 ‘세상은 혼자 견뎌내는’ 거라고 생각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엔딩을 고민했다.

<욕창>
<영하의 바람>

개인적으로 두 감독을 한자리에서 만나고 싶었던 결정적인 이유는 엔딩 때문이다. 두 작품 모두 인물의 숨소리로 끝이 난다. 의미하는 바는 각기 다르지만, 모든 사운드가 제거된 채 화면 가득히 숨소리만 절박하게 이어지는 결말이 인상적이다.

심혜정_ 나도 엔딩을 보고 놀랐다. 희한한 인연이네 싶더라. (웃음) 동시에 <욕창>보다 훨씬 확장된 가능성을 말하는 결말이라고 생각했다. 이거 전부 말하면 스포일러가 될 것 같은데. (웃음) 교회가 보이는 가파른 언덕에서 영하와 미진이 재회하지 않나. 결국 희망이라는 것은 저렇게 높고 먼 곳에 있는 종교적인 무엇이 아니라, 뒤돌아보면 그 자리에 있는 존재라는 생각이 들더라. 꼭 특정한 누구라기보다는, 내가 그동안 돌아보지 않아서 몰랐던 사람 말이다.

김유리_ 맞다. 영화가 보여주는 순간에는 영하에게 미진이가 그런 존재로 등장하는데, 시간이 지난 다음에는 다른 사람이 될 수도 있다고 생각하며 엔딩을 구상했다. 결국 관계란 가변적이지 않나. 영원하고 절대적인 것은 없다고 말하면 절망스럽지만, 한편으로는 시기마다 내 곁에 머무는 사람이 달라질지언정 늘 누군가와 함께한다는 점에서 위안을 얻기도 한다. 나 역시 지금껏 여러 사람을 의지하며 위기를 넘겨왔고, 때로는 내가 누군가에게 힘을 주는 존재이기도 했다. 깃털이라는 미진의 별명에도 그런 마음을 담았다. 두 사람에게 세상은 무척이나 무거운데, 가끔은 깃털처럼 가벼워지면 좋겠다는 바람이었다. 실은 되게 어이없게 지은 별명이다. 아는 사람이 자기 친구를 깃털이라고 부른다는 거다. 덩치는 거구인데 당구만큼은 깃털처럼 친다면서. (웃음) 소리 내어 불러보니 포근한 느낌이 들더라. 영하에게도 별명을 지어주고 싶었는데, 끝까지 생각이 안 나서 어쩔 수 없었다. 한편 엔딩에서 숨소리만큼이나 중요했던 것이 입김이었다. 미진이가 내뿜는 숨을 통해 상징적인 의미를 전달할 수 있겠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현장에선 촬영하지 못했다. 한겨울이었는데 너무 춥다 보니 배우들도 몸이 식어서 입김이 안 나오는 거다. 열악한 환경에 마냥 대기시킬 수도 없었기에, 결국 후반 작업 때 CG의 도움을 얻어 완성했다. 심 감독님도 엔딩을 많이 고민했을 것 같은데 어땠나.

심혜정_ 실은 마지막에 에필로그처럼 붙은 장면이 하나 더 있었다. 계절이 바뀐 다음을 보여주는 신인데, 사족처럼 느껴져서 편집 과정에서 들어냈다. 사실 작업 중반까지는 전혀 다른 엔딩을 구상하기도 했다. 창식이 택시를 타고 어디론가 가는데, 목적지에 도착하면 기사에게 여기가 아니라며 다른 곳에 가자고 한다. 그걸 계속 반복하면서 밤이 오고, 결국 기사는 창식을 경찰서에 데려가서 “이 사람 치매인 것 같다”고 한다. 방향을 잃고 떠도는 노인 세대를 보여주는 엔딩이라고 생각했는데, 고민을 거듭할수록 움직임보다 교착 상태를 보여주는 엔딩이 적절하겠다는 판단이 들었다. 결국 ‘욕창’이 의미하는 본질이기도 하다. 이리로도 저리로도 가지 못한 채, 벗어나기 힘든 상황에 놓인 인물로 마무리하는 것이 적절할 듯했다.

심혜정 ⓒ이영진

계절적 배경 또한 두 작품의 공통점이다. 겨울을 선택한 특별한 이유가 있나.

심혜정_ 2018년 2-3월에 걸쳐 촬영했다. 처음부터 계절이 바뀌는 시기를 담으려고 했다. 욕창과 연결해서 이미지를 떠올리면 여름이 가장 어울리지 않을까 싶었는데, 넓게 생이라는 관점에서 보니 겨울과 봄 사이가 좋겠더라. 고요하고 정지된 것처럼 보이는 겨울에서 다시 뭔가가 새롭게 시작되는 봄으로 넘어가는 시기가 작품의 주제 의식과도 연결된다고 생각했다. 배우들 역시 그때 가장 편하게 촬영할 수 있는 스케줄이기도 했다. (웃음)

김유리_ 애초 계절을 정하지 않았고, 주인공 이름도 영하가 아니었다. 작업에 어려움을 느끼던 차에, 우연히 기형도가 쓴 소설 「영하의 바람」을 다시 읽었다. 이야기 자체는 영화와 전혀 다르지만, 이 소설에도 두 아이가 등장한다. 제목은 말 그대로 찬바람을 의미하는데, 왠지 모르게 영하라는 단어가 눈에 들어왔다. 주인공 이름을 영하로 짓고, 중의적으로 표현하면 좋을 것 같았다. 그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겨울이라는 계절을 선택했다.

 

영화제 이후 개봉을 계획하리라 짐작한다. 배급사나 개봉 시기 등 대략적으로라도 정해진 부분이 있나.

심혜정_ 영화제를 마친 후, 본격적으로 배급사를 찾으려고 한다. 내년쯤 극장에서 관객과 만날 수 있다면 좋겠다.

김유리_ 영화진흥위원회 개봉지원 심사에 접수해둔 상황이다. 개봉 시기는 아마도 11월 초가 될 것 같다.

 

차기작 준비도 병행하는 중인가.

심혜정_ 여러 편의 시나리오를 왔다 갔다 하며 쓰고 있다. 무엇이 먼저 디벨롭 될지는 모르겠는데, 아마 다음 작품 또한 장편영화가 되지 않을까 싶다. 최근 하성란 작가의 단편소설 「곰팡이꽃」의 판권을 계약하고, 열심히 시나리오를 쓰는 중이다. 영화를 통해 만난 동료들과 아이템을 공유하고 서로 부추기면서 작업을 이어나가고 있다. (웃음) 차기작에서는 좀 더 현실적인 제작 여건을 만들어야겠다는 생각도 든다. <욕창>을 촬영하면서 스태프나 배우에게 미안해지는 순간이 많았다. 마음이 되게 고되더라. 한 번은 몰라도 더는 이런 식으로 영화를 만들 수는 없을 것 같다.

김유리_ 비슷한 고민을 한다. 어쨌든 첫 작품으로 이 이야기를 꼭 해야 한다고 생각했고, 예산 규모는 작지만 원하는 방향대로 완성할 수 있는 환경이었기에 다행스럽게 생각한다. 앞으로도 현재를 반영하는 작업을 지속하고 싶다. 지금 내 안에 가장 크게 자리 잡은 주제, 지금 내가 가장 잘 표현할 수 있는 감수성을 잘 살려내는 것이 목표이다. 시나리오는 계속 쓴다. 늘 하는 일이다. (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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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1-29
Festival
나도 내가 궁금해
SIFF 2024 <3학년 2학기> 유이하
글 차한비 사진 이영진
2024-11-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