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일요일 오후, 아홉 명의 배우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더위와 습기로 우중충한 날씨였지만, 스튜디오에는 활기가 넘쳤다. 한쪽에서는 조명을 설치하고, 다른 한쪽에서는 의상을 갈아입었다. 누군가는 카메라 앞에 서서 포즈를 취했고, 다른 누군가는 인터뷰어와 마주 앉아 이야기를 나누었다. 분주하게 실내를 돌아다니다가 어느 모퉁이에서 마주치면, 서로 다정한 눈짓과 씩씩한 웃음을 주고받았다. <리버스>는 지난 일 년 동안 만나왔고, 앞으로 계속 만나고 싶은 배우들을 떠올리며 초대장을 발송했다. 강진아, 공민정, 김시은, 김예은, 이재인, 이태경, 임선우, 정하담, 한해인 배우가 흔쾌히 여름 나들이에 응해주었다. 이제 막 작품 활동을 시작한 새로운 얼굴부터 연기의 여러 가지 맛을 알아가는 중인 고민 깊은 얼굴까지, 각양각색의 매력을 지닌 아홉 명의 배우들을 한 가지 단어로 수식하기는 어렵다. 젊고, 재능 넘치는, 여성 배우라는 공통된 설명 역시 막연하다. 이번에 그들을 만나며 느낀 교집합은, 아홉 명 모두 각자의 자리에서 열심히 오늘을 살아내는 사람들이라는 점이다. 이들은 평범한 일상과 특별한 꿈을 엮어 매일매일 자신만의 길을 만든다. 지금 이 순간, 연기와 삶을 향해 누구보다 용기 내어 걸어가는 아홉 명의 배우들을 소개한다.
글 손시내 차한비 사진 소동성 김혜미 의상 HALEINESHOP, NAIN 메이크업 이유정
“아직 걸음마도 못 뗐어요”
<어른도감> <사바하> 이재인
크고 맑은 눈에 굳게 다문 입술. 짧은 대화 속에서도 천진함과 진지함을 오가는 이재인의 얼굴은, 눈과 입의 미세한 변화에 따라 캐릭터에 다양한 감정을 입혀낸다. <어른도감>(김인선, 2017)의 경언과 <장례난민>(한가람, 2017)의 다빈, <사바하>(장재현, 2019)의 금화와 드라마 <아름다운 세상>(JTBC, 2019)의 동희에 이르기까지. 이들은 무책임하고 위험한 세상에서 자기 자신을 지키고 타인을 염려하는 굳센 아이면서, 각자만의 결을 가진 유일무이한 인물이다.
“처음에는 그들의 강함에 끌렸던 것 같아요. 강인하고 자기감정을 숨기는 캐릭터가 많았죠. 대사 없이 눈빛만으로도 캐릭터가 가진 생각을 전달하고 그게 어떻게 숨겨지는지 표현하는 방법을 많이 연습했어요. 모두에게 깊은 애정이 있어요. 또 연기하면서 그들에게 배우는 무언가도 있었고요.” 거짓말을 못 해 본심이 다 드러난다는 눈이 연기할 땐 좋은 장점이다. “제가 사실 표정을 잘 못 숨기고 눈빛에서 다 드러나는 편이에요. 그런데 그게 캐릭터의 감정을 온전히 전달할 수 있는 매개체가 되는 것 같아서, 좋은 버릇이라고 생각해요.”
이재인은 어린이 프로그램에 출연한 것을 계기로 자연스럽게 영화와 드라마 오디션 현장을 오가기 시작했다. “처음 시작할 때는 그냥 재미있었던 것 같아요. 처음 가보는 세트장도, 같이 나오는 친구들과 노는 것도, 카메라 앞에서 말하는 것도 재밌었어요,” 어렸을 땐 뽀로로를 좋아해 비행기 조종사가 되고 싶었고, 연기는 버릇처럼 익숙해진 일이다. 지금까지처럼 앞으로도 계속 연기를 해나갈 것이라는 당연한 마음이 그 자체로 이재인의 힘이다. 그래도 여전히 시작하는 마음이라고. “책임감을 가져야 하는 큰 역할들을 하다 보니까 아직 걸음마도 안 뗀 단계라는 게 느껴지더라고요. 더 많이 배우고 발전해나가야겠다고 생각해요.”
이재인은 부족한 부분을 메꾸어나가기 위해 자신이 출연했던 작품들을 자주 챙겨본다. 그중 가장 많이 본 작품은 <어른도감>. 처음 맡아본 큰 역할의 설렘이 아직도 남아있단다. 또 애정이 있는 캐릭터 소개를 부탁하자 <무서운 이야기 3>(김곡, 김선, 백승빈, 2016)의 ‘둔코’와 <서바이벌 가이드>(정철민, 2017)의 ‘소녀’를 꼽는다. 그중에서도 둔코는 “중성의 로봇”. “둔코는 무표정이나 로봇 같은 행동에서도 감정이 느껴지는 캐릭터에요. 연구도 많이 했고 김곡 감독님하고 캐릭터를 만드는 과정이 길었어요. 지금 보면 조금 부끄럽기도 하지만. (웃음)”
어린이 프로그램에 출연해 'Over the rainbow'를 불렀던 때가 7살, 지금은 어느새 중학교 3학년이다. 시험이 끝나고 짧은 방학을 맞아 책도 많이 읽고, 스스로 쓰고 연출할 영화에 대해서도 고민 중이다. 배우가 연기하는 세계의 바탕을 직접 만드는 작업이 궁금해 영화 연출에 관심을 갖게 됐고, 학교에서 영화 제작 동아리를 만들기도 했다. 세상을 향한 끝없는 호기심은 대체 어디서 나오는 걸까. 에너지가 대단하다고 하자, 짧지만 단단한 대답이 돌아온다. “뭐, 다행이죠. (웃음)” 처음 해보는 것도, 하고 싶은 것도 많은 이재인. 어떤 역할이 주어지든, 그 인물 안에 자신만의 색을 섞어넣을 수 있는 배우가 되고 싶다. “어떤 성분을 넣느냐에 따라 색깔이 바뀔 수 있는 지시약처럼, 어떤 역할을 만나든 그런 연기를 하고 싶어요.”
글 손시내
“캐릭터는 대상이 아니다”
<스틸 플라워> <항거:유관순 이야기> 정하담
정하담은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났다. 새로운 배우의 탄생이라고 부를 법했다. 연기경력이라고는 고등학교 연극반 활동이 전부였던 때, 경험이라도 쌓기 위해 찾아간 오디션에서 합격하고 박석영 감독을 만났다. 기적과도 같은 인연으로 만난 두 사람은 이후 <들꽃>(2015), <스틸 플라워>(2016), <재꽃>(2017)까지 ‘꽃 3부작’을 함께 만들었다. 정하담은 <스틸 플라워>로 제36회 한국영화평론가협회상 신인여우상과 제4회 들꽃영화상 여우주연상을 수상하며, 영화계에 당당히 자리매김했다.
정하담을 이야기할 때, 자주 회자되는 에피소드 중 하나는 그의 첫 오디션이다. 대본에 나온 대로 스태프의 뺨을 때려보라는 감독의 주문에, 정하담은 ‘사람을 때려본 적이 없다’며 눈물을 보였다. <들꽃>에서는 가출 청소년 역할을 맡자 촬영 전에 노숙 생활을 감행했고, <스틸 플라워> 때는 극중 인물인 ‘하담’의 캐리어에 직접 물건을 챙기고 돌아다녔다. <재꽃> 역시 촬영 장소인 충남 당진으로 먼저 내려가, 한 달 동안 시골살이를 하며 캐릭터를 만들어 나갔다. 연기에 대한 열정과 더불어, 배우로서의 고집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진부한 표현이기는 하지만, 정하담에게 ‘진심’은 늘 중요해 보인다. 스스로 납득하지 못하면, 대사를 읽거나 지문대로 움직일 수 없는 것이다. 정하담은 ‘나다움’의 요소로 조심스러움을 꼽는다. “아주 어릴 적부터 그랬어요. 다른 사람을 대할 때 조심스러워 하죠. 뭔가를 말하고 난 다음, 혼자서 집 가는 길에 괜히 자책하기도 하고요.” 정하담에게 캐릭터는 단순히 연기해야 할 대상이 아니라, 존중받아야 할 타인이다. 정하담은 인물에 다가가기 위해 정직하게 노력한다. 가출 청소년, 무당, 부잣집 철부지 등 그가 소화해낸 다양한 캐릭터에 언제나 그만이 지닌 독특한 개성이 묻어나는 이유다.
올 초 개봉한 <항거:유관순 이야기>(조민호, 2019)에서는 유관순 열사와 같은 옥사에 수감된 ‘이옥이’를 연기했다. 실존 인물은 아니지만, 역사에 기록되지 못한 수많은 독립운동가 중 한 명이라고 느껴질 만큼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얼마 전에는 신수원 감독의 <젊은이의 양지> 촬영을 마쳤다. 사회에 진입하기 위해 애쓰지만, 적응도 정착도 어려워서 난관을 겪는 취업준비생 역할을 맡았다. “잘 살고 싶은데 뜻처럼 되지 않을 때, 누구나 우울해지잖아요. 나한테 문제가 있는 건 아닐까, 하면서 자신에게 화살을 돌리기도 하고요. 저 역시 비슷한 젊음을 통과하는 입장에서 공감이 됐어요.”
어느덧 6년째 배우의 길을 걷는 정하담에게 데뷔 당시와 비교해서 달라진 점을 묻자, 그는 이제야 조금씩 익숙해지는 기분이라며 웃는다. “데뷔 당시에는 겁나고 불안했어요. 한편으로는 꿈같기도 했고요. 지금은 배우라는 직업을 이해해나가는 중이라고 해야 할까요, 모든 일이 두렵고 막연하게 느껴지기보다는 좀 더 구체적인 고민을 하게 돼요.” 정하담은 두 가지 커다란 고민을 털어놨다. 하나는 ‘어떻게 하면 연기를 즐겁게 할 수 있을지’이고, 또 하나는 그렇게 연기하면서 ‘계속 나 자신을 좋아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인지’다. 쉽게 끝날 리 없는 고민이지만, 정하담은 진중하되 움츠러들지 않는다.
“우선은 연기 외에도 재밌게 할 수 있는 일을 찾아내려고 해요. 최근에는 다양한 분야의 강의를 신청해서 듣고 있어요. 일주일에 하루 나가서 공부하는데 나름 루틴이 되어서 좋더라고요. 뭔가를 배우는 느낌도 좋지만,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고 그런 시간을 가져본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만족감이 있어요.” 정하담은 가보지 못한 곳으로 떠나고, 말해본 적 없는 언어를 구사해볼 계획이다. 평소 하고 싶던 일을 잘 기억해두었다가 틈틈이 실천해보려고 한다. 문득 어두운 밤 골목에서 탭댄스를 추던 <스틸 플라워>의 하담이 떠오른다. 누구와도 다른 리듬으로 춤추며, 정하담은 앞으로도 자신만의 성장기를 써내려갈 것이다.
글 차한비
“연기? 일기 쓰듯이, 산책 하듯이”
<당신자신과 당신의 것> <내가 필요하면 전화해> 공민정
공민정은 사랑스럽다. 까칠한 선배, 철없는 딸, 히스테릭한 애인, 막무가내인 친구를 연기하면서도, 결국엔 미소 짓게 만든다. 희고 깨끗한 얼굴에 꾸밈없는 웃음소리까지 더해지면, 마주보는 이도 저절로 입꼬리가 올라간다. 7월에 개봉한 옴니버스 영화 <한낮의 피크닉>에서는 세 번째 에피소드 <내가 필요하면 전화해>(임오정, 2019)의 주연 ‘영신’을 맡아 열연했다. 오랜만에 고향친구를 찾아간 영신은 그 등장만큼이나 뜬금없이 고민을 풀어놓는다. 남편과 싸운 후 이혼을 선언하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서 그에 동조한 친구를 타박한다. 충동적이고 이기적인 면이 있는 인물이지만, 어쩐지 눈살이 찌푸려지지는 않는다.
자연스러우면서도 설득력 있는 연기를 위해서는, 주어진 시간 내에 인물이 지닌 이야기를 최대한 겹겹이 쌓아야 한다. 스크린 속 공민정이 무슨 짓을 해도 밉지 않아 보이는 이유는, 타고난 매력에 그와 같은 영리한 노력을 더한 덕분이다. “오히려 코믹하고 밝은 캐릭터일수록 생각을 많이 하고 들어가요. 전체적인 호흡이 빠른 와중에, 장면마다 연결되는 리듬감이 있잖아요. 그런 부분에 잘 감응해서 강약을 조절해야 하죠. 아무리 얄미운 캐릭터라고 해도, 무조건적으로 미워 보이면 안 된다고 생각해요. 어떻게 하면 좀 더 접점을 만들어서 사랑스러워 보일 수 있을까, 하고 고민해요.”
<당신자신과 당신의 것>(홍상수, 2016)에서는 안대를 쓴 채 술을 마셨고, 드라마 <아는 와이프>(tvN, 2018)에서는 제대로 된 적금 하나 없는 은행 직원으로 등장했다. 공민정의 연기를 평가하는 사람들은 종종 ‘생활’이나 ‘감초’라는 수식어를 붙인다. 물론 연기력을 칭찬하는 표현이지만, 배우로서는 다소 답답하게 느껴질 법도 하다. 연기 폭을 과소평가 받는 느낌이 들지는 않는지 묻자, 공민정은 손사래를 친다. “일단 그런 평가에 의문을 가질 만큼, 뭘 많이 하지 않았어요. (웃음) 아직도 ‘시작은 했나?’ 같은 느낌이랄까요. 게다가 표면적으로는 단순해 보이는 역할이라고 해도, 각 캐릭터마다 온도가 다르잖아요. 시나리오에서 표현된 이미지를 바탕으로, 인물이 지닌 모습을 풍성하게 보여주려고 노력하는 편이에요.”
매 작품마다 능청스런 ‘생활연기’로 호평 받는 공민정의 ‘연기생활’이 궁금해진다. 하루를 어떻게 시작하는지 물었더니, 쑥스러워 하면서도 차분히 이야기를 들려준다. “일어나면 커피를 내리고 간단히 빵으로 식사를 대신해요. 그 후엔 가볍게 동네를 산책하며 오전을 보내고요. 때로는 지난밤 미처 쓰지 못한 일기를 아침에 쓰기도 해요. (웃음)” 일기는 공민정의 오래된 습관 중 하나이다. 처음엔 매일 쓴다는 행위 자체가 버거웠지만, 몇 년이 지난 지금은 익숙해졌다. “거창한 마음으로 시작하지는 않았지만, 일부러 기록해두는 부분도 있어요. 시간이 지날수록 삶을 살아가는 방식이 연기와 밀접하게 연결된다는 생각이 들거든요. 가치관이나 사람을 대하는 태도가 자연스레 영향을 주니까요.”
쉬는 날에는 종종 집 근처 도서관과 문화원을 찾는다. 도자기를 배우고, 사군자를 그린다. 일상을 구성하는 크고 작은 습관에는, 생활을 지탱해나가기 위한 노력이 묻어난다. “지켜보는 사람들은 ‘너 되게 열심히 산다’고 말하기도 해요. 근데 프로덕션 과정에 있지 않을 때는, 딱히 뭔가를 하는 느낌은 아니거든요. 어떻게 보면 배우라는 직업이 우울해지기 쉬운 것 같아요. 아무것도 안 하는 시간을 잘 쓰지 않으면, 중심을 금방 잃어버려요.” 공민정에게 연기는 “끊임없이 나 자신을 들여다보는 일”이다. 때로는 지겹고 괴롭지만, “기본적으로 재밌는” 일이기에 연기하는 생활을 건강하게 챙겨나가고 싶다. 공민정은 좋은 배우가 되기 위해, 괜찮은 인간이 되려고 노력한다. 덕분에 우리는 그의 연기를 보며 의심 없이 웃을 수 있다.
글 차한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