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령처럼 살던 여자가 진짜 유령이 된다. 타인과의 접촉을 거부하며, 마음의 문을 닫고 사는 주인공 혜정(한해인)은 자신의 죽음을 야기한 살인사건을 추적한다. 관객은 유령이 된 주인공을 뒤쫓으면서 미스터리의 전모뿐만 아니라 도시에서 홀로 살아가는 자들의 외로움과 비뚤어진 욕망을 보게 된다. 지난해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에서 관객상을 차지한 유은정 감독의 <밤의 문이 열린다>(8월 15일 개봉)는 한여름 밤을 오싹하게 만드는 장르적 상상력에 유령을 바라보는 감독의 특별한 시선이 더해진 영화다. 유령, 살아 있는 자들의 세계에서 추방된 이 얼굴 없는 존재들이 아니었다면, <밤의 문이 열린다>는 독특하고 기묘한 분위기를 내뿜지 못했을 것이다.
<밤의 문이 열린다>는 유은정 감독의 첫 번째 장편 영화다. 현실의 고민을 담아낸 장르적 상상력은 이전의 단편 작업에서도 확인된 바 있다. 유령을 연기한 한해인 배우 또한 이번 영화가 첫 장편 주연작이다. 극 중에서 사건과 사람들에게 적극적으로 영향을 끼칠 수 없는 인물을 연기해야 하는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혜정의 미묘한 성장을 설득력 있게 표현한다. 탈북 여성 청소년의 마음을 세심한 시선으로 담아낸 단편 <전학생>(2015)을 연출했으며, 유은정 감독의 오랜 지인으로 <밤의 문이 열린다>의 제작 과정을 가까이서 지켜봤던 박지인 감독이 극장 개봉에 맞춰 인터뷰어로 나섰다.
개봉 축하한다. 두 사람 다 극장 개봉은 처음일 텐데, 많은 관객과 만나는 경험이 특별하게 다가올 것 같다.
유은정_ 오늘 아침에 일어났는데 메일이 와 있더라. 어떤 관객 분이 자기가 최근에 우울한 일이 있었는데 영화를 보고 힘이 났다고 했다. 이게 정말 전국의 극장에서 상영되는 거구나 실감했고, 감사했다.
한해인_ 사전 행사로 ‘프라이빗 살롱’이라는 소규모 GV를 진행한 적이 있다. 이 영화가 말 그대로 자신을 돌아보는 이야기이고, 갇혀 있고 소외된 모습에서 오는 외로움의 정서가 깔려 있지 않나. 그러다보니 자연스럽게 프라이빗 살롱에서도 지금 본인들의 삶과 관련한 굉장히 내밀한 고민들이 많이 나오더라. 마치 치유 프로그램처럼 다 같이 상처를 하나씩 꺼내어 나누고 공감하는 묘한 시간을 가졌다. 거기 오셨던 분이 개봉 후에 영화 보시고는 그 날 나눈 얘기가 정말 좋았고 영화 봐서 힘이 많이 됐다, 응원하겠다고 해주시는데 그 마음이 정말 좋았다.
이 영화가 자신을 돌아보게 하는 영화라는 말에 공감한다. 영화 구조 자체도 삶의 끝에서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는 이야기다. 두 사람도 이 영화를 처음 시작했던 시점으로 거슬러 올라가면 각자 어떤 계기가 있었을지, 어떤 지점을 보고 시작했을지 궁금하다.
유은정_ 이 영화는 도시에서 혼자 사는 사람들을 위한 영화다. 내가 혼자인 것 같고, 혹은 차라리 혼자인 게 편하다는 마음을 누군가 살짝 깨고 들어왔을 때 느꼈던 고마움을 잘 전달하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동시에 인물이 처한 상황이 절대 가볍거나 쉽게 느껴지면 안 됐다. 객관적인 어려움을 떠나 혼자라는 생각을 갖게 되는 많은 이들의 외로움이나 고립감은 충분히 무거운 거니까. 사실 개봉 후 SNS의 관객 평을 살피다 이런 글을 봤다. 내 상황이 혜정과 굉장히 비슷하다, 혜정이 받는 위로의 계기가 나한테도 올까, 혜정처럼 죽어서 유령이 되어야 오는 건가, 라고 썼더라. 그걸 보면서 역시 많은 사람들이 이런 생각을 하고 있지만 위로받는 게 쉽지 않구나 생각했다.
한해인_ 나 역시 혜정처럼 사람이 너무 어려워 피하고만 싶고 혼자 있는 게 편해지는 시기가 있었다. 그런 점에서 혜정과 연결되어 있다고 생각했다. 시나리오 보고 캐릭터를 발전시켜 가면서는 혜정이 여러 인물들을 만나면서 받는 영향들에 집중했다. 혜정은 유령이니까 내가 주는 영향은 잘 생각할 수 없었고 그렇게 영향을 받으며 혜정이 어디로 나아가는지에 집중했다. 시간이 지나고 영화를 몇 번 더 보면서 가장 강하게 남는 생각은 내가 누군가에게 그렇게 위로를 해줄 수 있는 사람이 될 수 있을까, 하는 질문이다. 사실 위로의 순간은 마법처럼 오는 것 같기도 하다. 마음먹어도 그게 안 될 때가 있고 그냥 슬쩍 건넨 말인데 누군가에게 크게 도움이 될 수도 있고.
유령이 된 혜정의 여정처럼 사실 갇혀 있을 때보다 조금이라도 세상으로 나오면 어떤 연결의 지점을 필연적으로 만날 수밖에 없다. 거의 삶의 끝에서 만난 것이지만 어쨌든 밖으로 나아가는 계기를 맞이하는 혜정을 봐서 좋았다. 이 영화를 유령이라는 키워드를 빼고 말할 수는 없을 거다. 그런데 유은정 감독의 영화에선 유령이라는 게 나를 놀라게 하거나 위협하는 무서운 존재라기보다, 사회나 세상으로부터 소외당한 사람들처럼 등장하는 경우가 많은 것 같다. 이런 존재에 대한 관심은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 궁금하다.
유은정_ 나 스스로가 혼자 있는 걸 좋아하고 사람들하고 관계 맺는 걸 좀 어려워했다. 청소년 시기가 특히 그래서 상상이나 판타지와 연결되는 데 영향을 줬던 것 같다. 만화책을 많이 보는 편인데, 유령이라는 소재가 영화보다 만화에서 훨씬 다양하게 쓰이는 것 같다. <백귀야행>이라는 일본 만화에서도 유령이 굉장히 친근하고 장난꾸러기처럼 나오고, 어떨 때는 아련하게 등장하하면서 폭넓게 활용된다. 무시무시한 악귀처럼 세계를 지배하려는 존재로서의 유령보다는, 그저 자기 자리를 마련하고 싶어 하고 살아있는 사람들을 부러워하는 유령이 나오는 창작물들을 더 인상 깊게 봤던 것 같다.
시나리오를 처음 봤을 때 제일 걱정됐고 유은정 감독에게 얘기도 했던 게, 주인공이 능동적일 수 없는 상황에 처해 있다는 점이었다. 아까 한해인 배우도 연기할 때 혜정이 받게 되는 점에 집중했다고 말했는데 그걸 연기하는 게 어땠는지 좀 더 자세히 듣고 싶다.
한해인_ 아무래도 혜정이 영화의 주인공이고 관객들은 혜정의 감정을 따라가야 하는데 너무 존재감이 없게 느껴지면 안되는 게 아닐까 고민을 많이 했다. 결국 시나리오를 완전히 믿기로 했다. 내가 거기에 잘 집중만 하면 어떻게든 이야기가 흘러가게 될 것이라고 믿었다. 정말 유령처럼 보이는 게, 혜정이 그렇게 존재하는 게 이 영화가 사는 길이라 생각하고 완전히 힘을 빼고 영화 안에 붙들리는 걸 개인적인 목표로 두고 작업했다. 배우로서도 하나의 도전이었다. 혜정의 내면에 단단한 무언가가 있다는 건 분명했다. 그래서 그걸 가져가되 주목받기 싫어하고 부끄러워하는 사람들이 지닌 속성을 많이 고민했다. 나중에 수양(감소현)에게 말을 건넬 때도 그런 과정이 혜정에게는 모두 처음이라 생각해 서툴게 표현하려 했다.

그런 혜정이 나중엔 다른 누군가를 위해 달리지 않나. 보면서 속이 시원하고 가슴이 찡해지는 순간이었다. 유은정 감독으로부터 어떤 가이드를 받은 건 없었나?
유은정_ 그런 거 없다. (웃음)
한해인_ 처음엔 유령으로 변하고 나서 몸동작을 좀 다르게 해야 하나, 말투라도 조금 달라져야 하는 거 아닌가 생각했다. 그런 식으로 외적으로 드러낼 수 있는 방법들을 생각하고 있었는데, 감독님이 굉장히 확고하게 유령이 되었을 때도 혜정이 살던 모습 그대로였으면 좋겠다고 말해 줬다. 그 말 하나로 시작할 수 있었다.
유은정_ 처음부터 이 영화의 유령이 장르영화 속에서 우리가 흔히 떠올리는 유령이 아니라고 생각해 그랬던 것 같다. 실체가 없어져서 살아있는 사람보다 오히려 더 약한 존재라고 생각했다. 물론 그런 장면도 있다. 초반에 혜정이 지연(이자민)을 흔들며 깨우려는 모습은 유령이 되지 않았다면 하지 않았을 모습이다. 그럼에도 혜정이 과연 유령이 된 걸 얼마나 실감할 수 있을까를 자문했다. 자신이 유령이 된 것을 확신하면서 마치 다른 사람처럼 적극적으로 행동하는 건 혜정에게 어울리지 않는 것 같다.
처음 혜정이 자신이 혼수상태에 빠진 상태로 유체이탈이 되었음을 느끼게 되는 순간이 있다. 한해인 배우도 두 번째 오디션 때 바로 그 장면을 연기했다고 들었다. 그 장면의 구성은 어디서 아이디어를 얻었는지 궁금하다.
유은정_ 그것도 만화에서 영감을 받았다. 혜정이 살아있을 때 방에서 느꼈던 외로움과는 차원이 다른 정말 적막하고 무서울 정도로 외로운 공간을 표현하려 했다. 광활한 어둠. 좋아하는 만화 중에 <칠석의 나라>라고 <기생수>로 유명한 이와아키 히토시의 작품이 있다. 공간을 다른 차원으로 옮기는 능력을 지닌 외계인 자손들이 등장한다. 어떤 이는 이 능력을 살인하는데 쓰기도 한다. 사람의 반쪽 공간을 다른 차원으로 옮기면 그 사람은 반이 잘린 채로 죽게 되니까. 그때 그럼 그 다른 차원은 어디일까 했을 때, 후반에 가서 짧은 내레이션이 나온다. 그 차원에서는 원래 차원 속 사람들을 지켜볼 수밖에 없다고. 불투명한 창으로 나뉘어져 나는 이쪽에서 건너편을 바라볼 수 있지만 건너편에선 이쪽을 보지 못하고, 물론 서로 닿을 수도 없다. 이 깊은 외로움이 이런 식으로 표현될 수 있구나, 와 정말 좋다, 감탄했다. 그럼 영화 속 상황에서는 이걸 깊은 어둠 속에 혼자 고립된 걸로 표현할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나중에 이걸 어떻게 구현할까 스텝들하고 고민할 때 보여줬던 건 <언더 더 스킨>(2013, 조너선 글레이저)에 나오는 검은 공간이었다.
한해인_ 나 역시 시나리오처럼, 그런 느낌으로 연기하려 했다. 너무 깜깜해서 눈을 뜨고 있는데도 앞이 보이지 않고,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 마치 우주 속에 있는 기분. 근데 그게 처음 겪어보는 거니까, 두려움, 공포, 궁금증이 모두 섞여 있어 어떤 감정을 느껴야 하는지도 모르는 혼란을 떠올리며 연기했다. 어떤 감정을 크게 느끼기보다 순식간에 들어온 그 상황을 인지하려 노력했다.
유령이 된 혜정은 시간을 거슬러 올라 자기의 삶을 다시 체험한다. <신과 함께>(2017, 2018, 김용화)나 <코코>(2017, 리 언크리치, 에이드리언 몰리나)처럼 사후세계를 그린 영화들이 많은 사랑을 받기도 했는데, 이 영화에서는 사후세계를 자신의 삶을 복기하는 것으로 그리고 있다. 그런데 사실 이게 굉장히 고통스러운 여정이지 않나. 마치 시시포스의 형벌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왜 사후세계를 이렇게 구성했나.
유은정_ 우선 주인공이 유령이니까 산 사람과는 반대로 만들어보자는 아이디어가 있었다. 그래서 우리가 낮에 활동하고 밤에 자는 걸 뒤집어서 유령은 낮에 자고 밤에 활동하는 것으로 생각했고, 우리가 밤에 자고 일어나면 내일 아침이 되는 걸 뒤집어서 유령은 낮에 자고 일어나면 어제 저녁이 되는 것으로 설정했다. 어제 저녁으로 돌아가 일어난다는 설정이 보통 창작물에서 유령이 밤에 등장하고 과거에 얽매어 있다는 설정과 닿아 있기도 하고, 그런 과거에 대한 집착 자체가 유령과 직결되는 것이라고 봤다. 또 하나는, 물론 자신이 바꿀 수도 없는 과거를 계속 지켜봐야 하는 혜정의 여정이 후회로 점철될 수도 있겠지만, 우리가 기억을 계속해서 복기하다보면 후회로 점철될 것만 같았던 시간 속에서도 나를 긍정할 수 있는 시간을 발견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서였다. 후회한다는 것 자체가 사실은 변하고자 하는 것이기 때문에 마냥 고통스러운 여정만은 아니었으면 좋겠다, 그래서 아침을 맞이하는 걸로 이어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후회도 하지 않으면 더욱 밤에 둘러싸여 있을 수밖에 없지 않을까.
확실히 이 영화는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며 후회를 하는 이야기일 수도 있고 동시에 어떤 걸 발견하는, 이전에는 나한테 매몰되어 있어서 못 봤던 것들을 발견하는 이야기일 수도 있을 것 같다. <밤의 문이 열린다>가 재밌는 게 저예산 독립영화로서는 흔치 않게 이런 장르적 세계를 시도했다는 점인데, 쉽지는 않았을 것 같다.
유은정_ 시작할 때만 해도 사실 독립영화든, 저예산영화든, 드라마 좋아하는 사람은 드라마 만드는 거고 장르 좋아하는 사람은 장르영화 만드는 거지 하면서 별 고민 없이 시작했다. 내가 좋아하고 본받고 싶어 하는 영화들은 장르 영화들이었으니까. 오히려 그땐 생각보다 더 장르영화를 안 만들고 있다는 걸 알게 되면서 그럼 내가 한번 만들어 봐도 좋지 않을까 희망을 갖기도 했다. 근데 어려움을 언제 가장 뼈저리게 느꼈냐면 프로덕션 시작하면서 미술이 장르에서 얼마나 중요한가를 깨닫고, 또 CG도 빠질 수 없는 것인데 내가 정말 쉽게 생각했구나, 절절히 체감하면서다. 아 이래서 독립영화에서 장르영화를 안 하는 거구나, (웃음) 절절히 느꼈다.

그럼에도 장르적 공식 안에서 개성이 충분히 살아있는 영화를 훌륭하게 만들어낸 것 같다. 두 사람 다 첫 장편이었는데 현장 경험은 어땠나? 단편에서의 답답함이 해소된 지점도, 반대로 어려웠던 지점도 있을 텐데.
유은정_ 단편 찍을 때 가장 많은 회차를 썼던 게 <캐치 볼>(2015)이었는데, 그게 총 8회차였다. 근데 <밤의 문이 열린다>가 14회차다. 사실은 누군가는 단편을 찍을 수도 있는 회차였다. 그래서 체력적으로 소모가 덜했고 길어서 더 어려웠다는 느낌은 받지 못했다. 그리고 단편 때는 도와주러 온 사람들과 함께 하는 경우가 많았고 페이도 이 작업만 생각해도 좋을 만큼 충분히 드리지 못했다. 그런데 이번에는 스텝들이 자기 포지션에서 자기 역할에 집중할 수 있게 페이를 드릴 수 있었고 그렇게 분업화가 잘 되어 있는 게 굉장히 든든했다. 어려웠던 점은 단편 때와는 차원이 다른 무게감이다. 각자의 포지션에서 열심히 해주는 사람들의 결과물을 망칠 수 있는 게 바로 감독이니까. 똑같이 발표를 해도 단편은 교실에서 같이 수업 듣는 학생들 앞에서 하는 거라면, 장편은 한 회사의 대표로서 비즈니스 미팅을 가서 오케이를 못 받으면 우리 모두가 망하는 그런 부담감이었다. (웃음)
이번 영화를 보면서 유은정 감독의 이전 단편 작업들에 나왔던 모티프들이 집약되어 있다고 느꼈다. 소외되고 잘 보이지 않는 사람으로서의 유령에 대한 이야기라는 점이나, <밀실>(2016)과 <낮과 밤>(2012)의 깜박이는 불빛들, 낮과 밤이라는 시간의 변화와 그 경계에 선 사람들에 대한 관심 등이 모여 있다는 인상을 받았다. 제작 기간은 짧더라도 나름의 긴 이야기를 통해 무언가를 풀어가는 경험이 어땠을지 묻고 싶다.
유은정_ 단편에서 단편에 어울리는 이야기를 찾게 되는 것처럼, 장편을 만들 때는 이 이야기가 장편을 끌고 갈 만큼 힘 있는 이야기인가, 풍성하게 전개할 수 있는 이야기인가를 고민하게 되더라. 나 같은 경우는 좀 편하긴 했다. 단편에서는 똑같이 사람이 죽어도 그걸 수습할 시간이 너무 적고 그 사건이 주는 임팩트에 함몰되기 쉽다. 그런데 장편에서는 앞뒤 맥락이나 그 사건이 불러일으키는 파장과 영향을 더 풍부하고 길게 설명할 수 있으니까. 사실 <캐치 볼> 때 장편에 어울리는 이야기를 단편에 구겨 넣었다는 얘기를 많이 들었다. 그리고 소위 데드타임이라고 말하는, 내러티브하고는 관계가 없더라도 감독이 생각하기에 영화에 꼭 들어가야 하는 어떤 것이 있을 때 그런 것들을 보여주기에도 장편의 길이가 넉넉해서 좋았다.
단편 작업 하면서 답답함이 있었겠다. 한해인 배우는 긴 호흡의 이야기를 짊어진 기분이 어땠나.
한해인_ 단편 같은 경우도 물론 즐겁지만 조금 허할 때가 있다. 나는 정말 마음을 담아서 했는데 며칠 지나니 벌써 끝나 있고, 그렇게 헤어지는 거니까. 장편 치고는 짧은 회차이긴 했지만, 확실히 이번 영화에서는 내가 어떤 프로덕션 안에 소속되어 있다는 소속감 안에서 오래 그 인물을 고민할 수 있었다. 지금 생각하면 개인적으로 그때 마음이 많이 안정되어 있었던 것 같다. 그리고 인물을 표현할 때도 확실히 장편은 그 인물의 여정을 좀 더 길게 보여주다 보니까 내가 그 과정을 더 세세하게 생각하고 구성해 나갈 수가 있더라. 사소하게는, 내가 이 날 연기가 좀 아쉬웠다 그러면 거기서 끝나버리는 게 아니고 또 많은 회차가 남아 있으니까. (웃음) 남은 부분에서 내가 더 이 인물을 관객들 마음이 갈 수 있게 연기하면 된다는 위안도 있었다. 물론 감독님과 마찬가지로 큰 이야기를 끌고 가야 하는 부담감 또한 어마어마했지만.
두 사람 다 그 무게감을 이겨내고 여기까지 왔다. 이 영화가 한편으로는 한계가 지닌 가능성 같은 걸 보여준다는 생각도 했다. 무엇보다 유은정 감독이 언급한 미술이나 CG에서의 많은 어려움과 한계에도 불구하고 결국 개성 있는 장르 영화로 완성되지 않았나. 그리고 혜정이라는 인물 또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한계 상황에 부딪힌 바로 그때부터 뭔가를 시작한다는 것도 위로가 되는 지점이 있었다. 그런 의미에서 두 사람도 돌이켜봤을 때 개인적으로 한계라고 느꼈던 지점이 무엇이었는지, 그걸 어떻게 극복했는지.
유은정_ 매 순간이 그렇다. 사람들이 다 내 마음 같지 않다는 걸 항상 느끼고. (웃음) 사실 나는 영화라는 매체를 습득하는 속도가 느리다는 생각을 많이 했다. 꼭 하나를 만들고 실패해봐야 깨닫는 걸 보면서 말이다. 다른 사람들하고 소통하는 걸 잘 하지 못하는데 또 도움을 필요로 하는 인간이기도 하고. 영화 작업 자체가 많은 사람들의 도움이 없으면 안 되는 일이니까 그럴 때 내가 영화랑 잘 어울리지 않는 게 아닌가 많이 생각했다. 그래서 사실 휴학을 한 번 하고 영화에서 떨어져 본 적이 있다. 그런데 막상 그러고 나니 초반에는 즐거웠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도망쳤다는 생각에 자괴감이 커지더라. 이래나 저래나 마음이 불편하다면 하고 싶은 걸 하는 게 맞겠다 싶어 돌아왔다.
한해인_ 배우로서 항상 하는 고민은, 특히 영화라는 매체를 만나고 나서는 이미지에 대해 생각을 많이 한다. 나 스스로에게 나만의 어떤 분위기가 있고 그걸 사람들이 많이 봐주는 것 같다. 그런데 내겐 그 분위기만 아니라 다른 다양한 모습도 있고 그걸 보여주고 싶은 욕망이 가득 차있는데 영화는 아무래도 내가 선택을 받아야 하는 거고 그런 작품을 만나야 하는 거니까. 내가 하고 싶다고 지금 당장 할 수 있는 게 아니다보니 그럴 때 내가 이걸 계속 감당하면서 이 일을 할 수 있을까 고민하게 되는 것 같다. 이때 내가 지닌 장점을 잘 써먹는 것도 충분히 어려운 일이고 대단한 일이지 않나 생각하면 이런 무기력이나 한계를 이겨내는 데 조금 더 수월해진다. 그리고 나 스스로가 한계에 부딪히는 것 자체를 좋아하는 사람 같다. 작품을 만났을 때 그런 경험을 많이 하게 되기 때문에 작품 하는 걸 즐긴다는 생각도 들고. 보다 다양한 내 모습을 보여줄 수 있는 작품들을 만나길 기대하면서, 현재 내가 할 수 있는 일들을 찾으려 한다. 배우라는 직업이 자기 자신과 굉장히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보니 내적으로 내게 어떤 문제가 있는 건 아닌지, 아니면 외적으로 어떤 활동을 해야 하는 건지 찾으려 시도하면서, 결국 그렇게 자기 자신을 계속 돌보는 게 제일 중요한 것 같다.

어찌 보면 혜정의 여정이 한해인 배우 안에 다 들어 있었던 것 같다. 영화가 정말 도움을 많이 받았을 것 같다. 내레이션도 한 번 얘기해보고 싶다. 영화를 보신 분들 중에 내레이션을 좋아하는 분들이 많다.
유은정_ 편집 과정에서 시나리오와 구성이 조금 달라졌고, 빈 공간들이 생겼다. 그 공간들을 채우기 위해 내레이션이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빈 공간은 정보적인 것만이 아니라 정서적인 부분도 있어서 이 내레이션으로 정보도 전달하면서 동시에 정서도 전달해야 했다. 그래서 너무 설명하는 것 같은 내레이션이면 안 되니까 그 경계를 잘 타는 게 어려웠다. 사실 박지인 감독이 많이 감수해줬다. (웃음) 특히 젊은 여성 시인들의 시집을 많이 찾아 읽었다. 또 이런 것의 대가인 왕가위 감독의 영화를 참고했다. 이 영화와는 톤이 많이 다르긴 한데. (웃음) 편집기사에게 <해피투게더>(1997, 왕가위)와 <중경삼림>(1994, 왕가위) 봤다고 하니까 깔깔 웃으시더라. 그런데 특히 <해피투게더>의 내레이션에서 되게 특이한 게 하나 있었다. 양조위가 전화 부스 앞에서 전화를 걸까 말까 망설이는 장면에서 그 전에 한 번도 설명하지 않았던 전사(前史)를 다 얘기해주는 거다. 그런데 지금 보이는 이 장면과 내레이션을 통해 새롭게 알게 된 정보와 정서가 합쳐지니까 중복이라는 생각이 전혀 안 들고 저 사람이 왜 전화 부스 앞에서 서성이는지 확실히 느껴지더라. 그래서 이런 기조로 쓰면 되는 거구나, 그게 인물과 연결되어 있는 거라면 설명적이지 않을까에 대해 너무 큰 부담을 갖지 않아도 되겠다고 마음을 좀 놓게 됐다.
내레이션을 들으면서 혜정이 쓴 일기 같기도 하고, 혜정의 보이지 않았던 모습들, 왜 혜정이 이렇게 되었을까 하는 궁금증들이 설명되는 거 같아서 울컥했다. 내레이션이 정말 좋았다. 한해인 배우는 그 내레이션을 직접 녹음했는데 톤을 잡는 게 쉽진 않았을 것 같다.
한해인_ 정말 완전히 감정을 걷어낸 채 정보만 전달하는 것도 아니었고, 그렇다고 거기에 완전히 빠져서 혼잣말처럼 감정이 듬뿍 묻어나는 것도 아니었다. 그 모든 게 섞여 있는 내레이션이어서 처음에 톤을 잡을 때 조금 헤맸다. 정식으로 내레이션 녹음하기 전에 감독님 만나서 핸드폰으로 여러 문장들 읽어서 녹음하고 들으며 준비했고, 그러면서 여기서는 조금 더 가볍게 얘기해주면 좋겠다는 식으로 감독님이 가이드를 해줘서 그걸 들으면서 맞춰갔다.
꼭 이 영화의 사건을 다 겪고 난 혜정이 하는 말 같았다. 본인 일이면서도 그걸 한 번 다 겪고 나서 어느 정도의 후련함과 거리감이 생긴 이후에 말하는 것 같더라. 그래서 영화가 끝나고 나서 개인적으로 혜정이 어떻게 됐을까 궁금했다. 중간에 혜정이 피 흘리면서 콜록되는 장면도 나오고. 맞다, 그때 혜정이 누워있는 침대 앞에 계속 걸려있던 국화 그림이 독특했는데, 어떤 그림인지 설명해 줄 수 있나?
유은정_ 그려져 있는 것처럼 정말 국화의 역할, 추모의 역할을 하기도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혜정에게 꽃은, 특히 민성(이승찬)이 꽃을 줬을 때 사실 꽃이 보기 좋고 축하할 때 주는 선물이라는 걸 알지만 혜정에게는 그런 좋은 의미들이 판타지같이 믿을 수 없는 것으로 여겨졌을 것 같다. 그런 판타지, 희망 같은 게 삶과 죽음의 경계에 있는 혜정 앞에 걸려있는 것으로 생각했다. 혜정의 엔딩에 대해서는 박지인 감독의 해석을 들어보고 싶다. (웃음)
잘 지냈으면 하는 마음이 크니까. 죽음의 너머로 넘어갔다는 생각도 하지만 동시에 마지막에 혜정이 소통을 하게 되는 것처럼 또 다른 삶도 있을 수 있겠다는 가능성이 보여서 좋았다. 마지막으로, 두 사람의 다음 계획을 듣고 싶다.
유은정_ <미망>이라는 제목의 영화를 기획중이다. 초기 아이템 단계라, 인물 구축부터 하고 있다.
오래 전부터 들어왔던 아이템이라 기대가 된다.
유은정_ 하나의 설정은 계속 유지되는 것 같다. 언니를 정말 좋아하는 동생이 주인공인데, 언니가 이른 나이에 죽어 그 언니를 되살리고 싶어서 저승에서 데리고 나온 거다. 동생이 “나는 언니를 데리고 나왔어.”라고 믿으면서 시작되는 이야기인데, 어떻게 전개되는 것이 좋을지 고민이다. 지금 단계에선 목적이 너무 분명하다보니 이 친구의 일상을 많이 구축하지 못한 것 같아서, 입체적이고 살아있는 캐릭터로 만들기 위해 고민하고 있다.
자매 이야기를 정말 좋아한다. <겨울왕국>(2013, 제니퍼 리, 크리스 벅)의 다크사이드 버전 같은 느낌이다. (웃음)
유은정_ <겨울왕국> 나왔을 때 정말 질투가 났다. 나도 언니 엄청 좋아하는 동생 얘기 하고 싶었는데, 디즈니가 먼저 하다니. (웃음) 그래도 자매 이야기가 사랑 받았다는 사실은 큰 용기를 준다.
이번 영화의 제작일지에도 나와 있듯이, “서른 살이 된 유령 혜정”이라는 문구가 떠나지 않았다고 했는데. 주변에서 찾을 만한 소재나 드라마보다는 그런 식의 한 줄로 된 독특한 설정으로 시작하는 경우가 많은 것 같다.
유은정_ 그런 것 같다. 그러면서 그걸 자꾸 현실에다 갖다 붙이려고 하니까. (웃음) 경계를 잘 타야 되는 것 같다.
그게 또 독특한 분위기를 만들어내지 않나. 한해인 배우의 다음 계획은 무엇인가?
한해인_ 지금 딱히 정해진 건 없다. 가능하다면 길게 여행을 가고 싶다. 얼마 전에 추가 촬영이 끝난 영화에서 서핑을 배웠다. 서핑 배우면서 강원도에 혼자 한 달 동안 지냈다. 그땐 그게 외로웠는데 요즘 정말 많이 생각난다. 그래서 길게 여행 가서 서핑도 하고 여유롭게 지금까지 해온 것들을 정리하며 보내고 싶다.
혜정처럼 말인가? (웃음) 그러고 나면 두 사람이 또 함께 할 작품도 기대해 볼 수 있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