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한 콤플렉스, 끔찍한 스캔들
<앨리스 죽이기>
정지혜 / Choice / 2019-08-14

한 공동체의 집합 기억, 그 준거가 되는 해가 있다. 동시대 한국인에게는 두말할 필요 없이 2014년, 세월호 참사가 발생한 때다. ‘이것이 국가인가’라는 비탄과 절망의 신음은 자성과 저항의 목소리를 일깨웠고, 무력과 우울이 뒤섞인 날카로운 말들은 이후로도 끝없이 계속됐다. 김홍중이 『사회학적 파상력』(문학동네, 2016)에서 분석했듯이, 세월호가 야기한 충격의 핵심에는 다름 아닌 국가 신화의 파상(破傷)이 자리하고 있었다. 신화화됐던 과거가 일순간에 무너져 내리면서 폐허의 장은 삽시간에 출몰한 ‘변증법적 이미지’들로 넘쳐났다. 지존파 사건, 성수대교와 삼풍백화점 붕괴 등을 경유해 현실을 들여다보는 정윤석 감독의 <논픽션 다이어리>(2013)가 2014년에 개봉한 것은 단순한 우연이 아니다.

<앨리스 죽이기>(2017)는 2014년 말에 발생한 한 사건을 통해 당대의 파상을 헤집으려고 시도한다. 김상규 감독이 주목하는 건 기세등등한 ‘종북몰이’이다. 재미교포 신은미는 남편 정태일과 함께 미국 시민권자로서 북한 관광을 다녀온 적이 있다. 그 경험을 바탕으로 신은미는 책도 내고 미국 한인 타운에서 북 콘서트도 열었다. 남북 교류와 평화에 기여했다며 한국의 한 언론사는 신은미에게 ‘올해의 뉴스 게릴라 상’과 ‘통일 언론상 특별상’을 줬다. 한국 정부는 신은미의 책을 우수도서로 지정하기까지 한다. 그리고 6‧15공동선언실천 남측 위원회가 신은미에게 통일 토크 콘서트 진행을 제안하고, 때마침 가족 행사가 있던 신은미와 정태일은 한국을 방문해 서울, 광주, 대전, 대구, 익산, 부산에서 토크 콘서트를 진행하려 한다.

다큐멘터리 <앨리스 죽이기>에서 신은미가 전하는 북한 이야기는 대부분 이런 식이다. 북한에 가기 전까지만 해도 “달나라로 가는 것보다 더 독특한 여행”이 될 거 같아 두렵고 낯설었다. 하지만 막상 북한에 가보니 그곳에도 사람이 살고 있었다. 자신과 별반 다르지 않은 사람들이 평범한 일상을 영위하고 있었다. 심지어 자신을 이끈 여행 안내원과는 엄마와 딸처럼 속마음을 터놓는 사이가 됐다고 그녀는 말한다. 북한에는 머리에 뿔 달린 괴물들만 살고 있을 것이라는 생각은 오래된 환상이고, 그릇된 편견이며, 터무니없는 왜곡이었다는 것이다. 거대한 분단의 장벽 너머에 더없이 살가운 이웃이 숨 쉬고 있음을 두 눈으로 똑똑히 확인했다는 그녀의 전언은 익숙하고, 천진하다.

그런 신은미가 한국에 와서 막상 맞닥뜨리는 건 보수 언론의 맹렬한 비난이다. ‘서울 한복판에서 북한 찬양 토크쇼가 열렸다.’, ‘북, 지상낙원이라고 침이 마르도록 찬양했다’ 등의 말들이 끊임없이 반복되고 공격적으로 재생산된다. 상황은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급물살을 탄다. 곧이어 신은미 부부의 재입국 금지 조처가 내려질 거라는 뉴스가 나온다. 이미 대관까지 마친 대전의 토크 콘서트 행사장 측은 신은미에게 사실상 행사를 취소할 것을 종용하고, 심지어 익산 토크 콘서트 현장에서는 신은미를 향해 사제 폭탄을 던지는 청년까지 등장한다. 보수언론과 극우단체뿐인가. 당시 대통령이던 박근혜는 수석비서관회의에서 신은미의 토크 콘서트를 두고 “사회적 갈등이 우려된다”며 종북몰이에 불을 지핀다.

<앨리스 죽이기>에서 연출자의 시선은 굉장히 단순하고 명쾌하다. 카메라는 순수한 마음으로 북한 관광을 다녀온 평범한 시민과 그 반대편에서 그들을 ‘빨갱이’라고 손가락질 하는 무리를 번갈아 비춘다. 그런데 이 선명한 대비 때문일까. 안타고니스트는 물론이고 프로타고니스트에 해당하는 이들조차 전형성을 벗지 못한다. 대비에서 시작해 대비로서 진행되고 대비로 마무리되는 전개. 프로타고니스트 신은미의 선택과 심정, 생각의 변화를 들여다보기에 영화가 주는 정보는 단편적이다. <앨리스 죽이기>는 2014년의 지배적 상황을 환기하지만, 신은미 사건의 파상적 쟁점에 접근하지는 못한다. 신은미가 자신을 시대적 상황의 피해자라고 여기는 것과 영화가 순수한 희생양으로 그녀를 규정하는 건 전혀 다른 문제다.

영화의 첫 부분에서 신은미는 피아노를 치며 노래한다. 그녀는 앞으로 닥칠 사건과 무관해 보인다. 영화의 끝부분에서 신은미는 또다시 노래한다. 한국에서 일련의 사건을 겪은 신은미가 미국 공항에서 다시 한 번 종북몰이와 마주한 직후다. 카메라는 아비규환 속에서 일그러진 신은미의 얼굴을 고속 촬영으로 보여주기까지 한다. 정태일이 차 뒷좌석에 앉아 담배를 피우며 창밖을 응시할 때 시계 초침 소리가 계속되던 장면과 더불어 지극히 ‘극적인 순간’이다. 희생양과 속죄양으로 보이는 두 사람, 언급한 이들 장면에선 특히나 더 그러하다. 시종 양측이 대립하고 대비하는 양상에서, 특정한 이미지는 특정한 쪽으로 더욱 강화되는 법이다. <앨리스 죽이기>는 극적 관심을 불러일으키는데 성공했으나, 그 효과는 제한적이라는 점에서 아쉬움을 남긴다.

 

 

앨리스 죽이기 To Kill Alice 제작 지킬필름 감독 김상규 출연 신은미, 정태일, 황선 배급 인디플러그 제작연도 2017년 상영시간 81분 등급 12세 이상 관람가 개봉 2019년 8월 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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