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마음은 지지 않았다
제8회 DMZ Docs 수상작 <침묵>
김이석/ 동의대학교 영화학과 / Ground / 2019-08-01

박수남 감독의 <침묵>(2016)은 침묵을 강요하는 자와 권위에 굴복하지 않고 자기 목소리를 지켜 낸 사람들에 관한 영화다. 영화는 박수남 감독과 이옥선 할머니가 20년 만에 재회하는 모습으로 시작한다. 웃음과 눈물이 뒤범벅이 된 채로 서로를 얼싸안는 두 사람의 재회 장면을 뒤로 하고 영화는 시간을 거슬러 올라간다.

1989년, 오키나와에 살고 있던 배봉기 할머니. 박수남 감독은 그녀를 ‘위안부의 침묵을 깬 첫 여성’이라고 소개한다. 돈을 벌게 해준다는 말만 믿고 고향을 떠났던 배봉기 할머니는 오키나와에 있는 일본군 기지로 끌려와 위안부 생활을 해야 했다. 당시 오키나와로 끌려 온 위안부의 숫자가 천 명이 넘었다고 감독은 말한다. 전쟁이 끝난 이후에도 오키나와에 남아 유령 같은 존재로 살아가던 배봉기 할머니가 마침내 입을 열면서 일본 사회에서 위안부 문제가 공론화되기 시작했다.

배봉기 할머니의 증언은 위안부 문제의 출발점이자 동시에 박수남 감독의 영화 <침묵>의 출발점이기도 하다. 1935년 일본에서 태어난 박수남 감독은 20대에 재일교포 인권운동에 뛰어들었다가 교포사회에서 반체제 인물로 내몰리게 된다. ‘침묵을 강요당한’ 이때의 경험은 감독으로 하여금 새로운 길을 모색하게 만드는 계기가 되었다. 자신의 ‘존재 회복을 위해서’ 부모 세대의 역사를 찾는 여정을 시작한 박수남 감독은 조선인 피폭자들의 증언을 추적해가던 중 배봉기 할머니를 만나게 됐고, 그때부터 일본군의 성노예가 되었던 여성들의 이야기를 기록하기 시작한다. 배봉기 할머니의 이야기를 담은 <아리랑의 노래>를 완성한 이후 박수남 감독은 이옥선 할머니를 비롯한 ‘위안부 피해자회’(이하 피해자회)의 할머니들을 만나게 된다.

피해자회는 ‘태평양전쟁 희생자 유족회’(이하 유족회)나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이하 정대협)에서 탈퇴한 15명의 위안부 피해자로 구성된 단체다. “정대협이나 유족회나 기대할 게 아니고 우리 할머니들이 한번 힘을 모아서 해보자.”는 것이 모임을 만든 취지였다고 할머니들은 증언한다. 하지만 피해자회 할머니들의 활동은 난항을 거듭하게 된다. 일본 정부는 할머니들을 철저히 무시했고, 시민단체마저 할머니들이 오히려 운동을 방해하고 있다고 비난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할머니들은 포기하지 않고 온몸을 던져 목소리를 전달하고자 했고 감독은 그 투쟁의 과정을 자신의 카메라에 담았다.

<침묵>

강요된 침묵

1989년 시작된 이 영화는 2016년에야 완성되었다. 필름카메라, 비디오카메라, HD카메라 등 촬영장비의 변화만으로도 세월을 읽을 수 있다. 이 영화가 이토록 긴 시간을 감당할 수 있었던 것은 할머니들과 박수남 감독이 공통의 목표를 가진 동지적 관계를 형성했기 때문이었다. 그들이 원한 것은 침묵을 강요하는 자들에 맞서 자신의 존재를 입증하고 이를 통해 자신의 존엄성을 회복하는 것이었다. 다른 사람의 도움 없이 스스로 싸워보겠다고 나선 할머니들의 모습에서 박수남 감독은 타협하지 않는 경계인으로 살아왔던 자신의 모습을 발견했던 것이다.

이 영화는 2016년 서울국제여성영화제와 DMZ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를 통해 국내에 소개되었다. 2015년 12월 28일, 박근혜 정부와 아베 정부 사이에 한·일 일본군 위안부 협상이 타결된 직후다. 감독은 이 협상이 “피해자 할머니들의 목소리가 말살된 상황에서” 이루어진 것이라고 말한다. 위안부 문제가 공론화된 지 30년 가까운 세월이 흘렀지만 할머니들은 여전히 침묵을 강요당하고 있었던 것이다. 아니 사실은 위안부로 끌려가던 그때부터 이들은 늘 외면 받고 배제 당했다. 가족에게 부끄럽다는 이유로 고향을 떠나야했고 1965년에 그랬듯이 2015년에도 정치권력을 손에 쥔 자들부터 외면 받았다. 국가 권력만이 이들에게 고통을 안겨 준 것은 아니다. 배봉기 할머니가 홀로 세상을 떠난 뒤에도 조총련과 민단은 유골을 고국에 안치하는 문제를 두고 서로의 입장만을 내세우며 대립한다.

할머니들을 돕겠다고 나선 이들조차 정치적 명분 등을 내세워 침묵을 강요했다. 1995년 일본 정부가 ‘아시아 여성 국민 기금’을 창설하고 민간 모금을 시작하자 피해자회 할머니들은 일본을 방문해 격렬하게 항의한다. 박수남 감독을 비롯한 일본 내 지원자들도 기금 수령을 거부하는 할머니들에게 지지를 보낸다. 하지만 국민 기금의 지속적인 설득에 넘어간 할머니 7명이 기금을 수령하면서 또 다른 갈등이 발생한다. 국민 기금을 수령할 경우, 위안부가 ‘공창(公娼)’이었다는 일본 정부의 주장을 인정하는 것과 다름없다며 할머니들을 설득해왔던 정대협이 기금 수령자들을 비난하고 나선 것이다.

피해자회 할머니들을 지원해 왔던 박수남 감독 역시 정대협의 공격 대상이 되었다. 영화 속에는 우리 정부가 지급하는 생활지원금을 미끼로 박수남 감독과 피해자회 할머니들의 만남을 방해하려는 사람들이 있었다는 증언도 등장한다. 위안부 문제에 가장 먼저 주목했으며 물심양면으로 지원을 아끼지 않았던 박수남 감독 입장으로서는 참담하고 억울한 상황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감독은 자신과 할머니들 사이를 모함한 자들이 누구인지 더 이상 파헤치지 않는다. 그런 사실들을 알고 난 이후에도 감독은 담담하게 오키나와에 위안부 추모비가 건립되는 순간과 배봉기 할머니의 유골이 고향으로 돌아가는 모습을 카메라에 담는다. 박수남 감독이 이토록 침착함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때로는 그럴 듯한 명분을 앞세워 때로는 사사로운 이익을 얻기 위해 타인에게 침묵을 강요하는 자들이 어디에나 있음을 경험을 통해 이미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침묵>

침묵을 깬 사람들

“할머니들의 목소리를 들어라!” 이것이 이 영화 전체를 관통하는 박수남 감독의 주장이다. 한 번 침묵의 벽을 허문 할머니들은 자기만의 방식으로 수많은 이야기를 들려준다. 위안부 문제를 처음 수면 위로 끌어올린 배봉기 할머니는 “일본군에게 속아서 끌려왔으니 일본 정부로부터 배상 받아야겠다”고 단호하게 명료하게 주장한다. 처음 일본 방문 당시, 일본 사람이 무섭다고 몸을 숨겼던 하수임 할머니는 어렵게 입을 연 뒤 폭포수처럼 이야기를 쏟아낸다. 필리핀에서 온 마리아 로사 핸슨 할머니는 피해자회 할머니들 옆에서 영어로 자신의 경험을 증언하고, 말이 서툴러 걱정을 하던 이옥선 할머니는 이야기대신 장구 연주로 자신을 표현한다.

할머니들의 증언만큼이나 중요한 목소리가 있다. 바로 일본군 종사자들의 증언이다. 전범 문제나 국가 폭력을 다룬 영화들에 등장하는 인물들이 “나는 책임이 없습니다.”를 반복적으로 되뇌는 것과 달리, 이 영화에는 자신의 책임을 인정하고 참회하는 자들의 목소리가 담겨 있다. 특히 비록 직접 위안소를 찾아가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자신이 최가 없다고 말할 수 없다고 고백하며 사죄하는 나가사와 타케시씨의 고백은 매우 인상적이다.

배봉기, 이옥선, 하수임 등 고통스런 기억을 되살렸던 할머니들의 목소리와 나가사와 타케시처럼 자신의 책임을 인정하는 일본인들의 목소리가 어우러지면서 침묵만을 강요하던 세상에도 작은 변화가 생겼다. 더 많은 사람들이 이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게 되었고, 더 많은 목소리들이 세상으로 쏟아져 나오게 되었다. 물론 이런 목소리와 행동이 근본적인 변화를 가져오지는 못했다. 2015년의 협상이 그 증거다. 게다가 이런 목소리와 행동은 상당한 용기와 대가를 요구하기도 한다. <침묵>이 개봉할 당시 일본 우익세력이 보여준 거칠고 조직적인 방해 행위나 박수남 감독이 겪었던 모함 등이 그 사례다. 다행히도 할머니들, 박수남 감독, 그리고 그들을 지지했던 자들은 침묵을 강요하는 자들 앞에 무릎 꿇지 않았고 그 덕분에 우리는 그들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게 되었다.

<침묵>은 할머니들의 목소리로 끝을 맺는다. 힘 있는 자들이 지워버리고자 했던 그 목소리는 이 영화의 출발 지점을 환기시킴과 동시에 이 영화의 존재 이유를 다시 한 번 확인시켜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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