몰라서 물어요?
<굿바이 썸머> 김보라
글 차한비 사진 김혜미 / Interview / 2019-07-22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마주앉았다. 김보라는 허리를 곧게 핀 자세로 정면을 바라본다. 커피를 권하자 이미 마셨다며 사양하고, 여름을 좋아하느냐고 물었더니 단박에 “아뇨”라며 고개를 젓는다. 연달아 짧은 부정이 돌아왔는데, 머쓱하기보다는 웃음이 나온다. 스크린과 브라운관을 통해 지켜본 모습과 묘하게 겹쳐 보여서다. 듣기 좋으라고 말을 꾸미거나 물으면 묻는 대로 순순히 답하는 건, 어쩐지 김보라와 어울리지 않는다. “은근히 할 말 다하는 성격 같아요. 예전에는 낯가림이 심해서 밖에 나가면 인사도 먼저 못할 정도였는데, 스물세 살 무렵부터 외향적으로 바뀌었어요. ‘김보라로 사는 인생은 이번이 마지막인데, 그냥 하고 싶은 대로 하면서 살자’ 싶더라고요.”

적극적으로 변화한 성격을 반영하듯, 스물다섯이 된 김보라는 질문하는 역할을 멋지게 소화해낸다. 상대에게 물음표를 건네며 큰 눈을 열어젖힐 때, 그는 이전보다 더 특별해 보인다. 얼굴에는 음영이 생기고 목소리는 알맹이를 품은 것처럼 단단해진다. 매회 화제에 오르며 시청자를 사로잡았던 드라마 <SKY 캐슬>(JTBC, 2019)에서 가장 유명한 대사 중 하나는, 바로 그가 던진 질문이다. 무슨 속셈으로 이 집에 들어왔냐고 다그치는 한서진(염정아)을 향해, 김혜나(김보라)는 “몰라서 물어요?”라고 차갑게 되묻는다. 자신에게 쏟아진 날 선 질문을 태연하게 튕겨내고, 묻는 사람이 가진 권력을 가로챈 장면이었다.

7월 25일 개봉하는 <굿바이 썸머>(박주영, 2019)에서도 김보라는 궁금해 한다. 시한부인 현재(정제원)가 공부에 열중하자, 수민(김보라)은 “아픈 애가 왜 그랬지? 이유가 뭘까?”라며 골똘히 생각에 잠긴다. 영화는 수민의 입을 통해 ‘현재’를 질문한다. 죽음을 앞둔 ‘현재’가 어째서 그토록 ‘현재’를 중요하게 여기는지 말이다. “이 영화를 찍으면서, 제 자신에게 물어보게 됐어요. 내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시간은 현재일까 미래일까, 하고요. 지금 이 순간이 가장 중요하다고 말하는 현재와 달리, 수민이는 미래를 바라보면서 달리는 인물이잖아요. 볼 때마다 다양한 생각들이 떠오르더라고요.”

ⓒ김혜미

수민과 혜나, 또는 보라

김보라는 <SKY 캐슬> 종영 이후, 웹드라마 <귀신데렐라>(라이프타임채널, 2019)와 드라마 <그녀의 사생활>(tvN, 2019)까지 활발히 활동을 이어 왔다. 그런 가운데, <굿바이 썸머>는 <삼례>(이현정, 2016) 이후 꽤 오랜만에 참여한 스크린 주연작이다. 공개된 시기는 <SKY 캐슬>이 앞섰지만, 사실 캐스팅이 먼저 결정된 작품은 <굿바이 썸머>였다. “작년 한여름에 찍은 작품이에요. <굿바이 썸머>를 촬영하던 중에, <SKY 캐슬> 오디션을 봤어요. 수민이가 입는 교복 차림으로 오디션에 참가했죠. 신기하게도 <굿바이 썸머>가 끝나자마자 연달아 세 작품에 출연했어요. 일 년이 지나서 이제 <굿바이 썸머>가 개봉한다고 하니까, 기분이 좀 이상해요. 저한테는 말 그대로 ‘굿바이 썸머’인 느낌이에요.”

박주영 감독과는 이번 작품으로 처음 만났다. 시나리오를 읽는 동안, 머릿속에 영화가 자연스럽게 그려졌다. “딱 제가 원하는 장르였어요. 큰 파장 없이 잔잔하게 흘러가면서도 여운이 남는 드라마를 좋아하거든요. 늘 그런 작품을 보기만 했지, 직접 해본 적은 없어서 하고 싶었어요.” 2차 오디션을 거친 끝에 수민을 연기하게 되었지만, 애초에 김보라가 욕심을 냈던 배역은 따로 있다. “근데 사실 처음에는 수민이 아니라, 자전거 타는 소녀로 나온 주희(김예은)를 맡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어디에나 있을 법한 인물이면서, 특유의 자연스러운 분위기가 매력적이더라고요. 오디션 때는 수민과 주희를 포함해서, 극에 등장하는 여자 캐릭터들을 전부 연기했어요. 감독님도 고민하셨다고 들었는데, 배역이 결정된 당시에는 살짝 아쉽기도 했어요. (웃음)”

ⓒ김혜미

수민은 <SKY 캐슬>의 혜나를 연상시킨다. 두 인물 모두 고등학생인데다가, 똑똑하고 야무지다. 의아한 상황을 맞닥뜨렸을 때, ‘그런가보다’ 하고 넘어가는 대신에 곰곰이 따져 묻는다. 병에 걸렸다는 사실을 감춘 채 사랑을 고백한 현재에게, 수민은 “정말 이기적이다, 너”라며 화를 낸다. 그와 동시에 현재를 좋아하는 자신의 감정을 고민하고 솔직하게 말할 줄 안다. “처음엔 주어진 상황 자체가 마냥 슬퍼서, 수민이를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걱정스러웠어요. 그동안 유독 어두운 면을 지닌 인물들을 많이 연기해선지, 초반에는 감정이 크게 나오더라고요. 리딩 중에도 자꾸 눈물이 나는 거예요. (웃음) 수민이와 현재가 교실에서 대화하는 장면을 제일 좋아하는데, 가장 감정을 누르면서 찍은 장면이기도 해요. ‘10대답게’라고 할까요, 감독님은 너무 묵직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하셨어요.”

첫사랑과 시한부라는 ‘닳고 닳은’ 소재가 등장하지만, 영화 <굿바이 썸머>는 식상함을 비껴간다. 슬픔을 과장하지 않음으로써, 어느 여름에 머물렀던 소년과 소녀의 풋풋한 마음을 담아낸다. 대사 또한 은유적이고 생략된 부분이 많다. 특히 수민은 좋아하면서도 좋아할 수 없는, 복잡하고 미묘한 감정을 간접적으로 드러내야 했다. “슬픈 건 사실이지만, 아직 어리잖아요. 성인처럼 경험하고 느끼는 상태는 아니니까요. 모든 장면에서 현재를 생각하면서도, 지나치게 감정을 쌓지는 않으려고 노력했어요. 수민이와 혜나가 비슷한 면이 있긴 한데, 비교하면 수민이는 확실히 그늘이 없어요. (웃음) 혜나는 어린 아이가 경험하지 않아도 될 일들을 겪잖아요. 사연도 많고, 감당해야 할 상황도 어마어마하고요. 그런 차이가 있는 것 같아요.”

<굿바이 썸머>
<굿바이 썸머>

정제원 배우뿐만 아니라, 같은 반 친구로 등장하는 이건우, 이도하 배우 역시 비슷한 또래다. 사운드 때문에 에어컨 없이 아이스팩을 붙이며 버텨야 했지만, 더위를 제외하면 동료들과 즐겁게 호흡을 맞춘 현장이었다. “언젠가부터 촬영장에서 장난꾸러기 역할을 자처해요. 때로는 모두가 진지한 현장도 있는데, 그때도 전 일부러 장난치고 그래요. 다 같이 만드는 작품이니까, 좀 더 편안한 마음으로 지냈으면 싶어서요. 촬영 마치고 차에 돌아가면 바로 뻗지만요. (웃음) 이번 현장에서도 먼저 다가가는 편이었죠. 나만 편하다고 자연스러운 연기가 나오는 건 아니니까요. 대본 읽을 때도 정말 대화하듯이 주고받고, 서슴없이 지내려고 나름 보이지 않는 노력을 했어요. (웃음)”

<굿바이 썸머>를 시작으로 <그녀의 사생활>까지, 정제원 배우와는 두 작품을 함께했다. 실제 나이는 정제원이 한 살 연상이지만, 연기 경력으로 따지면 김보라가 한참 선배이다. 도움을 준 부분이 있으리라 짐작하자, 김보라는 오히려 자기 자신에게 집중했다고 말한다. “아무리 경험이 없다고 해도, 각자의 방식대로 준비해서 가지고 온 연기잖아요. 제가 터치할 수 없다고 생각해요. 다만 서로 감정이 맞아야 하니까, 제가 맡은 인물에 더 몰입하는 편이에요.” 수민이 되기 위해 집중한 덕분에, 촬영이 끝난 후에도 여운이 오래도록 이어졌다. “한동안 제원 오빠를 만나도 현재로 보이더라고요. 운동장에서 수민이가 현재에게 날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묻는 장면이 있잖아요. 그때 현재가 ”저는 수민이를 좋아합니다“라고 답하는데, 촬영할 당시에도 되게 슬펐어요. 오빠가 너무 해맑게 웃어서. (웃음) 아직까지도 그 장면만 보면, 뭔가 아련해지는 게 있어요.”

ⓒ김혜미

어느새 스물다섯, 15년차 배우

10살에 부모님의 권유로 연기를 시작했고, 크고 작은 작품을 거치며 이십대 중반을 맞이했다. 배우가 되겠다고 결심하기 이전에 “아, 오늘 촬영하러 가는 날이네” 하며 자연스럽게 연기를 생활로 받아들였다. 같은 일을 15년 동안 해온 소회를 묻자, 별로 깊이 생각해본 적은 없다고 하면서도 차분하게 말을 잇는다.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로 시작해서 다행이라고 여길 때도 있어요. 어려서 뭘 모르니까, 상처도 덜 받고 주변 상황에 타격도 덜 느끼고요. 일찍 씩씩해졌다고 해야 하나. (웃음) 지금 제 나이에 시작하는 친구들을 보면, 많이 힘들어하더라고요. 다른 사람들은 직업을 갖거나 뭔가를 하는데, 자신은 정해진 것 없이 불안하니까요.”

본격적으로 연기에 재미를 갖게 된 계기는 <천국의 아이들>(박흥식, 2012)이라는 작품을 만나면서부터였다. “처음으로 또래들과 연기한 현장이었어요. 스태프들과의 경계도 느슨했고요. 다 함께 만드는 느낌이었죠. 일한다기보다는 놀러가는 기분이었어요. 실제로 촬영 마치고 나서 친구들과 놀기도 했고요. 돌아가고 싶으면서도 돌아갈 수 없고, 제일 그리운 작품이에요. 지금 보면 ‘저기서 뭘 하는 거야? 연기를 하는 거야, 마는 거야?’ 싶어요. 요령도 없고 정말 막 하더라고요. (웃음) 가끔 오디션에서 그때 연기를 할 때가 있는데, 잘 안 돼요. 지금은 언제 들어가고 어떻게 끊어야 할지 아니까, 아예 다른 연기가 나오더라고요.”

나이를 먹고 경력이 쌓여감에 따라, 연기에서 느끼는 재미도 조금씩 달라진다. 요즘에는 자신과 닮은 인물을 만날 때보다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이 되어서 이야기하는 순간이나, 상상만 해오던 일들을 작품에서 할 때” 흥미롭다. “캐릭터와 제 자신을 별개로 가져가요. 대다수 배우들이 그렇듯, 저 역시 캐릭터를 통해 경험하지 않은 세계를 만나게 되니까요. 대신 인물이 하는 말이나 행동 하나하나에 관해 많이 생각해요. 이 아이가 왜 이런 행동을 할까? 왜 이렇게 말할까? 하고요.”

ⓒ김혜미

캐릭터를 분리해서 바라보는 동시에, 김보라는 누구보다 그간 자신이 거쳐 온 인물들에 애정을 느낀다. 여전히 ‘혜나’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데에도 부담보다는 자부심을 갖는 듯했다. “그만큼 배역을 잘 소화했다는 뜻이기도 하니까요. 그때 제 모습을 인상 깊게 보신 분들이 해주시는 말씀이니 감사하죠. 저도 혜나를 좋아했고요. 종종 제가 연기한 인물들이 미움을 살 때가 있어요. <SKY 캐슬> 때는 혜나를 좋아하는 사람과 싫어하는 사람으로 나뉘기도 했잖아요. 오그라드는 말일 수도 있지만, 나쁜 말을 들으면 ‘혜나가 너무 속상하겠다’는 생각이 드는 거예요. (웃음) 캐릭터와 저를 나누어 보면서도, 왠지 모르게 ‘이런 이야기는 혜나가 몰랐으면 좋겠다’ 싶었죠.”

그만큼 혜나는 감정적으로 소모가 큰 인물이기도 했다. 지난 5월 종영한 <그녀의 사생활>에 합류한 것은 혜나에 머무르지 않기 위한 도전이었다. “잊고 싶지는 않았지만, 이제 빠져나오는 편이 좋을 것 같더라고요. 이전까지는 접해본 적 없는 성격의 인물이라 궁금했고요. 근데 힘들었어요. 성인 역할을 제대로 연기한 건 처음인데, 학생으로 나올 때와는 달리 준비할 것들이 정말 많더라고요. (웃음) 옷도 많이 갈아입고, 장신구도 계속 바꾸고, 운동화 대신 구두를 신어야 하고요. 새삼 박민영 언니가 대단해 보였어요. (웃음) 이게 성인 배우가 되는 기분인가, 싶으면서 초반에는 적응하기 어려웠어요. 평소 제 스타일과 너무 달라서 어색하기도 했고요.”

사실 <그녀의 사생활>에 출연하기로 마음먹은 결정적인 이유는 성인 역할이어서가 아니라, 극중 엄마로 출연하는 김선영 배우 때문이었다. “작품을 볼 때마다 어쩜 저렇게 자연스럽게 연기하시지? 하며 감탄했어요. 가까이에서 선배님을 꼭 뵙고 싶더라고요. (웃음)” <SKY 캐슬>로 대중에게 이름을 각인시키며, 배우로서는 큰 기회가 찾아온 시점이다. 주변에서 ‘성인 배우’로 발돋움해야 한다거나, 유명세를 증폭시킬 만한 작품을 골라야 한다는 압박이 들려올 법도 하다. 하지만 김보라에게서는 조바심보다는 배짱 두둑한 균형감이 느껴진다. 작품을 선택하는 기준을 묻자, 무엇을 고려하고 또 고려하지 않는다기보다는 ‘할 수 있으니까 했다’는 답이 돌아왔다. “저는 지금까지 거의 모든 작품에 오디션을 통해서 참여해왔어요. 단순하게 말하면 ‘붙었으니까’ 했던 거예요.”

ⓒ김혜미

실제 나이보다 어린 역할을 연기하는 상황이나, ‘당돌하고 뻔뻔한’ 이미지에 대해서도 담담히 받아들인다. 전작에 기대어 비슷한 캐릭터를 연기하게 된다고 해도, 시간이 지나서 경험하면 나름의 의미가 있을 거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생각해보면 스무 살 이후로 죽을 때까지 성인인 거잖아요. 교복 입는 순간을 즐기려고 해요. 학생이라고 해서 다 똑같은 인물도 아니고요. 이를테면 혜나를 5년 뒤에 연기하면, 이전과는 다르게 표현할 테니까요. 오히려 과거 연기와의 차이점을 발견하고, 성장한 모습을 들여다볼 수 있지 않을까요? 성인 역할에 대한 욕심은 없어요. 지금 당장 안 맞는 옷을 억지로 입고 싶지도 않고요. 제가 그렇게 보인다면, 지금 그렇게 보이는 거니까요. (웃음)”

한편, 김보라는 단편영화를 비롯한 독립영화에도 꾸준히 관심을 갖고 참여해왔다. <굿바이 썸머> 역시 그 과정에서 만났던 작품이다. <삼례>를 통해 독립영화 현장에 매력을 느끼게 된 이후, 스물두 살 무렵부터 ‘필름메이커스’에 프로필과 영상을 돌리며 본격적으로 오디션을 보러 다녔다. 다양한 배역을 경험하고 싶다는 마음과, 부족한 연기 실력을 쌓겠다는 목표가 결합된 결과였다. “물론 촬영할 때는 힘든데, 하고 나면 만족감이 커요. 함께 영화를 만든다는 느낌이 이런 거구나, 싶고요.” 김보라는 단편영화의 가장 큰 매력으로 연출의 개성을 꼽았다. 짧은 시간 안에 자유분방하게 드러나는 개성과 열정은 배우에게도 큰 자극이 되었다. “‘이것만 하고 안 해야지’ 하다가도, 어느 순간 또 찾아보고 있더라고요. ‘필름메이커스’를 즐겨찾기 해두었거든요. (웃음) 최근에는 명지대학교 영화과 작품에 오디션을 봤어요. 곧 촬영할 예정이에요.”

<삼례>
<천국의 아이들>

생각 많은 보라의 일상

배우는 일면 불안을 원동력 삼아야 하는 직업이다. 실력과는 상관없이, 익명의 무수한 사람들에게 평가받고 소비되는 입장에 놓이기도 한다. <SKY 캐슬>은 김보라를 배우로서도 인간으로서도 한층 단단하게 만들었다. 난생 처음 실시간 검색어에 이름이 오르내리면서, 원치 않을 때도 눈길을 끄는 상황이 벌어졌다. 극중 인물인 혜나와 김보라를 동일시하는 시선에서 갑갑함을 느끼기도 했다. “나라는 사람을 모르면서 어떻게 겉모습만 보고 판단할까? 왜 하나만 보고 전부 안다고 생각할까? 그런 스트레스가 정말 심했어요.” 그때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준 존재는 가족과 팬들이었다. “부모님과 언니들 역시 자기 영역에서 힘들어하는 부분이 있더라고요. 속상하긴 하지만, 내가 선택한 직업이니까 스스로 감내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를 믿고 응원해주는 팬들을 보며 버티기도 했고요. 세상사람 모두 내 편이 되었으면 하는 마음보다 그분들을 오래 만나고 싶은 마음이 커요.”

실제로 김보라는 블로그와 인스타그램 등 다양한 창구를 통해 팬들과 소통한다. 직접 찍은 필름카메라 사진은 수준급이고, 소소한 일상이 기록된 영상을 편집해서 공유하기도 한다. “고등학생 때부터 외할머니 사진을 찍어드렸는데, 어느 날 문득 색다른 방법으로 담고 싶어지더라고요. 미놀타 X-700을 꽤 오래 사용했어요. 요새는 중고로 구입한 똑딱이 반자동 카메라를 써요.” 카메라 앞에 서는 일을 하다가, 위치를 바꾸어 카메라 뒤에서 주변을 바라보면 어떤 기분일지 궁금했다. “이상하게 제 카메라로 절 찍는 건 싫어요. 상대방이 가진 고유한 분위기와 습관 같은 것들이 담길 때 재밌더라고요. 필름이다 보니 아까워서 좀 오래 지켜보며 기다리가다 찍는 편이에요. 요즘에는 풍경을 많이 찍어요. 하늘이나 산 같은 자연이 아니라, 거리에 사람들이 지나가는 장면 같은 거요. 친구들을 찍고 싶은데, 걔네는 자꾸 포즈를 취하더라고요. (김)새론이나 (이)수현이랑 있을 때도, 가끔 몰래 찍어요. 포즈 취하면 카메라 내려놓고. (웃음)”

배우 김새론, 가수 이수현(악동뮤지션)과는 소문난 절친 사이다. <그녀의 사생활> 현장에 김새론과 이수현이 보낸 커피차는 SNS에서 화제가 되기도 했다. “원래 <SKY 캐슬> 때부터 보내준다고 했는데, 당시에 혜나의 죽음을 둘러싸고 한껏 이목이 집중된 시기였거든요. 제가 촬영장에 나오느냐 마느냐 자체만으로도 ‘스포일러’가 되는 상황인 거죠. 그래서 이번에 새 드라마를 시작했을 때 보내줬어요. 근데 막상 와서 보니까, 제 응원보다 자기들 홍보에 더 열심이더라고요. (웃음) 수현이는 라디오 ‘수현의 볼륨을 높여요’를 진행 중이었고, 새론이는 <연애플레이리스트> 시즌4 공개가 얼마 남지 않았을 때였거든요. 그 와중에 메인 현수막에는 제가 예쁘게 찍어준 사진을 썼더라고요. (웃음)”

ⓒ김혜미

김보라의 시야에 담긴 인물들은 저마다 자연스럽고 사랑스럽다. 텔레비전 화면이나 잡지에 실리지 않은 친구들의 모습을 포착하고, 언니와 떠난 여행에서 작은 조각들을 모아 영상을 만든다. 언뜻 사람 참 좋아하는 사람이구나 싶었는데, 예상외의 대답이 돌아왔다. “그렇게 보여서 다행인 것 같아요. 사실 이 일을 오래해선지, 낯선 사람을 의심하는 버릇이 있어요. ‘내가 이 사람하고 굳이 왜 친해져야 하지?’ 라며 경계하기도 하고요. 사람을 좋아하지는 않아요. 대개 같은 사람을 오래 만나죠. 스트레스 풀 때는 친구들을 만나기보다는 혼자 시간을 보내는 편이에요. 걱정거리가 있으면, 혼자 삭히거나 해결하고요. 내 일을 어떻게든 ‘과거’로 만든 다음에 이야기해요. 고민이 끝났거나, 적어도 끝이 보일 때쯤. (웃음)”

가끔 친구들은 서운함을 토로하기도 한다. “얼마 전에는 친한 동생을 만났는데, 제 지난 연애를 뒤늦게 알더니 충격 받더라고요. 그때는 왜 아무 말도 안 해줬냐고요. (웃음) 근데 10년 지기인 친구도 작년에야 알았나? 솔직히 말해서 나와 그 사람의 일인데, 누구한테 알려서 뭐하나 싶었거든요. 그만큼 워낙 제 이야기를 안 하는 편이에요.” 생각 많고 입 무거운 김보라의 스트레스 해소법은 ‘정리’다. 혼자 쉴 때는 영화를 관람하거나 유튜브에서 ‘먹방’을 찾아보기도 하지만, 뭐니 뭐니 해도 빨래를 최고로 꼽는다. 특히 청바지를 손빨래 할 때가 제일 속 시원하다. “정말 상쾌해요. 눈앞에서 더러운 물들이 싹 빠지는 걸 보면 행복하거든요. 아, 분리수거도 좋아해요! 누군가 이미 해놓은 것도 다 꺼내서 다시 정리해요. (웃음) 작은 비닐이나 스티커까지 말끔하게 제거하죠. 눈앞에서 쓰레기가 착착 정리되면, 머릿속도 좀 가뿐해지고요.”

ⓒ김혜미

인터뷰 내내 두터운 생각을 돌고 돌아 나온 말들이 이어졌다. 김보라는 연기할수록 “나는 나”라는 사실을 깨닫는다고 했다. 언젠가부터 롤모델을 찾기보다는, 자신의 연기를 돌이켜보며 발전가능성을 질문한다. “어느 작품에서든 최대한 맡은 인물을 잘 소화해내는 것이 제 역할이잖아요. 과연 이 다음에는 어느 정도 풀어낼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더 잘할 수 있을까, 하는 고민을 해요.” 스스로 “연기를 잘하는 배우가 아니라고 생각한다”는 말에는 겸손보다 굳은 의지가 깃들어 있다. 지금까지 해온 것보다 앞으로 훨씬 더 잘하고 싶은 욕구, 지문과 대사로 이루어진 세계를 현실에 보다 가깝게 끌어오려는 욕심이 그 안에서 촘촘히 맞물린다.

김보라는 인사말처럼 건네는 칭찬보다 날카로운 비판을 바란다. “어떤 인신공격이 아니라, 실력 면에서 모자란 점을 지적받고 싶어요. 잘못되거나 미진한 부분을 고치려고 노력하면, 더 나아질 수 있을 테니까요. 어디가 안 좋은지 모르는 상태로 계속하기보다는, 조금씩 바꿔나가고 싶은 마음이죠. 촬영하면서도, 촬영을 마치고 나서도 계속 질문해요. 이렇게 표현하면 너무 과한가? 아니면 부족한가?” 김보라가 사는 세계에서는 종종 적절하다는 말과 탁월하다는 말이 동의어로 사용된다. 과함과 부족함 사이 어딘가에 훌륭함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김보라는 질문한다. 다른 누군가가 아닌, 자기 자신을 향해 끊임없이 물음표를 던진다. 김보라가 찾아낼 적절하고도 탁월한, 그만의 멋진 대답이 기다려진다.

ⓒ김혜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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