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안과 환상, 존재의 근원
<산나리> <나르시스의 죽음> 김응수
글 김선명 사진 이영진 / Interview / 2019-07-07

김응수 감독의 작업실은 충주에 있다. 충주호가 바로 내려다보이는, 가구 수가 많지 않은 동네다. 그의 전작 <물속의 도시>(2014)의 공간이기도 하다. 내가 처음 김응수 감독의 작업실을 방문한 때는 <과거는 낯선 나라다>(2008)부터 <물의 기원>(2010), <아버지 없는 삶>(2012), <물속의 도시>(2014)까지 이어지는 일련의 작품들을 본 뒤였다. 과거를 대하는 그의 태도에 깊이 흥미를 느껴 당시 준비 중이던 학위 논문의 주제로 그를 염두에 두고 있었다. 작업 중인 영상을 보고 피드백을 해주지 않겠냐는 그의 제안에 선뜻 그러겠다고 하고 몇 편의 미완성 작품들을 감상했다. 그때 처음 <우경>(2017)과 <오, 사랑>(2018)을 봤다. <우경>은 약간의 후반 작업만을 남겨놓은 상태였고, <오, 사랑>은 아직 가편본일 때였다. 앞서 네 편의 그의 전작들을 반복해서 보며 어느 정도 그의 관심사와 말하기 방식에 익숙해졌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 두 작품은 내 예상을 완전히 빗나가고 있었다.

논문을 써야 하는 입장에서 어느 정도의 개념화는 필수적이다. 그러나 이어진 몇 번의 재방문과 피드백을 주고받는 과정에서 아직은 내가 저 영화들을 개념적으로 정리할 단계가 아니라는 생각을 떨칠 수 없었다. 영화 자체가 필사적으로 그런 개념들을 속수무책으로 만들어 버린다. 흔히 김응수 감독을 에세이 영화를 만드는 이로 부르지만, 에세이 영화라는 말이 단지 극영화와 다큐멘터리 영화의 일반적인 모델로는 부를 수 없는 모든 부스러기들을 뜻하는 말이 되지 않기 위해서 더 섬세한 이론화가 필요하듯, 그를 향한 이런 호명은 그의 영화들에 대한 비평의 어려움을 고백하는 수준에 머무르는 경우가 많다. 나 또한 결국 다른 주제로 논문을 완성했고 그의 영화에 대해서는 아직 탐색 중이다.

이전 작업실 방문에서 봤던 미완성 영상들이 작년과 올해 사이에 모두 완성되어 공개되었고, 이번 서울아트시네마의 ‘김응수 신작전 – 초현실의 한국’과 국립현대미술관의 ‘디어시네마: 오래된 이미지, 다른 언어’를 통해 극장에서 다시 한 번 관객들을 만나게 되었다. 그가 자주 하는 말이 있다. “이가 없으면 잇몸으로.” 이런 그의 태도가 계획의 어그러짐을 두려워하지 않고 우연성을 향해 열리는 모험을 감행하게 만든다. 세월호, 남북관계, 미투(me, too) 등 현재 한국 사회의 중요한 문제를 다룬 최근작들에서 이런 그의 태도는 사태에 대한 객관적 분석이 아닌, 사태와 함께 무너지고 변화하는 개인의 주관적 고백의 작품을 가능하게 했다. 인터뷰는 작년 말에 공개된 <산나리>(2018)와 이번에 처음 공개되는 <나르시스의 죽음>(2019)에 집중해 진행했다.

 

 

 

2017년 11월 인디포럼 월례비행에서 <우경>을 처음 공개한 이후로, 신작 <나르시스의 죽음>에 이르기까지 1년 반 정도밖에 안 되는 기간에 무려 5편이나 되는 작품을 내놓았다. 일반적으로 저예산 독립영화들이 제작 및 상영되는 코스를 거치지 않고 VOD 서비스를 비롯해 보다 자유로운 통로로 영화를 공개하는 방식도 독특하다.

올해 내가 영화 상영 복이 터진 것 같다. 1월에 서울아트시네마에서 <우경>을 상영한 이후로 이번 신작전과 국립현대미술관 디어시네마 기획전을 통해 <나르시스의 죽음>까지 상영하게 되면서, 언급한 그 5편이 모두 극장에서 관객을 만날 기회를 얻었다. 극장에 자료를 보낼 때 헷갈려서 잘못 보낼 정도다. 공개 방식에 대해서는 정답이 없는 것 같다. 예를 들어 내가 이 영화를 잘 키우고 싶다고 치자. 그래서 영화제에 출품하고 거기서 관심을 받으면서 개봉지원 프로그램 등을 통해 지원 받고 또 배급 해줄 사람을 찾고. 이 모든 게 다 운 좋게 이루어지더라도 그건 최소 1년, 혹은 2년이 걸리는 일정이다. 1, 2년이면 뭐가 어떻게 변할지 모르고 그 사이 다른 즐거운 일도 많을 텐데. 그건 내가 사는 리듬하고 안 맞는 것 같다. 영화제의 제작지원 피칭도 그 자체를 거부하는 건 아니지만 너무 힘든 건 하지 않는다. <산나리>나 <나르시스의 죽음> 같은 영화는 돈 받으려고 1년 노력하다보면 생각이 다 없어진다. 이런 건 그때 그 느낌으로 빨리 찍어야 한다. 그 시간의 그 공기, 그리고 그때의 내 감정까지 포착해야 하기 때문에 피칭 기획서를 써서 찍을 수 있는 영화가 아니다. <오, 사랑>과 <초현실>(2018) 같이 세월호를 다룬 작품들은 4월 그 즈음에 빨리 공개하면 좋을 것 같았다. 그게 어떤 형식이든 간에 말이다. 그럼 어떻게 해야 될 것인가 생각하다 보니까 우연성에 맡겨버리는 게 제일 좋더라. 그중 어떤 경우는 아는 프로그래머나 영화를 좋아하는 사람들한테 영화를 먼저 주고, 상영할 기회를 그 사람이 만들 수 있을지 던져본다. 그렇게 혹시 어떤 사람이 좋아해서 기회가 열리면 거기서 그냥 출발한다. 누구여도 상관없다. 큰 조직이든 소박한 주체든. 영화도 자기 삶을 찾아 떠나가는 거 아니겠나. 나를 떠나 사람들한테 보여지고 거기서 누군가와 교감하여 선택받는 방식을 택하는 거다.

<우경>
<오, 사랑>

공개 방식의 변화와 함께 소재 측면에서도 변화가 보인다. 세월호 문제를 다뤘던 두 작품과 현재 진행 중인 남북 관계를 다룬 <산나리>, 그리고 ‘미투(me, too)’에 대해 말하는 <나르시스의 죽음>까지. 최근 작품들은 현재 한국 사회에서 가장 많은 사람들이 영향 받고 관심 갖는 화두에 집중한다.

어떤 소재나 상황이 돌출했을 때, 갑자기 그게 저 속에 있는 내 문제 같을 때가 있다. 관찰하고 분석하는 차분한 컨셉으로는 접근하지 못하고 여기 잡지 제목 ‘리버스’처럼 거꾸로 그 상황이 내 존재를 뒤흔드는 경우가 있다. <산나리>는 그 자체가 바로 나인 경우다. 우리 세대, 반공 이데올로기 그 자체. 임권택 감독이 만든 반공 영화들을 초등학교 때부터 수없이 보며 자란 세대 아닌가. 이런 건 나를 분리시킬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다시 말해 그 상황을 객관적으로 보며 책도 읽고 리서치 해서 사회적인 문제를 나만의 독특하고 예리한 시선으로 정리해 얘기할 수 있는 그런 문제가 아닌 거다. <나르시스의 죽음>도, 영화 맨 처음에 ‘인류역사의 가장 큰 사건’이라는 문구를 썼거든. 보다 거대한 체제의 변화를 얘기하는 입장에서 보면 저 말이 장난으로 보이겠지만 내가 보기에는 아니다. ‘나르시스의 죽음’이 훨씬 더 센 사건일 수 있다. 정말 나르시스들이, 그런 주체들이 죽는다면 말이다. 실제로 죽어야 하고. 90년대에는 기형도 시인의 한 문구처럼 개인의 중요성에 대해 많이 얘기했다. 우리 하나 하나가 얼마나 위대한지. 그때는 우리가 너무 각각에게 소홀했으니까, 그게 맞는 흐름이었다. 그런데 이게 지속되다보니 지금은 굉장히 위험한 지경에 이르렀다. 나를 다른 사람들하고 구분할 수 있는 방법이 자기 자신을 계속 견고하게 만드는 것밖에 없지 않나. 우리 개개인이 얼마나 능동적이고 위대한지 강조하는 게 지금은 폐쇄적인 원을 그린다고 생각한다. 쉽게 얘기해서 이를 갈지 않나. 이게 원한이나 그런 문제가 아니다. 실제로는 자유롭지 않고 모든 건 막혀 있는데, 몇 개의 자유를 갖고 그 폐쇄된 원 속에서 자기를 정확하게 구별 지어 견고하고 아름답게 만들어내지 않으면 살 수가 없는 거다. 나도 그런 이데올로기를 갖고 살아왔다. 영화를 만들어도, 어떻게 내가 남이 볼 때 정말 대단하고 범접할 수 없는 그런 사람으로 보이도록 만들 수 있는가. 그게 어떻게 보면 나를 일차적으로 지탱해온 힘인 거지. 그런데 그게 너무 강하면, 나를 독특하고 의미 있고 가치 있는 것으로 만들기 위해 내 스스로 만든 이데올로기가 타인과의 관계를 다 규정해버리는 것으로 ‘화(化)’하고 만다. 그것 속에서 폭력이 생기는 거다. 나는 여자 입장은 잘 모르니까 남자 입장에서 미투를 보면서 “아, 이게 존재론적으로 나를 무너뜨리는구나.” 하는 충격이 컸다. 내가 견고하게 쌓아왔던 나라고 생각했던 것들이 뭘까. 남자는 어때야 한다, 부터 출세를 해야 한다는 그런 것들이 나도 모르게 이 안에 스며져 있고 그것에 의지해서 삶을 만들어 온 거다. 그런 규정이 버겁고 고통스러우면서도 또 사실 그 환상을 가지고 삶을 지탱하는 이중성이 있다. 그런데 존재론적으로 그런 건 처음부터 없고 그냥 불안만 있을 뿐이라면? 그 불안을 해소하기 위한 환상이 삶을 규정하는 거라면?

ⓒ이영진

영화에도 구획이나 구분이라는 게 원래는 불가능한데 편의상 하는 거라는 말이 나온다. 주체라는 것도 견고하게 하나로만 존재하는 게 아니고 불안을 내재한 채 유동하는 건데, 이 불안을 해소하며 삶을 지탱하게 만들었던 소위 ‘남성성’이라는 환상이 이번 미투에서 부각된 것으로 보는 것인가?

그렇다. 다만, 우리의 성역할이 사회적으로 교육을 통해 형성된 결과라는 식으로 딱딱하게 오해되지 않으면 좋겠다. 애초에 ‘남성성’, ‘여성성’이라는 개념이 없다는 것을, 말에 의해 규정되기 전의 어떤 상태를 보여주고 싶었다. 내가 포착하거나 발견할 수 있던 것들 중에 말이나 글 이전의 그 상태를 가장 잘 보여주는 게 영화 내내 지속적으로 등장하는 그 숲이었다. 처음 그 숲을 봤을 때 정말 대단하다고 느꼈다. 너무 황당하게 장대하지도 않고, 그렇다고 너무 지저분한 것도 아니고, 단아하게 깨끗한 것도 아니고. 규정할 수가 없지 않나. 저 숲의 상태를 내가 말로 정리하려고 하는 순간 숲을 살해하는 것이라고 느꼈다. 말이 담아낼 수 없는 느낌이 있다. 내가 <나르시스의 죽음>에서 궁극적으로 하려는 게 어떤 개인을 향한 비난이나 사회에 던지는 교훈 같은 게 아니다. 그저 그게 정말 나한테 미친 영향을 표현하려는 거다. 내가 생각했던 내 존재의 환상이라는 게 어떻게 스르르 무너져 내리는가. 김응수 너는 어떤 사람이어야 해, 어떤 감독이어야 해, 남자는 이래야 해 같이 내가 개념으로 축조한 것들, 사회에서 원하는 그런 것들이 무너졌을 때 그 어떤 개념이나 말로도 표현이 안 되는 그 상태를 그나마 이 숲은 보여줄 거라는 확신이 있었다. 예전에 <물의 기원>(2010)을 찍었던 곳과 같은 숲이다. 그땐 무성한 여름이었고 이번엔 3월 초, 초봄도 아니고 겨울인지 봄인지도 모르는 그런 시기에 찍었다. 정말 다르지 않나. 그 숲이 정말 크다. 이쪽 면이 다르고 저쪽 면이 다르다. 아무튼 전체적으로 내가 느낀 것들을 보증해줄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다. 영화를 본 관객이 “내가 생각한 나 이전의 나는 뭘까.”라는 걸 솔직하게 생각해볼 수 있다면, 그 숲을 보고 “아, 나도 저 상태이겠구나.” 라고 제시해줄 수 있을 거 같아서 열심히 찍었다. 그 숲을 못 찍었으면 영화가 완성되지 못했을 거다.

<나르시스의 죽음>
<나르시스의 죽음>

이제 <산나리> 얘기를 해보자. 감독님의 거주 및 작업 공간이 있는 충주 지역의 반공위령탑들이 중요하게 부각된다.

이름은 다르지만 그런 비슷한 위령탑들이 지역마다 한 시군에 보통 열 개 씩은 있더라. 이명박, 박근혜 정권 때 자유총연맹에서 많이 세우기도 했고, 영화에는 사실 많이 나오지 않고 대표적인 거 몇 개만 넣었는데 전국적으로 검색해보면 그런 게 쫙 깔려 있다. 이 화창한 5월에 저렇게 좋은 공간을 점유하고 우리를 내려다보는 반공위령탑이 너무 섬뜩했다. 6.25부터 시작해서 한국 현대사를 관통한 이념의 대립과 서로 죽이고 죽였던 문제들이 떠오르면서 말이다. 게다가 반대쪽은 지워진 채로 저렇게 당당히 서 있지 않나. 반대쪽은 항상 말해서는 안 되는 것이었고 정말 죽어라고 노력해서 쟁취해내야만 이런 위령탑 하나 세울 수 있었다. 광주가 민주화운동으로 인정받기까지 얼마나 긴 세월이 필요했나. 그런데 반공위령탑은 전국 각지에 쫙 깔려 있으니 우리가 얼마나 불균형 상태에 있는 건지. 그러면서도 우리가 평화를 얘기하는 게 굉장히 아이러니했다. 그래서 거기서 시작한 거다.

 

1부에 해당하는 인터뷰의 주인공 윤영상 씨는 어떻게 알게 된 건가?

검색을 통해 알게 됐다. 그 분이 평화운동을 나름 열심히 하신 분이라고 해서 만났다. 최근에 북한학 박사 학위를 받았는데 그 논문도 읽어봤다. 논문은 ‘남북평화를 위한 선순환 구조’ 식의 제목인데, 남북문제의 세 번의 격동기마다 어떤 우여곡절이 있었고 왜 틀어졌는지, 그런 문제에 관해 명쾌하게 쓴 글이었다. 처음 알고 나서 한 달 후에 만나 인터뷰 했다. 여기서 우연성의 문제가 개입되는데, 인터뷰를 그 사람의 공간으로 가서 할 것인가, 내 작업실에서 할 것인가, 아니면 카페에서 할 것인가 고민이 되더라. 그러다 내가 갖고 있던 반공위령탑에 대한 느낌과 만나면서 팍 간 게, 그렇게 반공위령탑 앞에서 인터뷰를 진행한 게 영화를 딴 데로 흘러가게 만든 거다. 똑같은 얘기일 수도 있지만 얘기의 결이나 느낌이 완전히 달라졌다. 정책의 관점에서 어떻게 평화를 만들어 가야 하는지의 문제가 아니고, 우리도 모르게 가지는 우리 존재의 문제, 무의식의 문제, 이데올로기의 문제가 확 엄습한 것이다. 사실 그 분을 반공위령탑 앞으로 모셨을 때 화를 내면 어떡하나 걱정했다. 나는 박사고 남북정책이나 평화에 관해서 일목요연하게 사람들에게 전달할 수 있는데, 얘기가 곁길로 빠지게 된 상황이니까. 그런데 다행히 그 분이 바로 거기서 자기 감정을 섞어 얘기 하더라. 그래서 “아, 딱딱한 얘기로 진행되지는 않겠구나.” 생각하면서, 그럼 영화가 어디로 갈 것인가 계속 고민하며 찍었다. 그러다보니 평화는 어떻게 이루어질 것인가에 대한 그의, 그리고 나의 일목요연한 주장이 아니고 어떻게 보면 구태의연한, 구태의연하지만 그걸 떠나서는 아무것도 얘기할 수 없는 우리의 반공 이데올로기로 이어진 거다. 어떤 정책이나 비전처럼 항상 새로운 걸로 색칠하려 하는 것도 다 이 무시무시한 구태의연함을 우리가 극복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정도의 차이가 있고 각자가 서 있는 위치의 차이는 있겠지만 내가 반공 이데올로기에 대해 모르고 감지를 못한다고 영향을 안 받는 게 아니다. 예를 들면 기자님은 광주 이후에 태어나지 않았나. 반공 교육을 받은 세대도 아니고. 그래서 굉장히 자유로운 세대인 것 같지만 사실 그렇지 않다는 거다. 이게 훨씬 무서운 거다. 결국 우리 존재 자체를 규정하는 태생적인 부정성에 대한 얘기가 됐다.

<산나리>
<산나리>

1부 인터뷰의 촬영 방식이 독특하다. 인터뷰이가 화면 중심에서 자꾸 비켜서 있고 심지어 포커스 아웃될 때도 많다.

처음에는 보통 방식대로 찍었다. 물론 처음에도 공간이 화면 안에 많이 잡히긴 하는데, 그건 공간 속에 있는 그 사람을 찍는 거기 때문에 그렇다. 쉽게 얘기해서 큰 공간을 찍는다 생각하고 그 공간 안에 그 사람이 있는 우연성이 담길 뿐이지 그 사람을 찍는 건 아닌 거다. 그 사람만 찍자면 연구실에서 찍으면 되겠지. 그러다 조금 지나서는 그것조차 뭉개버렸다. 처음부터 계획했던 건 아니다. 쇼트를 바꾸면서 잠시 쉴 때 인터뷰이한테는 얘기하지 않고 촬영하는 사람하고만 얘기하면서 저 사람을 포커스 아웃시켜버리고 그냥 이 공간의 공기를 담아보자고 결정한 거다. 내가 촬영 현장에 있어야 하는 이유가 이처럼 시시각각 머릿속에 이 상황을 어떻게 끌고 가야 하는지 계속해서 고민하면서 여러 실험들을 해보기 위해서다.

 

2부는 양수리 영화 세트장으로 간다. 작년 4월 판문점 회담 이후, 양수리 영화 세트장에 마련된 가짜 판문점에서 시민들은 남북 정상이 만나는 장면을 따라하고 촬영한다. 거기를 찍어야겠다고 결정한 이유는 무엇인가?

사실 작년 판문점 회담 때 <나르시스의 죽음>을 편집하고 있었거든. 그래서 거길 못 갔다. YTN에서 더 잘 찍을 수 있는 그런 화면을 담으려고 했던 건 아니고, 그 어딘가에서 벌어지는 상황들, 경찰에 의해 막혀 있고 사람들이 분주하게 오가는 그런 걸 찍고 싶었다. 나한테 보여지는 조건 속에서의 상황을 잘 찍으면 그게 영화적인 사건이 된다. 그걸 못 찍어서 아쉬워하고 있는데 딱 생각이 나더라. “아, 세트가 있구나.” 그래서 거기서 하루 찍으면 되겠다고 생각했다.

 

거기 사람들이 갈 거라고 예상한 건가?

검색을 했다. ‘판문점 세트를 찾은 시민들’, 이렇게 기사가 떴더라. 그래서 저기 가서 찍으면 되겠구나 생각하고 간 거다. 저 세트장에서 사람들은 무엇을 실행해보는가. 저들이 실행하는 건 단순 해프닝, 가짜인가. 그렇게 볼 수는 없는 것 아닌가. 우리는 원하지 않으면 실행도 모방도 안 하지 않나. 이게 굉장히 웃기게 보일 수도 있지만 난 그게 굉장히 강렬했다. 어쩔 수 없이 저렇게 밖에 원할 수 없는 게. 우리는 진짜 현실 속에 사는 건가 아니면 비현실 속에 사는 건가. 우리는 진짜 평화로운 현실을 사는 건가 아니면 전쟁을 생각하면 다 미쳐버리기 때문에 평화롭다고 생각하고 사는 건가.

ⓒ이영진

중간에 따라가는 중국인은 누구인가? 따로 인터뷰를 하진 않았나?

나도 모른다. 중간에 사라져버렸다. 처음에 그 사람들이 너무 이상하더라. 뭘 저렇게 열심히 찍는지. 라이브로 개인 방송을 하는 것 같았는데 아마 방송에서 이런 얘기를 하지 않았을까. 한국인들한테 이 금을 넘어가는 게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는 것일까. 의아하고 신기하고 궁금하기도 하겠지. 근데 재밌는게, 그 남자가 선을 넘어가고 나서 진짜 얼굴이 빨개진다. 영화에서 느끼지 못했나? 진짜 자기가 흥분한 거다. 그렇게 혼자 울컥하는 거 보면 비슷한 뭐를 갖고 있는 사람인가 싶기도 하고. 중국에 그런 게 뭐가 있을까. 근데 사실 모른다. 중국에서 왔는지 대만에서 왔는지. 하여튼 너무 열심히 찍길래 궁금해서 카메라에 담았다. 그 사람을 발견하면서 영화가 좀 더 풍성해졌다. 그 사람을 통해 내가 뭔가를 또 바라보게 되니까. 거기서 하루 종일 있었는데 별 일이 다 생기더라.

 

선을 넘고 악수하고 사진 찍는 많은 사람들과 방금 얘기한 개인 방송 커플, 이 두 집단과 또 결이 다른 집단으로 교복 입은 학생들이 있다. 학생들은 인솔자의 지시에 따라 어떤 영상을 찍고 있다. 이 세트장 시퀀스 마지막에 그 학생들이 탱크 주변에서 장난 치고 사진 찍는 장면은 앞서 다른 두 집단의 모방 혹은 실행과는 맥락이 달라 보인다.

그 장면에서 여자애들 둘의 웃는 소리가 히스테릭하다고 해야 할까. 어찌할 줄 모를 정도로 즐거운 웃음, 그야말로 자지러지다시피 웃으면서 난리가 나는 부분이 난 참 재밌고 좋았다. 이 심각하고 엄숙하면서 환각적이기까지 한 분위기를 깨는 돌출적인 웃음. 그거에 비해 마지막에 남학생들이 탱크 위에 올라가서 사진 찍는 건 훨씬 정리된 듯한 부분이 들긴 하지만 어쨌든 그런 생각이 들더라. 아, 내가 저 나이 때에 비해서는 너무 부럽다. 참 부럽다. 저런데 올라가면 안 된다는 거부터 시작해서, 나는 그러지 않았지만 우리 윗세대만 해도 저 나이 때는 6.25 기념식 때마다 혈서를 썼던 분들인데... 그 해방감이 참 좋았다. 그리고 저 친구들이 정말 그런 공포 없이 살았으면 좋겠다, 그렇게 될 것이다, 라는 내 나름대로의 따뜻한 희망까지. 우리가 어떤 논리에 맞춰서 영화를 찍는다면 이런 장면이 들어갈 자리가 없을 거다. 영화가 고루해지지 않는 방법이라 생각한다. “아, 저 장면 정말 좋다. 저렇게 됐으면 좋겠다.” 하고 내가 그냥 좋아서 찍은 거다.

 

3부에 해당하는 서울역 시퀀스의 처음과 끝을 동일한 한 남성 어르신으로 여닫는다. <물속의 도시>(2014)에서도 충주호 유람선에 탑승한 한 남자를 인터뷰 없이 화면에 담은 적이 있는데 그 장면이 생각나더라.

맞다, 나도 떠올렸던 부분이다. <물속의 도시>의 그 아저씨와 이 아저씨가 비슷하게 생기지 않았나? 내가 그런 얼굴을 사적으로 좋아하나 보다. 얼굴이라는 게, 뭐라 그럴까, 세월의 풍상도 있으면서 굉장히 거친 것 같은데 또 곱게 늙은 느낌. 세 보이면서도 온화하고, 자기주장을 강하게 하지는 않을 것 같으면서 심지는 또 굉장히 깊고 곧을 것 같고. 그런 느낌의 얼굴을 좋아하는 것 같은데, 찍으면서도 “아, 그때 그 아저씨랑 되게 비슷하다.” 그러면서 찍었다. 나는 내가 찍고 싶은 거 찍는다. 어차피 고생하면서 영화 찍는 건데 내가 찍고 싶은 거라도 찍어봐야지 (웃음). 편집할 때 계속 보는데 보면서 기분이 좋아져야 편집하는데 힘도 나고.

ⓒ이영진

<물속의 도시> 때도 인터뷰는 안 하고 카메라에 담기만 했나?

그냥 가서 선생님 얼굴만 찍고 싶다 그랬다. 이번 영화의 아저씨한테도, <물속의 도시>의 그분한테도 아무 얘기도 물어보지 않았다. 아, 그땐 어디서 왔는지까지는 물었다. 제주도에서 왔다 그러더라. 그래서 이런 생각을 한 적도 있다. 혹시라도 <물속의 도시>가 잘 돼서 제주도에서 그 분이 영화를 보고 “내가 영화에 나온 사람이다.” 하면서 TV에 나와 나를 찾으면 얼마나 재밌을까. 영화가 잘 돼서 이런 일도 생겨야 하는데 (웃음).

 

영화 후반부에 등장하는 단양군 곡계굴 위령비는 원래 알고 있던 곳인가?

예전에 한 번 찍은 적이 있다. 단양이니까 내가 사는 곳하고 멀지 않다. 아는 동생이 충북지역 방송에서 기자를 하고 있는데 자기가 거길 가서 르포 형식으로 뭘 썼다며 얘기해 주길래 괜히 한 번 찍어보고 싶어 하릴없이 갔던 적이 있다. 그런데 그걸 더 이으려다보니 너무 방대해지더라. 얘기가 소화가 안 되는 거지. 그래서 한쪽에 치워두고 있었는데 갑자기 그게 생각이 난 거다. 그래서 다시 가서 찍었다. 아까 말했듯이 반공위령탑은 좋은 자리를 차지하면서 아주 권위적으로 서있는데, 그 사람들에 의해 죽은 사람들은 아주 힘들게 간신히 하나씩 자리를 잡는다. 곡계굴 위령비도 그런 거다. 6,70년이나 지나서 간신히 진상조사위원회가 만들어지고 숨통을 틔워주니 말할 수 있었던 거다.

 

그곳을 다시 찍다가 산나리를 발견한 건가?

아니, 그건 그 근처에서 찍은 게 아니다. 그건 다분히 은유적인 거니까. 그냥 다른 산에서 찍었다. 뭐 거기도 산나리가 있겠지 (웃음). 산나리는 7월 지금쯤 피는 꽃이다. 녹음이 푸르른 여름 산에 그 빨간 게 팍 올라와 있는데 멀리서 보면 빨간 깃발 같더라. 내가 가진 심상일 수도 있는데, 우리한테 빨간 깃발은 두 가지를 의미하지 않나. 하나는 혁명을, 다른 하나는 레드 콤플렉스를. 어떤 의미든 섬뜩한 거다. 굉장히 강렬한 열정이기도 하고, 반대로 빨갱이의 표식이기도 하고. 내가 개념적으로 붙이는 말들을 싫어한다. 직설적이고 물질적인 게 좋은데 ‘산나리’, 말로 굳이 더 설명할 게 없지 않나. 그래서 고민하다 제목을 그걸로 붙였다.

<산나리>

영화 마지막에 곡계굴 틈에서 마구 뿜어져 나오는 물이 강렬하다. 감독님 영화에 물, 혹은 물가가 자주 중요한 무언가로 자리하는 걸 볼 수 있다. 충주의 작업 공간도 바로 충주호가 내다보이는 곳이고 그 기운을 좋아한다고 말한 적도 있다. <옥주기행>(2016) 당시 진도 주변 바다를 촬영하거나 세월호 관련 두 작품을 제작하면서 물이나 물가를 대하는 감독님의 상태에 어떤 변화가 있지는 않았을지 궁금했다.

우선 물이라는 게 내 영화에서 하나의 기호처럼 읽히지는 않았으면 좋겠다. 영화가 기호가 되면 그건 이미 실패한 거다. 다만 농담 삼아 얘기하자면 내 이름이 응수인데, 한자로 대답할 응에 물 수를 쓴다. 이름 때문인지 몰라도 내가 확실히 물, 물기를 좋아하는 건 있다. 근데 습한 날씨를 좋아하는 건 또 아니고 날씨는 맑아야 하는데 물이 좋은 거다. 이기적이지 (웃음). 내 영화에서 물가를 찍는 건 그때마다 다 다르다. <과거는 낯선 나라다>에서는 그들이 불에 타 죽었지 않나. 그래서 물로 씻겨주고 싶은 감정이 있는 거다. <산나리>에서는 비가 쏟아지면서 동굴에 물이 찼고, 틈으로 비집고 나오는 그 물을, 마치 몸과도 같이 주체가 안 되는 그런 물을 찍은 거다. 물이 있어서 무조건 찍은 게 아니고 그 물이 정말 나한테 강렬했기 때문에 찍은 거다. 그냥 도랑 같았으면 안 찍었겠지. 모르겠다. 물이 나에게 어떤 의미였고 지금은 어떤지 의식적으로 내 머리 속에 정리된 건 없다. 내가 모르는 상황 속에서 뭔가가 나한테 변화를 줬을지는 모르겠지만.

 

<옥주기행> 얘기가 나온 김에 질문하자면, 다른 작품들은 보통 감독님 주변에서 우연한 계기로 시작하게 되는데 유독 <옥주기행>은 소리를 담아야겠다고 마음을 먹고 진도까지 내려가서 거기 살면서 찍은 작품이다.

시놉시스에 쓴 것처럼 <옥주기행>도 출발은 나의 우연한 체험에서 시작했다. 영화 <봄날은 간다>(허진호, 2001)에서 강원도 정선 어딘가의 산골에서 노부부가 부르던 정선아리랑을 남자 주인공이 녹취하던 장면에 전율했던 것에서. 약간 오해를 살 수도 있겠지만 그 영화의 다른 무엇도 재미가 없었는데 그 장면만 유일하게 강렬했다. 그래서 내내 그 장면을 마음에 두고 소리를 찍고 싶었지만 그건 관록이 있어야 하는 거니까. 충격으로 내게 다가온 것과 이걸 내가 소화할 수 있겠다고 받아들이는 건 다른 문제 같다. 10년 정도 지나니까 좀 하고 싶더라. 그냥 그 소리가 진짜 아름답고 이렇게 소리를 내는 방법이 있다는 게 놀랍고 좋았다. 다른 거 없이 그걸 즐기고 싶었고 다른 사람들한테 전달해주고 싶었다. 이 소리의 아름다움을 같이 한 번 느껴보자고. 이 심장이 박동하는... 그런데 웬걸, 그렇게 고생했는데 (웃음). 영화가 너무 아깝다 그래서.

<옥주기행>

정말 아까운 영화다. 개봉을 통해서 극장에서 더 많은 사람들과 만날 수 있으면 좋겠다. 현재 진행하고 있는 다음 프로젝트는 어떤 건가? 워낙 계획 없이 혼자 진행하니 말하기 어렵겠지만. 계속 이 정도 속도로 작품이 나오게 될까? (웃음)

그건 뭐 올림피아드 하듯 내가 찍어낼 수 있다 없다의 문제라기보다는, 최근에 내가 찍은 영화들을 보면 확실히 뭐를 찍어야 하고 뭐를 찍으면 헛고생을 하겠구나 라는 걸 빨리 알게 된 것 같다. 어떤 이미지들이 힘이 있는지 말이다. 어떤 이미지들이 현실에서는 굉장히 강렬할 것 같지만 영화 속에서는 별거 아닌 게 되는지. 우리가 그냥 스쳐지나가는 상투적인 이미지처럼 보이는 것들이 어떻게 하면 영화적인 사건이 될 수 있는지. 그걸 판단하는 능력이 조금 좋아진 거 같다. 여전히 우여곡절이 많고 찍어놓고 버리는 경우도 너무 많지만, 확실히 예전보다는 그런 우여곡절을 겪는 시간이 줄어든 것 같다. 그래서 혼자 속으로 대견하게 생각하고 있다 (웃음).

 

그럼 근시일내에 작품이 또 나올 수도 있겠다 (웃음). 블로그 운영하던 것도 있었는데(http://kimeungsu66.blogspot.com/) 2014년부터는 업데이트가 안 되고 있더라.

그렇다. 바빠서 신경을 쓰지 못하고 있었다. 영화에 포함된 에세이 같은 걸 정리해 놓으면 나름 요긴하게 쓰는 사람들이 있었는데 말이다. 나중에 시간 내서 한 번 정리해 보려 한다.

ⓒ이영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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