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자와 세계를 보는 우연의 눈
<아사코> 하마구치 류스케
글 정지혜 사진 김혜미 / Interview / 2019-06-08

동시대 일본영화에서 주목해야 할 감독이 있다면, 그 첫 단에 하마구치 류스케가 있을 것이다. 한국에서 3월 14일 개봉한 <아사코>(2018)가 지난해 칸국제영화제 경쟁 부문에 올랐고, <해피 아워>(2018)는 제68회 로카르노영화제에서 여우주연상을 차지했다. 그의 최근 이력과 성취보다 빛나는 건 끊임없는 영화적 시도들이다. 배우의 연기와 정념에 관한 근본적인 호기심과 영화 안으로 우연의 요소를 적극적으로 끌어안으려는 태도를 바탕으로 그의 영화는 인물의 대사를 통해 사람을 보여주는 흥미로운 행보를 선보이고 있다. 화려한 시각 이미지와 개념적 감각을 과시하는 대신 영화의 기본이라고 여겨졌던, 그러나 오랫동안 간과돼 왔던 배우와 이야기의 가능성을 끝까지 밀어붙이고자 하는 것이다.

도쿄예술대학교 대학원에서 졸업 작품으로 만든 데뷔작 <열정>(2008)을 시작으로 그는 시나리오, 배우, 우연성이라는 삼요소로 작동하는 영화, 이 삼요소가 또 다른 것을 발생하게 만드는 영화를 만들기 위해 애써왔다. 직업 배우가 아닌 이들과의 워크숍 과정을 그대로 영화에 가져온 <친밀함>(2012)과 <해피 아워>(2015)가 대표적인 예다. 근작 <아사코>는 앞선 작업과는 또 다르게 보다 극화된 방식으로 주인공인 아사코의 변화하는 마음을 따른다. 아사코의 변심을 하마구치 류스케 식의 리얼리티로서 설득해내는 것이다. 흐름에 관한, 즉 ‘어떻게 되어 갈 것인가’라는 질문이야말로 그가 지금껏 영화에서 온전히 보여주고 싶어 하는 것이자 영화를 통해 보고 싶어 하는 것 같다.

그 사이 하마구치 류스케는 2011년 3‧11 동일본 대지진 이후 도호쿠 지방에서 살아남았고 계속해서 그곳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을 만나 그들의 이야기를 경청하는 다큐멘터리 연작도 만들었다. <파도의 소리>(2011년), <파도의 목소리: 신치마치>(2013년), <파도의 목소리: 게센누마>(2013), <노래하는 사람>(2013년)이다. 서울아트시네마에서 6월 9일까지 진행되는 <하마구치 류스케 특별전> 일정에 맞춰 그가 한국을 찾았다. 이번 행사에서는 <열정>, 도쿄예술대학 대학원과 한국영화아카데미가 공동제작한 <심도>(2010)를 비롯해 <아사코>까지 그가 만든 8편의 장편영화가 상영된다. 하마구치 류스케를 만나 그가 서 있는 영화적 길에 관해 물었다.

 

 

 

 

꽤 오랜만의 한국 방문입니다.

<열정>이 2009년에 제6회 메가박스 일본영화제에서 상영했을 때 한번, <심도>의 촬영에 앞서 한번 한국에 온 적이 있어요. 2016년에 <해피 아워>가 전주국제영화제에서 상영했는데 그땐 미국에 머물 때라 오지 못했네요. 이번 서울아트시네마 행사로 세 번째 한국 방문인데요. 서울은 지역마다 분위기의 편차가 있다고 들었는데 한국에 왔을 때 각각 강남, 홍대, 종로 쪽에만 머물고 있어서인지 조금 다른 인상입니다.

 

서울아트시네마의 첫 번째 행사로 <열정> 상영 후 관객들과 만났습니다. <열정>을 작업하면서 감각하고 알게 된 바를 이후 작업에 적용하려 했다고 들었습니다. <열정>의 경험에 관해서부터 이야기를 해보면 어떨까요.

작업에 있어서 제가 목표로 삼고 있는 하나가 있다면 우연을 포착하는 것이에요. <열정>을 찍기 전까지만 해도 영화에 우연적인 게 들어온다는 걸 크게 의식하지 않았는데 그 영화를 찍으면서 그것이 무엇인지를 우연히 발견하게 됐어요. 그 후로 어떻게 하면 이러한 우연을 포착할 수 있을까를 의식적으로 생각했고 그것에 천착했어요. 그것이 그간의 작업이었고요.

 

<열정> 전후로 작업 방식이 크게 바뀌었다는 의미로 들립니다.

도쿄예술대학교 대학원 재학 중에 두 편의 단편과 두 편의 장편을 찍었는데요. 그때마다 연출법을 달리해서 찍긴 했어요. 존 카사베츠 감독을 특히 좋아하는데 영화를 찍으면 찍을수록 내가 바라는 방향과는 점점 멀어지고 있는 거 같았습니다. 지금까지 만들어온 방법, 스타일을 아예 버리고 완전히 새롭게 찍어보고 싶었고, 그게 <열정>이었습니다. <열정>의 작업 전까지만 해도 내가 세운 계획대로 영화를 찍었어요. 이제 계획 없이 한번 찍어보자 싶었죠. 결과적으로 우연을 포착하고 맞닥뜨리게 됐고요. 점점 더 우연을 맞닥뜨릴 확률이 높아지는 거죠.

<열정>

<열정>에서 발견하고 포착한 우연은 어떤 것이었습니까.

한 가지 예로 <열정>의 후반부에 부둣가에서 가호와 겐이치로가 걸어가는 모습을 롱 테이크로 보여주는 장면이 있어요. 가호가 겐이치로의 마음을 거절하고 프레임 아웃 하려는 순간, 프레임 안으로 커다란 트럭이 들어옵니다. 전혀 예상치 못한 상황으로 순전히 우연히 벌어진 일이에요. 걸어가는 두 사람 때문에 수직의 모습이 있는데 갑자기 수평 방향에서 트럭이 침입해 들어온 거죠. 그 타이밍이 맞아떨어졌어요. 게다가 가호가 프레임 밖으로 벗어나는 순간과 트럭이 화면 안으로 들어오는 순간이 딱 맞아떨어진 거죠. 그건 딱 한 번 밖에 일어나지 않는 것이고, 그걸 잡아낼 수 있는 건 오직 그때뿐이었음을 절실히 느꼈죠. 또 하나의 장면으로는 이 영화의 마지막 시퀀스에요. 겐이치로와 헤어지고 집으로 돌아온 가호가 그의 애인 도모야와 거실 소파에 앉아 있을 때죠. 두 사람이 이별하려는 상황이었고 이때 두 배우의 시선은 마주치지 않아요. 각자가 멍하니 뭔가를 바라보고 있죠. 그러다 두 배우가 같은 방향을 바라볼 때가 있어요. 그건 순전히 배우들이 만들어낸 우연이에요. 제가 같은 방향을 봐달라고 디렉션을 준 적이 없어요. 이런 걸 보면서 서로 완전히 무관해 보이는 것들이, 개별적인 사람들이 이렇게 연결되고 관계를 맺고 있구나, 라고 느꼈어요. 묘한 연결이 생긴 거죠. 관객도 그런 걸 똑같이 느낄 거라 생각합니다. 이 작업을 거치면서 서로 무관한 것들이라도 관계를 맺는 순간이 온다는 걸 알게 됐고 앞으로의 작업에서도 결정적인 순간에는 이런 식으로 해봐야겠다고 생각했어요. 또 하나는 계획 없이 진행하는 겁니다. 배우에게 구체적인 디렉션을 주지는 않는데 그런 게 오히려 자연스럽게 뭔가의 발생을 가능하게 해요. 저는 그런 게 일어나도록 환경을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말씀을 듣고 보니 그러한 우연은 현장의 환경과 배우에 크게 달려있군요. <아사코>를 제외하고는 저예산으로 작업을 해온 만큼 현장을 원하는 방식으로 통제하거나 세팅하고 촬영할 수는 없었을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보다 더 관심을 뒀을 부분은 아마도 배우의 연기, 배우의 활동에 관한 게 아닐까 싶은데요. 이미 배우의 정념에 관한 관심을 드러낸 바 있기도 하고요.

로케이션의 경우는 내가 컨트롤 할 수 있는 것보다는 그럴 수 없는 게 훨씬 많죠. 특히 적은 제작비로 진행해야 하다 보니까요. 제 현장이 스펙터클을 만들 수 있는 상황은 아니잖아요. 물론 배우도 제가 컨트롤할 수 없는 건 마찬가지예요. 하지만 배우의 경우는 바로 그 이유 로 우연과 마주칠 수 있는 게 더 크다고 생각해요. <해피 아워>까지 정말 초저예산으로 작업했는데요. ‘그렇다면 내가 승부를 걸 수 있는 건 배우밖에 없구나. 이 피사체를 어떻게 담아낼 것인가.’ 이 고민을 한 겁니다.

ⓒ김혜미

현실적인 제작 여건의 문제 때문일까요. 근본적으로 배우의 연기에 상당한 매혹을 느끼시는 것 같습니다.

연기가 뭘까요. 사실은 그걸 잘 모르잖아요. 배우가 무슨 생각으로, 어떤 느낌으로 연기를 하고 있는지를 잘 모르고 알 수 없다는 점, 바로 그 점에 끌립니다. 그게 매혹이 발생하는 지점이겠지요. 제 스승인 구로사와 기요시 감독님의 일화를 하나 말씀드릴게요. 한번은 구로사와 감독님이 한국에서 연출을 공부하는 학생들을 대상으로 수업한 적이 있으셨어요. 그때 한 학생이 질문했죠. “현장에서 아무리 해도 배우의 연기가 리얼하게 안 보입니다.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구로사와 감독님이 대답하기를 “그건 너무나 당연하다. 배우는 대본을 읽고 그 대사를 외워서 카메라 앞에서 연기하는 게 아닌가. 카메라는 바로 그러한 배우를 찍을 수밖에 없다. 그렇기에 애초부터 배우의 연기는 파탄이라고밖에 표현할 길이 없다.” 이어서 “그럼 어떻게 해야 할까?” 아, 이건 구로사와 감독님의 말투입니다. (웃음) 감독님의 말씀이 제게 확 와 닿았어요. ‘아, 이래서 그동안 내 영화에서도 배우의 연기가 잘 안 나왔던 거구나’ 싶었죠. 처음부터 말도 안 되는 걸 찍으려 했던 거예요. 카메라는 보이는 대로, 연기하는 사람을 연기 하는 그대로 찍은 거니까요. 연기하고 있지만, 연기가 아닌 것처럼 카메라에 찍히는 순간이야말로 연기의 마법이 일어난 순간이죠. 그런 순간을 잘 포착하지 못하겠어요. 시행착오를 겪고 있죠. 연기인데 연기가 아닌 거 같은 그 매직의 순간을 말이에요. 그럼 누군가는 이렇게 묻지 않겠어요. “그럼 연기를 하지 않으면 되는 거 아니에요?”라고. 예를 들어 다큐멘터리나, 즉흥 연기나 애드리브와 같은 걸 추구할 수 있다는 말이에요. 그런데 어째서 저는 ‘연기한다’는 것에 천착하고 있을까요. 대본에 관해 말해보고 싶어요. 배우가 대본에 있는 걸 보고 연기한다는 게 실은 우연을 포착하는 것과도 연관돼 있다고 보니까요. 배우들이 대본에 있는 것대로 연기하다가 연기하지 않는 것처럼 보일 때가 있다면 그건 배우의 신체에서 어떤 반응이 일어났거나 배우들끼리 연기를 하며 상호 반응할 때에요. 그때 우연이라는 게 생기는 거죠. 그리고 중요한 건 그럴 때를 카메라가 놓치지 않고 그걸 잘 포착하는 거예요. 카메라는 사람이 다루는 거니까 어느 위치에 둘 것인가 등의 계획이 필요해요. 배우가 어떻게 움직일지는 아무도 예측할 수 없으니까요. 하지만 카메라는 기계다 보니까 어느 정도 예상하고 위치를 잡아두지 않으면 안 돼요. 콘티가 없는 제 현장에서는 이런 과정이 정말 중요합니다.

<노래하는 사람>

그러면 연기에 있어 마법 같은 순간을 경험했거나 감각적으로 알게 됐던 순간이 있었을 거 같아요. ‘아, 이런 것이구나’, ‘이렇게 하면 되겠구나’라고 자각했던 때랄까요.

도호쿠에 관한 다큐멘터리 작업을 하면서 그 경험을 했습니다. 기본적으로 인터뷰로만 이루어진 작업이었는데요. 인터뷰 상대가 한 명이든 두 명이든 어떤 상황이 벌어져도 무조건 찍을 수 있도록 카메라 위치를 어디에 어떻게 둘지를 정말 많이 고민했던 현장이에요. 인터뷰라기보다는 사실 사람들의 대화로 진행되는 작품이죠. 대화를 계속 듣다 보면 친밀해지는 순간이 발생해요. 이분들이 말해주는 게 공적인 발언이라기보다는 사적인 이야기, 특히나 속 깊은 곳에 있는 얘기다 보니까 그걸 듣고 있다 보면 이분들과 아주 친밀해지는 걸 느낍니다. 관객들은 인터뷰를 하는 이분이 누구인지 처음에는 잘 모르겠지만 이야기를 듣다보면 자연히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한순간에 포착할 거예요. 이 작업의 경험이 있었기에 <해피 아워>에서 비 직업 배우들과 작업할 수 있었던 거 같아요. 저는 기본적으로 픽션을 만드는 사람이고 다큐멘터리 작업은 제 필모그래피에서 되게 예외적인 작업이에요. 하지만 다큐멘터리 작업이 정말 훌륭한 경험이었기에 그걸 살려보고 싶었고 어떻게 하면 픽션에 반영할 수 있을지를 고민했어요. 그러면서 몇 개월간 워크숍을(감독은 2013년 고베에서 영화 관련 워크숍을 기획해 진행하며 영화 작업에 관한 다양한 이야기를 나눈다. 그는 워크숍을 마친 뒤인 2014년 초에 워크숍에 참여한 몇몇 이들에게 함께 영화작업을 해보자고 제안하고 2월부터 리딩 작업에 들어가 5월에 촬영해 <해피 아워>를 완성했다.) 진행하면서 이 워크숍의 경험을 극으로 살려보게 됐죠. 그게 <해피 아워>입니다.

 

2011년 3‧11 동일본 대지진 발생 뒤 현장으로 가 재해의 현장에서 계속해 살아가는 사람들을 만나 다큐멘터리 연작을 만들었습니다. 그곳으로 가 다큐멘터리라는 작업을 하게 된 이유가 궁금한데요.

센다이 미디어센터가 건립될 때였는데 센터에서 일반 시민들의 재해에 관한 아카이브를 준비했죠. 센터 측에서 도쿄예술대학 대학원에 참가해주길 제안했고 학교 측에서 졸업생인 제게 의뢰를 했어요. 재해 현장에 가서 자원봉사라도 해야겠다는 마음으로 그곳으로 갔죠. 도호쿠 지역의 재해 현장을 눈으로 확인하고는 정말 충격이었습니다. ‘그곳에서 실제로 어떤 일이 일어난 것인가’가 궁금해졌고요. 다큐멘터리와 픽션이 섞인 전작 <친밀함>을 통해 어느 정도 다큐멘터리에 임할 준비는 됐다고 생각했습니다.

<파도의 소리>

이때의 경험이 이후 감독님 영화의 서사적인 측면에 크든 작든 지속해서 영향을 주는 거 같습니다. <아사코>의 지진 시퀀스가 대표적이고 <해피 아워>에도 대지진 이후의 도호쿠 지역에 한동안 살았거나 자신 마음의 균열과 흐름을 따르며 도호쿠로 연락을 취한 듯한 이가 등장합니다. 좀 더 생각해보면 <친밀함>의 경우에도 일본 사회가 동북아시아라는 지정학적 위치에서 느끼는 위기와 두려움에 관해 이야기하는 장면이 있습니다. 전쟁, 재난 이후 일본 사회의 내상이 영화에 계속해 어른댑니다.

‘만약 내가 도호쿠 지방에 가지 않았다면?’이라는 건 상상할 수 없어요. 그 경험을 잊을 수도 없지요. 나에게 그때의 일과 경험이 어느 정도까지 영향을 끼쳤는지는 알 수 없지만, 이것만은 분명히 느껴요. 도호쿠, 도쿄, 오사카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든 간에 서로가 다 연결돼 있다는 걸요. 물론 지금 말한 곳들을 제가 다 직접 다녀왔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땅이 연결돼 있듯이 어느 곳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든 다 연결돼 있다는 걸 강하게 느끼게 됐어요.

 

다큐멘터리 작업에 관해 좀 더 말해보고 싶습니다. 인터뷰 방식을 취했습니다. 다큐멘터리에서 익숙한 방식이긴 합니다만 조금 다르게 보이기도 했어요. 인터뷰 대상만을 찍는 방식이 아니라는 감독님과 공동 연출을 맡은 사카이 코 감독이 인터뷰 상대의 이야기를 청취하는 모습을 상당히 공들여 보여주고 있다는 인상을 받았습니다. 인터뷰이의 말은 다 끝났지만, 그 말을 듣고 있는 감독의 얼굴을 길게 보여줌으로써 감독의 마음의 상태를 보여주고자 하는 것 같기도 했습니다.

사카이 코 감독과 저는 각자 인터뷰한 사람들이 나오는 장면을 바꿔서 편집하는 방식을 택했어요. 우리가 공통적으로 중요하게 여긴 게 있어요. 이 영화는 대답하는 사람뿐 아니라 질문하고 그것을 듣는 사람 둘 다가 상당히 중요하며 그게 이 영화의 핵심이라는 지점이에요. 우리에게 이야기를 들려주려는 분들이 본인의 속 깊은 이야기를 꺼낼 수 있게끔 하려면 우리가 어떻게 듣고 있는지가 중요했어요. 재해를 다루는 작품들 가운데 말하는 사람을 보여줄 뿐 질문한 사람의 반응은 찍지 않을 때가 있어요. 하지만 질문을 받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카메라 앞에 선다는 건 상당한 리스크를 감수한다는 의미가 있죠. 이 작업에서는 듣는 사람인 저 역시도 그 리스크를 감당하겠다는 태도가 중요했어요.

ⓒ김혜미

감독님 영화에는 대사가 상당히 많습니다. 사건을 중심으로 극이 전개되기보다는 대화를 통해 극을 진척시켜갑니다. 영화를 시작하던 초기에는 여유롭지 않은 제작 여건상 시나리오를 본인의 무기라고 생각했을 것이라 짐작되지만. 그간의 영화 작업을 보면 꼭 현실적인 제작 조건 때문만은 아닌 거 같습니다. 대사와 그것을 발화하는 배우에게 거는 기대가 있는 듯합니다. 배우가 말을 할 때, 배우들끼리 말을 주고받을 때 어떤 일이 벌어질 거라고 기대하시는지요.

이 질문에 답하기가 가장 어렵습니다. (웃음) 물론 제작비를 고려하는 부분도 있겠지만 저의 연출 능력과 관련된 게 크겠지요. 대사를 중심으로 시나리오를 쓰기 시작합니다. 왜 그러는가. 생각해보면 제게는 영화에서 시각적 표현을 중시하거나 배우의 침묵이나 액션을 추구하는 게 오히려 너무 뻔한 영화 문법 같기 때문입니다. 되레 그런 것들에 영화가 갇혀버리는 게 아닌가 하는 일종의 반발심이 생깁니다. 그런 것까지 해야 하나 싶기도 하고요. 사실 촬영하는 입장에서는 배우가 침묵하고 가만히 있는 순간과 배우가 대사로 말을 하는 순간 중에 보다 찍기 편한 건 전자일 겁니다. 침묵할 때는 배우가 연기하고 있다는 걸 절묘하게 숨길 수 있으니까요. 하지만 배우가 대사하기 시작하면 그때부터는 ‘아, 연기를 시작했구나’라고 생각할 거고 연기하고 있음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거죠. 그런데 바로 그럴 때 연기하는 거 같지 않게 느껴진다면 어떨까요. 그게 더 흥미롭겠지요. 저는 배우들과 리딩을 많이 하는 편이에요. 리딩의 방식은 장 르누아르 감독이 시도했다는 방식, 배우의 감정을 배제하고 전화번호부를 읽듯 대사를 반복합니다. 리딩을 계속하면 자연스럽게 대사를 다 외우게 되고요, 그러면 대본을 덮습니다. 그리고 일관된 톤으로 대사를 얘기하게끔 또다시 리딩을 해요. 리딩을 계속할수록 배우는 자신감이 생기고 목소리에도 변화가 오고 무게감이 더해져요. 이건 연극적 발성과는 다른 거예요. 이 과정을 거치고 어느 정도 됐다고 판단되면 촬영에 들어갑니다. 동선은 제가 배우들에게 제안하고요. 리허설 때 동선을 짜고 화면 사이즈나 카메라의 위치도 다 짭니다.

 

그런 리딩 방식이 실제 촬영에서 어떤 변화를 일으키고 결과를 낳나요.

리허설 때도 배우들에게 리딩 때와 같은 식으로 아무런 감정을 싣지 않은 채 연기해달라고 해요. 촬영에 들어가면 이번에는 그동안 리딩한 거는 다 잊고 감정을 넣어 자유롭게 연기해달라고 하지요. 특별히 뭔가를 끌어내려고 제가 뭘 더 하기보다는 배우를 내버려 둬요. 그게 카메라에 찍히는 거죠. 배우들에게는 지금 이 현장에서 느끼는 대로 편안하게 표현해달라고 하고요. 생각해보면 이 과정은 이중적으로 진행되는 거 같습니다. 구로사와 기요시 감독의 말처럼 카메라에는 대사를 외워서 연기하는 배우가 찍힙니다. 근데 배우가 연기하고 있다는 걸 들키지 않게끔 하는 게 리얼리즘이라고 생각해요. 그와 동시에 배우는 연기할 때 배우 자신의 몸으로 뭔가를 느낄 거고 그건 도무지 감출 수 없다고 생각해요. 만약 내가 도박을 해야 한다면, 배우가 연기할 때 연기가 아닌듯한 뭔가가 발생하는 바로 그 부분, 그 가능성에 걸고 싶어요. 배우가 “난 네가 좋아” 혹은 “난 네가 싫어”라는 대사를 한다고 치면 그 말을 하는 배우나 그 말을 듣는 배우 모두 신체적으로 반응을 하겠지요. 바로 그 반응에 저는 도박을 걸고 싶은 거예요. 배우들끼리 아무 감정 없이 리딩을 한참 하다가 본 촬영에 들어가서 갑자기 처음으로 감정을 넣어서 연기하는 거잖아요. 상대 배우가 감정을 넣어서 연기하는 걸 보면서 그 안에 새로운 뉘앙스가 생기고 처음 느끼는 감정을 느끼게 되겠죠. 배우들 자신도 놀라면서 거기에 반응하며 연기할 거예요.

<심도>

감독님 나름의 ‘낯설게 하기’인 셈이네요.

맞아요, 그런 셈이죠.

 

영향 받은 감독들에 관해 언급하면서 하워드 혹스와 존 카사베츠의 영화를 좋아하고 그들의 장점을 끌어안은 게 에릭 로메르라고 말씀하신 거로 알아요. 세 감독을 이어보는 감독님의 매핑에 연출자로서 지향하는 바가 있을 거라 생각합니다.

이걸 너무 자세하게 얘기하면 제 영화 세계를 다 드러내게 될 거 같아요. (웃음) 에릭 로메르의 카메라 위치는 하워드 혹스의 그것과 상당히 비슷합니다. 하워드 혹스의 경우 고전 할리우드 감독 중 공간을 안정적으로 포착하는 감독이에요. 상당히 계획적으로 공간을 구획하죠. 신기하게도 그 정교한 공간 구획 속에서도 그의 영화는 생동감을 잃지 않아요. 그게 하워드 혹스의 장점이에요. 하워드 혹스의 공간 구성을 흉내 내보려 하면 많은 경우 너무 뻔해 보여요. 반대로 존 카사베츠는 공간 구성이나 편집의 룰을 아예 다 해체해버리죠. 그렇다고 해서 카사베츠의 공간이, 그의 영화가 정리되지 않는 것처럼 보이나요? 오히려 편집을 통해서 인물의 감정을 제대로 연결하죠. 제 인생의 베스트 영화를 꼽으라고 하면 존 카세베츠의 <남편들>(1970)과 하워드 혹스의 <리오 브라보>(1959)를 말하겠는데요. 이 두 편의 영화의 좋은 점을 다 끌어안은 게 로메르 영화라고 생각합니다. 로메르는 인물과 공간 둘 다를 아주 잘 포착해요. 그런 영화를 보며 항상 공부합니다. 정말 좋은 영화들이에요.

 

카메라 세팅의 원칙이 있다면요.

카메라의 기본 위치는 배우의 옆쪽에서 배우의 허리 라인쯤에서 인물을 포착하는 거예요. 현장에서 컷을 어떻게 분할할지를 고민하며 찍고요. 하지만 제 취향을 너무 고집하다 보면 영화가 뻔해질 수 있으니 되도록 제 취향에서 벗어나고 그걸 깨뜨리려고 노력해요.

<해피 아워>

<해피 아워>는 워크숍에서 만난 사람들에게 영화 작업을 제안하며 시작된 영화인데요. 연기 경험이 없는 사람들과의 작업으로 기대한 바가 있을 겁니다.

지금도 캐스팅이 가장 어려워요. 비직업 배우와 전문 배우와의 작업은 각각의 장점과 어려움이 있는데요. 비직업 배우들은 연기 경험이 거의 없다 보니 실제 본인의 모습, 자신의 모습을 감추려는 방식으로 연기를 하죠. 반대로 말하면 비직업 배우의 가장 큰 매력은 본래 자신의 색깔과 매력을 카메라 앞에서 다 터뜨려낸다는 거예요. 아주 열려 있죠. 하지만 비직업 배우들은 영화가 공개된 후 혹시라도 관객들에게 비난이나 지탄을 받게 되면 그 부분에서 어떻게 해야 할지 큰 고민이 들죠. 자신을 지킬 방법이 마땅하지 않잖아요. 이 부분은 저로서도 고민이고 어떻게 해도 쉽게 해결될 것 같지는 않아요. 반면 직업 배우는 내가 카메라 앞에 선다고 하는, 모든 걸 짊어지고 갈 각오가 된 분들이잖아요. 반면 비직업 배우와 달리 직업 배우는 어느 정도 정형화된 연기를 하기도 하죠. 배우는 그런 정형화된 연기를 뛰어넘어 자신만의 예술적인 게 자연스럽게 표출되도록 자신을 연마해야 하고 저는 그걸 지켜볼 수밖에 없어요.

 

<해피 아워>에서 감독님은 아키라에게 호감을 보이며 그녀와 짧은 데이트를 하는 남자로 등장합니다.

하하하. 연기하는 걸 싫어하지 않아요. 그렇다고 배우가 되겠다는 건 아니고요. 이전에도 독립영화 작업을 하며 잠깐씩 제가 출연한 적도 있고요. 제가 화면 안에 있어야 할 순간이 있는데 그때 화면 밖에서 지켜보기보다는 직접 연기하는 게 낫더라고요. <해피 아워> 때 배우들과 리딩을 반복하다 보니까 궁금해졌어요. 과연 리딩의 효과는 뭘까? 저도 배우들과 리딩에 참여해 대본을 읽었고 그걸 바탕으로 연기를 했죠. 제가 출연한 장면에서 카메라 위치는 물론 제가 다 잡았고요. 그 장면 촬영 때는 <해피 아워>의 공동 각본가이자 조연출이었던 다다시 노하라 씨에게 연출을 맡겼죠. 별말은 없더라고요. 저도 크게 문제가 있다고 느끼진 않았습니다. 앞으로 또 제가 영화에 나올지도 몰라요. (웃음)

ⓒ김혜미

<아사코>는 시바사키 도모카의 소설을 영화화했습니다. 감독님이 영화에서 추구하고 싶은 리얼리티와 영화적 황당무계함이 결합돼 있고 그걸 전작들에서보다 좀 더 극적으로 풀어볼 수 있다고 판단한 거 같습니다. 감독님이 말하는 리얼리티와 영화적 황당무계함에 관해 좀 더 들어보고 싶습니다.

제게 리얼리티란 물리 법칙에서 벗어나지 않는 겁니다. 사람은 자력으로 날 수 없잖아요. <아사코>는 현실에서 충분히 있을 법한 현실의 이야기라고 생각했습니다. 물론 의심이 드는 구석도 없지 않지만, 최소한 물리 법칙을 벗어나지는 않죠. 그러면서 동시에 ‘정말 현실에서 이런 일이 있단 말이야?’라고 할 만 한 일도 있어요. 그건 전적으로 히가시데 마사히로 씨가 연기한 바쿠라는 캐릭터에 해당할 거예요. 도호쿠 관련 다큐멘터리의 인터뷰를 하며 가장 많이 들었던 말이 있어요. “지진과 쓰나미 이후 나는 꿈을 꾼 거 같아요. 정말로 내가 그런 일을 겪었나 싶어요. 그런 일이 실제로 일어났었나 싶은 생각이 듭니다.” 그분들의 이런 말과 영화적 황당무계함이 연결되는 거 같아요.

 

배우의 목소리에서 오는 매혹을 많은 감독이 말하곤 합니다. <아사코>의 오디션 때 가라타 에리카 배우의 목소리를 듣자마자 ‘이 사람이다!’라고 느끼셨다고요.

오디션 때 아사코 역을 위해 온 배우들에게 같은 신을 읽어달라고 했죠. 그러다 가라타 씨의 목소리를 들었는데 ‘이 사람은 진짜를 말하고 있구나’라는 느낌을 받았어요. 가라타 배우가 <아사코>로 영화 데뷔를 한 만큼 연기 경험이 많지 않아서인지 연기의 흔적이 거의 느껴지지 않았고요. 오히려 아사코 역할에 집중해 자연스럽게 말하는데 뭔가 잘 해낼 수 있을 거 같은 감이 오더라고요. 본 촬영에 들어갔을 때 알았죠. 이건 연기 경험의 여부와는 전혀 상관이 없다는 걸요. 가라타 씨 자체가 아사코 캐릭터와 정말 비슷한 사람이었기 때문이에요. 가라타 씨는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저는 <아사코>가 가라타 에리카라는 사람의 다큐멘터리 같았으니까요. 가라타 씨는 시나리오 읽고 단 한 번도 ‘아사코가 왜 이러는가’라고 제게 묻지 않았어요. 한 번에 다 이해된 거예요. 아사코는 이런 존재라는 걸 아주 자연스럽고 당연하게 받아들여 줬어요. 같이 연기하는 다른 배우와의 관계 역시 중요했는데요. 바쿠와 료헤이를 1인 2역으로 연기한 히사시데 마사히로 씨의 연기가 극 중에서 수동적이었던 아사코를 이끌어가는 면이 있어요. 아사코는 상대방이 어떤가에 따라 반응하니까요. 히가시데 씨가 화면에서 일종의 연출자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에요. 바쿠로서 연기할 때 아사코의 연기를 끌어낸 부분과 료헤이로서 아사코 연기를 끌어낸 게 다르니까요. 결국 또 한 번 느꼈죠. ‘가장 중요한 건 캐스팅이다, 누구를 할 건지, 어떤 사람에게 어떤 역할을 부탁드릴지’가 가장 중요하다는 걸요.

<아사코>

감독님 영화의 러닝타임은 대체로 상당히 긴 편입니다. 인물들의 말 하나하나가 어떤 방향으로 진척되는지, 그래서 인물들이 어떻게 되었는지를 다 보여줄 필요가 있다고, 그 시간을 담는 것이 자신의 영화라고 말하는 거 같습니다. 영화 안의 세계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들의 바로 그 발생의 과정만 충실히 담아도 영화가 될 수 있다는 듯이요. 극장 개봉이나 배급 등 상업적인 판단을 해야 한다면 긴 러닝타임이 불리할 수도 있는데 말이죠.

물론 제가 일부러 길게 찍으려고 한 건 절대 아닙니다. (웃음) <해피 아워> 찍을 때까지만 해도 재밌는 걸 찍으려고 하면 길게 찍는 방법밖에 없더라고요. <해피 아워>는 8개월간 촬영했고 시나리오 수정 작업도 꽤 여러 차례 진행했어요. 기본적으로 비직업 배우들과의 작업이다 보니 대본을 누가 읽더라도 쉽게 이해되게끔 계속 수정해야 했죠. 초고로는 2시간 30분 분량의 영화였는데 대본 수정을 거듭할수록 내용을 하나씩 풀어쓰다 보니 분량이 점점 늘어나는 거예요. 네 명의 캐릭터가 일상에서 어떤지를 자세히 묘사했어요. 직업 배우라면 빼도 될 요소나 대사를 그대로 두는 나름 과감한 시도를 한 것이죠. 길어진 대본 분량을 그대로 다 찍었어요. 2시간 정도로 편집할 수 있겠다 싶었는데 막상 다 만들어놓고 보니 5시간 36분(최종 버전은 5시간 17분)이 되더라고요. 근데 그걸 보는데 정말 재밌는 거예요. 출연한 분들이 그만큼 시간을 투자해 자신들의 캐릭터를 이해했던 것이잖아요. 관객도 이 시간 동안 영화 속 캐릭터를 마주하다 보면 캐릭터를 이해하게 되는 일이 일어나지 않을까요.

 

<친밀함>의 경우는 연극 공연을 준비하는 일련의 과정을 보여주고는 그 과정으로 완성된 2시간 10분짜리 연극 공연을 그대로 영화에 담았습니다. 연극이 끝난 뒤에도 일종의 후일담과 같은 장면까지 넣었고요.

개인적인 실험이었어요. (웃음) 이렇게 한번 해보면 어떨까? 어떤 영화가 될까? 궁금했죠. 제가 2010년 12월부터 이듬해 2월까지 3개월간 한 영화 학교에서 영화배우를 지망하는 학생들을 상대로 연기 강좌를 맡은 적이 있어요. 이 학생들과 졸업 작품 제작까지를 진행하는 것이었는데요. 연출자로서 학생들에게 연기를 가르친다는 게 과연 뭘까, 뭘 해야 할까 고민이 되더라고요. 그러다 극 중에 나오는 연극과 거의 유사한 시나리오를 썼어요. 그걸로 학생들에게 리딩과 리허설을 해보자고 제안했죠. 그리고 그걸 <해피 아워>를 찍은 요시오 기타가와 촬영감독에게 부탁해 찍어봤어요. 그러면서 ‘아, 이 연극과 연극을 준비하는 모습을 같이 찍으면 되겠구나’ 싶더라고요. <친밀함>에 나오는 사람들이 모두 그 수업을 듣던 학생들이에요. 학교 졸업 작품이라 제작비가 1천만 원이 안 됐죠. 양면적인 마음이었어요. 내 신작이기도 하지만 학교 작품이니까 아무도 안 볼 거야. (웃음) 그래서 그런 실험을 해본 거예요.

<친밀함>

감독님은 영화에서 인물들이 걸어가는 장면을 롱 테이크로 보여 주곤 합니다. <열정>, <친밀함>처럼, 인물들의 대화만 한참 들리다가 어느 순간 그들이 저 멀리서부터 걸어왔음을 알게 되죠. 특히 이 두 작품에서 카메라는 그들의 바로 옆에서 동행하듯 걸어갑니다. <해피 아워>에서도 마음의 동요가 일고 있을 후미가 오랫동안 거리를 걸어 집으로 돌아가는 모습을 오랫동안 보여주고요. 게다가 이러한 걷기가 진행되는 시간대가 유독 밤의 끝, 새벽으로 향하는 시점, 결국 동이 트고 여명이 밝아오는 시간대라는 점도 흥미롭습니다. 그 시간대가 주는 무드뿐 아니라 서서히 변화하는 빛 속에서 인물들의 마음의 상태도 변화하는 거 같습니다. 마법처럼 색이 바뀌는 그 시간대가 주는 이상한 정조도 느껴지고요.

생각하신 그대로입니다. 새벽이 되기까지 짧다면 짧은 그 시간대야말로 빛의 변화가 보이잖아요. 인물들은 그렇게 걸으면서 어떤 감정의 변화를 느낄 테고 관계가 회복되기도 합니다. 그 시간대의 변화와 인물들의 감정의 변화를 동시에 포착하는 것이지요.

 

돌이켜보면 <열정> 때도 변심하는 인물들 때문에 관계가 복잡하게 얽히곤 했습니다. 인물의 갑작스러운 마음의 변화, 그런 변화를 즉각적으로 표현하며 다른 선택을 해보려는 인물에 관해서라면 <아사코>의 아사코가 대표적일 것입니다. 이런 인물을 계속해서 파고드는 이유가 궁금합니다.

기본적으로 저는 영화광입니다. 영화를 봤을 때 가장 제 마음을 흔들었던 순간이나 제 마음에 뭔가가 들어와 감동을 줬던 때를 생각해보면 인물이 갑자기 변심하는 순간이었어요. 그때 감정적으로 그 인물에 이입이 많이 돼요. 한 편의 영화를 보면서 우리는 종종 그 중심 캐릭터에 관해 다 안다고 느낄 때가 있잖아요. 근데 갑자기 그 인물이 내 예상과 달리 마음을 확 바꾸는 거예요. 그럼 뭔가 배신당한 거 같죠. 동시에 ‘그래, 그럴 수 있지’라는 마음도 생깁니다. 그러면서 더 나아가서는 ‘그래, 나는 사실 이 영화와 별 관계가 없는 사람이었지’라는 점을 깨닫게 되기도 해요. 그 인물에 공감하는 차원을 넘어서는 일이죠. 하지만 바로 그 순간이야말로 타자를 정확하게 바라보는 순간이 아닐까요. 그게 이 세계를 보는 방법 같습니다.

 

관객과 영화 사이의 거리감을 확 만들어버리는, 영화를 보는 이가 영화와 현실의 간극을 더 크게 느끼게 되는, 그럼으로써 현실을 더 분명히 자각하는 순간이라는 말씀인데요. 갑자기 감독님이 냉정하게 느껴집니다. 감독님이 영화로 우리에게 변심해 보이는 것 같다고 할까요. (웃음)

하하하. 그런가요? 그런 거리감이 있기에 오히려 서로 연결됐을 때 기쁨이 생기는 거 같아요. 서로 뭔가를 같이 한다는 건 어느 정도의 거리감 없이는 어렵지요. 그 거리감이 있어서 함께하게 돼요.

ⓒ김혜미

인물의 변심 때문일까요. 감독님 영화에서 인물들은 “죄송하다”는 말을 정말 많이 합니다. 한편으로는 그런 생각도 들더라고요. 이때의 사과는 그 사과의 말을 한다는 게 중요한 것일까, 아니면 사과를 통해 관계가 실질적으로 다른 국면으로 전환되길 바라는 말일까.

제 영화에 그런 지점이 있다는 걸 처음 알게 된 게 <해피 아워> 때였어요. ‘미안하다’와 ‘고맙다’는 말을 정말 많이 하더라고요. 아마도 <열정> 이후의 제 작업 방식과 연관되는 거 같아요. 그때부터 대본을 쓸 때 ‘서사적으로 이렇게 진행되겠지’가 아니라 ‘이 캐릭터라면 이렇게 하겠지’라고 생각하게 됐어요. 이 캐릭터라면 “미안하다”는 말을 자주 할 거 같았고 자연스레 많이 집어넣게 됐나 봐요. 왜 사과를 많이 하느냐고 물어본다면 이 사람은 그런 사람이니까, 아니면 사과해야 하는 상황이니까, 정도로 답할 수 있을 거 같아요. 하지만 <아사코>에서는 좀 달라지지 않았나요. 영화 말미에 아사코가 “사과하지 않을게. 용서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아”라고 말하잖아요. 원작자인 시바사키 씨가 영화 자체를 굉장히 좋아하는 분이라 영화에 관한 이해도가 높은 분인데요. 제가 원작과 달리 많은 부분을 각색했는데도 아무 말씀이 없으셨어요. 그런데 유일하게 코멘트를 준 게 바로 이 대사였어요. 원래는 아사코가 “미안하다”는 의미의 말을 좀 더 표현하는 것이었는데 사바사키 씨가 “아사코가 과연 그 자리에서 그런 식으로 표현했을까요?”라고 의문을 제기하셨죠. 가만히 생각해보니 그 말이 맞더라고요. 가라타 씨도 작가님의 의견이 좋겠다고 해 지금과 같은 대사로 수정했죠. 그래서 제 영화에 사과하지 않는 인물이 나오게 된 겁니다.

 

그런 맥락에서라면 <해피 아워>의 사쿠라쿠(사쿠라쿠의 어떤 행동, 변심이 무미건조한 남편과의 관계에 고요하지만 강렬한 파문을 일으킨다. 그 사실을 알게 된 남편에게 사쿠라쿠는 사과하지 않겠다고 말한다.)도 있지 않습니까.

아, 그랬네요! 하하하. <해피 아워>에서는 사과를 하면 그걸로 관계가 완전히 끝나는 것이었다면 <아사코>에서는 다른 식으로 표현을 해보고 싶었습니다.

 

이제 또 어떤 작업을 준비하고 계시나요.

홍콩 필름 마켓에 펀딩을 신청하려고 기다리고 있는 작품이 있어요. 프랑스 파리에서 로케이션을 진행할 예정이고요. 아직 시나리오는 안 나왔습니다. 모든 게 잘 풀린다면 내년 여름쯤 촬영에 들어갈 계획이에요. 그 외에도 일본에서 준비하고 있는 작품들이 있습니다. 제게 없는 면을 시나리오에 반영해보고 싶은 마음이 커요. 그래서 그런 걸 해줄 수 있는 분들과 같이 각본 작업을 하고 있고요. 제 작업에 새로운 변화가 있길 바라봅니다.

ⓒ김혜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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