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창한 계절과 어울리는 아이들의 성장 모험담 한 편이 우리를 찾아왔다. 보희(안지호)와 녹양(김주아)은 같은 날 같은 병원에서 태어난 ‘불알친구’. 보희는 또래 친구들의 놀림감이 되기 일쑤지만, 든든한 녹양이 있어 짓궂은 남자애들도 금방 물러서고 만다. 어느 날, 죽었다던 자기 아빠가 살아있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알게 된 보희의 아빠 찾기에 녹양이 동행하면서 아이들의 로드무비가 본격적으로 펼쳐진다.
낯선 장소에서 낯선 사람들과 만나는 에피소드들이 층층이 쌓이다 보희와 녹양이 다시 영화의 출발 장소로 돌아왔을 때, 영화가 세심하게 표현한 지난 시간들은 아이들의 한 뼘의 성장을, 그리고 영화의 결말을 믿고 싶게 만들 것이다. 꽤 먼 길을 돌아 첫 장편영화 개봉의 기쁨을 맛보게 된 안주영 감독의 지난 여정에도 좋은 어른과의 만남과 옆에서 믿고 기다려주는 친구들이 있지 않았을까. 개봉을 앞두고 여러 시사회와 인터뷰로 바쁜 안주영 감독을 만나 궁금한 것을 물었다.
예상보다 이른 시점에 개봉 일정이 잡혔다.
정말 깜짝 놀랐다. 고생한 스태프와 배우들을 봐서라도 어떻게든 빨리 영화관에 걸리도록 노력해야겠다고 생각했는데 그런 바람이 빨리 이뤄져서 좋다. 그래도 마음의 준비가 덜 된 상태여서 많이 떨렸다. 다행히 생각보다 언론배급 시사 반응이 괜찮았다. 오늘이 세 번째 시사인데 지금 옥상에서 야외상영하고 있다. 분위기가 되게 좋더라. 하늘과 같이 보기에 잘 어울리는 영화인 것 같다. (웃음)
개봉 시기가 영화 분위기와 잘 어울린다. 이야기는 처음에 어떻게 구상하게 되었나?
사실 이건 내가 영화를 처음 시작할 때 썼던 시나리오다. 학부 때는 다른 걸 공부하다 서강대 영상대학원에 진학했는데 본격적으로 영화를 찍기 전에 이 시나리오를 먼저 썼다. 가장 쉽게 접근할 수 있는 소재였고 쓰는 건 혼자서도 할 수 있으니까. 물론 자료조사를 하긴 했지만 거의 즉각적으로 썼던 시나리오였고, 내가 그때까지 보고 느꼈던 걸 토대로 시작했다. 처음엔 장편이 아니라 단편이었다. 단편은 남자아이가 아빠를 찾아 간다 정도까지만 지금과 같다. 찾는 과정도 당연히 짧고 사실 아빠를 못 찾는 게 결말이었다. 대학원을 마칠 즈음에 장편으로 만들어보고 싶다 생각해서 시나리오를 더 발전시켰다. 그런데 곧바로 장편을 만들 수 없으니 조금씩 내가 원하는 걸 끄집어내서 단편 작업을 하다 이걸 찍게 된 거다.
서강대 영상대학원 졸업작품이 <옆 구르기>(2014)다. 이후에 한국영화아카데미 정규과정 졸업작으로 <할머니와 돼지머리>(2016)를 만들었다. 이번 영화에 이르기까지 아이들, 로드무비, 판타지를 향한 지속적인 애정이 느껴진다.
셋 다 어떻게 보면 공통적으로 나를 잡아당기는 매력이 있다. 로드무비는 형식 자체가 누굴 만날지 모르고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르지 않나. 그런 예측되지 않는 지점들이 좋았던 것 같다. 반복해서 아이들을 주인공으로 삼는 이유도 완전히 성인이 되지 않은 아이들이 얘기하거나 행동할 때 사회적인 관습에서 더 자유롭기 때문이다. 사회화가 덜 되어 있으니까 그런 부분들에서 제약이 덜하다. 판타지도 마찬가지다. 상상력을 자유롭게 펼칠 수 있다.
장편을 만들면서 판타지적인 장치들을 더 넣고 싶은 마음은 없었나.
시나리오 쓰면서 느꼈던 건, 이미 등장하는 인물들이나 아이들의 모험이 솔직히 그 자체로 판타지 같다는 거였다. 일상적인 것처럼 그려놓긴 했지만 실제로 아이들이 영화에서처럼 막 다니는 것도 쉽지 않고 또 이렇게 착한 사람들만 만나기도 힘들지 않나. 그런 면에서 장르적인 판타지보다는 약간 이상적으로 내가 바라는 판타지를 그리지 않았나 싶다. 이게 현실에서는 어려울 수도 있지만 아이들이 좋은 어른들을 만났으면 좋겠다는 느낌으로.
<보희와 녹양>을 촬영하면서 참고로 한 영화들이 있나?
<올모스트 페이머스>(2000, 카메론 크로우)를 좋아한다. 이 영화도 <보희와 녹양>처럼 중학생 정도 되는 아이가 주인공인데 자기가 좋아하는 밴드를 따라다닌다. 아이의 시선으로 어른들을 보는 느낌이 참고가 많이 됐다. <두 번째 이별>(1992, 닐 조던)은 촬영 중간부터 참고했던 영화다. 이 영화에도 남녀인 두 십대 친구들이 나온다. 일상적인 아이들의 행동을 보여주다가 엔딩에 갈수록 꿈과 현실을 구분할 수 없는 장면들이 나오는데 그 지점이 좋았고 우리 영화에도 반영됐다. 그중에 특히 엽서가 날아가는 장면은 사진작가 제프 월의 작품 중에 내가 좋아하는 한 사진(<A sudden Gust of Wind, after Hokusai>,1993)을 참고했다.
영화를 시작하게 된 계기는 뭐였나.
아주 어릴 때부터 극장에 가고 집에서 영화 보면서 자연스럽게 좋아하게 됐다. 그런데 보는 것만으로는 만족이 안 됐다고 해야 하나. 계속 만들고 싶은 열망이 있었다. 대학 졸업하고 조그만 영화사에서 일하고 영화제도 여러 곳에서 일했다. 한데, 막상 현장에 들어가서 영화를 찍으려 하니 쉽지가 않더라. 뭣보다 함께 할 크루를 찾기가 어려웠다. 그래서 학교를 들어가야겠다고 생각해 대학원에 진학했다. 거기서 단편을 찍고 한국영화아카데미에 진학하고 장편 과정까지 마치게 된 거다. 여기까지 오는 게 쉽지는 않았다. 그러나 하나는 남기고 죽어야 하지 않나, 하는 생각이 있었다. (웃음) 내가 비실비실 오래 가는 스타일이다.

단편 시나리오 때부터 남자아이가 아빠를 찾는 설정이었다고 했다. 전작들에서 여자아이를 주인공으로 삼았던 것과 비교했을 때 왜 남자아이의 여정이어야 했는지가 궁금하다. 녹양에게도 충분히 엄마와 관련된 미스터리가 주어질 수 있는 여지가 있는데 영화의 주된 여정에서 녹양의 역할은 어디까지나 보희의 조력자다.
이전 단편들의 주인공이 여자애들이었다고 해서 거기에 완전히 동화되거나 영화를 완전히 내 얘기로 채운 것은 아니었다. 남자 감독들도 여자 얘기를 할 수 있고 나도 내가 봐왔던 남자 얘기를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냥 보희와 녹양이 같은 아이들이 보고 싶었던 것 같다. 보희도 녹양이도 남자 같은 남자애랑 여자 같은 여자애 보다는 좀 섞인 아이들로 표현하고 싶었다. 거기서 왜 굳이 보희가 주인공이 되어야 했냐고 묻는다면, 아무래도 보희의 성격이 좀 더 이야기를 풀어나가기 쉬웠다. 녹양이는 옆에서 굳이 도와주지 않아도 알아서 잘 할 거 같은 느낌이지 않나.
보희 같은 성격의 여자 아이는 그리고 싶지 않았던 건가?
수동적인 여자 캐릭터는 이미 많이 그려졌다. 그래서 그걸 다시 그리고 싶진 않았고 바꿔서 얘기하면 더 재밌지 않을까 생각했다.
안지호, 김주아 두 주연배우는 어떻게 캐스팅했나.
원래 캐스팅할 때 어른이건 아이건 상관없이 배우 스스로가 그 캐릭터를 갖고 있는 듯 보이는 배우를 선호하는 편이다. 특히 아이들은 자기 성격이 보다 잘 드러나니까 그 안에 보희와 녹양이의 모습이 있는 친구들을 캐스팅하고자 했다. 안지호 배우는 다른 영화에 잠깐 출연한 걸 보고 왠지 그런 모습이 나올 거 같다 생각해서 만났는데, 생각보다 훨씬 보희의 모습이 많은 거다. (웃음) 그래서 같이 하기로 결정했다. 김주아 배우는 오디션 때부터 남달랐다. 별로 긴장하지도 않고 본인이 원하는 걸 얘기했다. 둘 다 캐릭터와 비슷한 느낌을 갖고 있어서 사실 별로 고민하지 않고 캐스팅했다.

아역 배우와 촬영할 때 어려웠던 점이나 특히 신경 썼던 부분이 있었나?
아이들이랑 동물 데리고 하는 촬영이 진짜 힘들다고 하는데 나는 그런 게 전혀 없었다. 내가 좀 더 내려가려고 노력하긴 했지만 그것보다는 애들이랑 놀면서 편하게 찍었다고 말하는 게 맞는 것 같다. 운이 좋았다. 아이들이 꾸밈이 없고 내 눈치를 보지 않아서 친구처럼 편하게 작업했다. 그럼에도 좀 더 주의를 기울인 게 있다면 아무래도 아이들이 성인 배우들보다 내 행동이나 말에 더 영향을 받지 않을까 하는 점이었다. 내가 무심코 한 말이나 행동이 아이들에게 상처가 되지 않을까 걱정했다. 그 점을 제외하면 사실 요구했던 연기도 어떤 큰 감정을 원하는 게 아니라 일상적인 모습들이 많았기 때문에 그냥 둘이 좀 더 친해졌으면 좋겠다는 마음만 있었다.
둘은 실제로 좀 친해졌나?
영화랑 똑같다. (웃음) 다른 사람들이 보면 진짜 보희와 녹양 같다고 신기해하더라.
보희와 녹양이라 이름은 어떻게 지은건가?
어떻게 보면 거기가 가장 의도적인 부분이다. 남자아이를 영어로 boy라고 하는데 이걸 우리말로 조금만 바꾸면 여자에게 많이 붙이는 이름이 되더라. 남자애들은 그런 여자 같은 이름 가지고 많이 놀리지 않나. 영화의 영문 제목도 <A Boy and Sungreen>이다. 녹양이라는 이름은 'Sungreen'을 한국말로 바꿔서 넣은 거다. 'Sungreen'은 <브로큰 플라워>(2005, 짐 자무쉬)에서 빌 머레이가 만나는 수많은 여자들 중 꽃집 아가씨로 나오는 단역의 이름이다. 그 캐릭터가 이상하게 마음에 많이 남더라. 녹양이 캐릭터랑은 조금 다르다. (웃음)
영화에 세 명이서 대화하는 장면이 꽤 있다. 그때마다 한 쪽에 한 명이 있고 반대쪽에 두 명이 있는데 이걸 찍는 방식이 다른 영화들과 조금 달랐다. 둘의 등이 보이고 그 사이로 맞은편에 앉은 사람의 정면이 보이는 식이다.
이 영화가 조금 만화적인 느낌을 가져가길 원했다. 만화에 많이 나오는 구도다. 그리고 아이들을 세트로 생각했기 때문에 2대 1의 형식으로 가져가길 원했다.
로드무비다 보니 로케이션이 많다. 장소 섭외하는 데 시간을 많이 썼을 것 같다.
스태프들이 고생을 많이 했다. 사실 예산이 많은 게 아님에도 불구하고 포기할 수 없었던 게 로케이션이었다. 이 영화는 대단한 플롯을 가지고 움직이는 영화라기보다는 아이들이 여기저기 돌아다니면서 나오는 느낌이 쌓여서 만들어지는 영화다. 우리한테는 사실 특별한 것 없는 공간이지만 아이들이 계속 자기들끼리 돌아다닐 때 생기는 이상한 느낌이 있다. 낯선 곳에 가 있는 아이들이 주는 감정을 유지하고 싶어서 로케이션은 최대한 다 가져가려고 했다. 아이들이 이동하는 장면도 마찬가지다. 우리가 지하철을 타거나 버스를 타는 건 그렇게 이상한 게 아닌데 애들끼리 지하철이나 버스를 타는 건 보기 쉬운 일은 아니지 않나. 아이들끼리 어딘가로 떠나는 느낌이 좋았다.
처음 단편의 엔딩과는 다른 현재의 엔딩은 어느 시점에 결정된 건가?
장편 시나리오 쓸 때도 초반에는 아빠를 못 만나는 설정이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 이렇게까지 돌아다녔는데 한번쯤은 만나야 하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더라. (웃음) 근데 그러려면 아빠가 떠났다는 설정이 있어야 하니까 그 이유에 대해서 생각을 하다 보니 이게 다른 여자가 생겨서 갔다든가 하는 흔한 이유는 아니었으면 했다. 보희가 그 사실을 알았을 때 좀 더 고민해볼 수 있는 그런 아빠의 개인적인 이유였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보희가 아빠를 만나고 아빠가 떠난 이유에 대해서 어떤 방식으로든 받아들였으면 좋겠다는 마음이었다. 사실 아빠의 상황을 보희가 완전히 이해했다고 말하는 것도 오만한 걸 테고, 단지 보희라면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심정으로 만들었고 그런 게 보이길 원하면서 앞의 장면들을 찍었다.

연출자로서 가장 좋아하는 장면과 가장 아쉬운 장면은?
가장 좋아하는 장면은 보희가 처음으로 가출하고 나서 둘이서 지하철역에서 헤어지는 장면이다. 그 장면이 찍고 나서 보니까 마음에 많이 남더라. 왜 그럴까 생각해봤는데, 영화 안에서 둘이 헤어지는 장면을 내가 좋아하는 거 같다. 둘은 혼자 설 수 있게 됐기 때문에 서로한테 더 좋은 존재가 아닐까. 물론 혼자 설 수 있었던 것도 서로 옆에 있어서 그런 거고. 그래서 그런 장면들을 좋아하는 거 같다. 아쉬운 건 개인적으로는 너무 많은데, 하나를 꼽자면 아빠를 만나는 장면이다. 원래 시나리오에서 생각했던 분위기는 굉장히 축제 같은 거였다. 다들 술에 취하고 골목의 왁자지껄한 분위기에서 아빠의 사정을 보희가 알게 되는 장면이었는데. 그 당시에 시간이 늦어져서 골목이 원래 내가 생각했던 골목이 아니고 엄청나게 조용해졌거든. (웃음) 그래서 나도 모르게 긴장을 했는지 그 장면을 되게 심각하게 들어간 거다. 근데 지금 볼 때, 또 어떻게 생각하면 맞을 수도 있다는 느낌이 들기도 한다. 그래도 사실 원래 그리고 싶었던 건 좀 더 밝은 분위기의 느낌이어서 그게 조금 마음에 걸린다.
본격적으로 영화에 뛰어들었다. 다음 계획을 일러달라. (웃음)
이번에는 좀 더 어두운 분위기의 판타지 장르물을 쓰려고 한다. 피도 좀 나고. (웃음) 십대 여자 아이가 주인공이 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