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이 살고 있었다
독립영화 반짝반짝전 <이태원> 강유가람
글 손시내 사진 김혜미 / Feature / 2019-06-02

유명 레스토랑, 카페, 술집을 따라 사람들이 많이 몰리며 ‘핫한’ 이국적 공간으로 인식되는 이태원. 과거 용산 미8군 기지촌으로 성장한 이곳에는 1970년대부터 미군 대상 유흥업소가 대규모로 자리하며 형성된 ‘후커힐’이라는 거리가 있다. 기지 이전에 관한 소문이 여러 해 떠돌고, 2003년 뉴타운 지정 이후 재개발 소식도 계속 들려오면서 이 공간도 변화를 겪었지만, 이곳을 떠나지 않는 많은 이들이 있다. ‘독립영화 반짝반짝전’에서 상영 중인 강유가람 감독의 <이태원>(2016)은 오랜 세월 이곳에서 클럽을 운영하거나 웨이트리스로 일했던 세 여성 삼숙, 나키, 영화의 모습을 담는다. 그들의 기억과 현재의 일상을 통해 공간을 어떻게 다시 인식할 것인지, 지워지고 가려진 여성의 역사를 어떻게 기록할 것인지를 <이태원>은 묻고 있다. 지배적인 담론으로는 포착되지 않는 공간과 역사에 관한 관심은 강유가람 감독이 <모래>(2011), <진주머리방>(2015)을 통해 꾸준히 탐구해왔던 주제다. 이는 또한 2016년 겨울 광장에서 촛불을 들었던 페미니스트들의 목소리를 담은 <시국페미>(2017)로 이어지기도 했다.

 

 

 

시간을 두고 영화를 볼 때마다 느낌이 다른 것 같다. 영화엔 2014년 당시 지방선거 풍경이 드러나기도 하는데, <이태원>에 담긴 공간은 이후 어떤 변화를 겪었나.

카메라를 처음 들었을 때가 2014년인데 선거철이라 들썩들썩했다. 재개발 조합 같은 곳에서도 활발하게 목소리를 냈고. 그래서 촬영하는 동안 뭔가가 급박하게 바뀔 거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런데 그렇지는 않았다. 다만 내가 찍었던 곳이 꽤 넓은 지구여서 지역별로 재개발 계획에도 차이가 있었다. 삼숙님 가게 ‘그랜드올아프리’가 있는 곳은 상업지구가 되면서 개별적 개발을 하게 되었고, 영화님이 사시던 곳은 이제 재개발 수순을 밟고 있다. 촬영 후에도 한 달에 한 번씩 그 지역을 방문하는데, 이제는 가게들 문도 닫혀있고 막 건물이 들어설 것 같은 분위기로 바뀌고 있다. 생각보다 조금 느리긴 하지만 변화의 흐름 안에 있는 것이다.

 

촬영은 2014년에 시작했지만, 영화의 시작은 2009년 용산 참사 이후에 참여했던 도시 공간 워크숍까지 거슬러 간다고 들었다.

당시 참여했던 캠프에서 그 공간에 대해 생각해보는 조별 활동을 했다. 함께 참여했던 분이 후커힐에 예전에 미군에 살해당한 여성이 일했던 클럽이 있으니 거길 같이 찾아가 보자고 했고, 남일당에서 그곳까지 쭉 걸어가며 공간을 각자 촬영해 보기로 했다. 부대를 지나서 후커힐까지 걷는 과정이 내게는 색다른 느낌이었다. 부대가 이렇게 크게 있어서 기지촌이 생겼고, 그러다 보니 주변 개발이 늦어졌다는 걸 몸으로 체험할 수 있었다. 그렇게 뇌리에 남아있던 공간에 실제로 사는 분들을 만나면서, 이곳에 사람이 살고 있다는 걸 직접 느끼게 됐고 더 밀착해서 카메라로 담고 싶었던 것 같다.

<이태원>

세 인물을 만나고 촬영을 하게 되는 과정은 어떻게 시작되었나.

지인이 그 지역에 있는 여성분들을 지원하는 현장 지원센터에서 활동을 했다. 막달레나의 집이라는 곳이다. 그분이 나키님과 길게 연을 이어오고 연락도 주고받는 사이여서 나도 나키님을 만나 뵙게 되고 나키님께 다른 분들도 소개받았다.

 

2년 반 정도의 촬영 기간을 거쳤다. 작업이 진행되면서 구상이 달라졌을 텐데. 

처음에는 변하는 공간의 모습과 이분들의 삶을 잘 녹였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시간의 흐름이 작품의 축이 되고, 거기에 삶의 이야기를 배치해야지 싶어서 구술을 잘 받고 싶었다. 그래서 인물별로 긴 시간을 들여서 여러 차례 인터뷰를 했다. 그런데 각자의 삶에서 중요한 사건이나 서사가 내가 처음에 생각했던 것과는 조금 다르더라. 나는 기지촌 경험 같은 것에 중심을 두고 질문을 구성해 갔는데, 이분들의 삶의 서사에서는 자신에게 중요했던 일들이 그보다 전에 시작되었거나, 자신을 괴롭게 한 일이 기지촌 생활에 꼭 국한되어 있지도 않더라. 그러면서 그 시절의 이야기를 많이 담기보다 이분들의 현재의 모습, 동네 사람 정체성 같은 것을 담는 쪽으로 변화됐다.

 

촬영을 마무리해야겠다고 생각한 시점은 언제였나.

나에게 여기까지 들려주실 수 있구나 하는 느낌이 왔던 것 같다. 마지막 인터뷰를 할 때 나키님이 왜 이곳에 오셨고, 예전에 결혼생활은 어땠는지를 한참 얘기해주셨다. 사실은 이런 얘기를 듣고 싶었던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막상 영화에는 못 쓰겠더라. 얘기하기 싫으셨던 것 같아서. 이 공간에서 자신이 어떻게 읽히는 존재이고, 이 공간에서 일했던 여자들한테 본인이 어떤 감정을 갖고 있는지 정도로도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김혜미

나키님, 삼숙님, 영화님과 만나고 관계를 맺으면서 작업을 진행한 시간이 굉장히 중요한 경험이었을 것 같다. 그만큼 어려움도 있었을 것 같고.

내가 경험하지 않은 다른 세상을 경험해 오셨고 나이 든 여성분들이다 보니 어떻게 다가가야 할지가 참 어려웠다. 캐릭터도 또 되게 다르셔서 각각 친해지는 시간이 많이 필요했다. 다큐멘터리를 찍을 때 인물과 어떻게 관계 맺을지는 다른 분들도 항상 고민일 것이다. 일단은 친해지고 싶어서 과일도 사가고 그랬는데, 삼숙님은 기브 앤 테이크가 명확하신 분이라 그걸 또 싫어하셨다. (웃음) 영화님은 연락 주고받는 걸 좋아하셔서 연락이 안 되면 서운해하기도 하시고. 정말 시간이 중요했던 것 같다. 자주 찾아뵈러 가다 보니 좋은 이야기도 많이 들려주셨고, 카메라에 담기지 못한 것들도 나한테는 다 남아있으니까 그런 경험이 좋았다.

 

세 인물에 대해 좀 더 이야기를 해보면 좋겠다. 삼숙님의 경우에는 계속해서 공간을 만들고자 하는 사람이라는 게 인상적이더라. ‘그랜드올아프리’도 그렇지만, 호텔을 만들고 싶다는 이야기도 들려주시지 않나.

삼숙님은 처음에는 생선 장사를 하셨고 이태원에 오시기 전에도 이미 미군 부대 옆에서 작은 잡화점을 하셨다. 미군들의 달러를 따라서 돈을 벌기 시작하신 거다. 그런데 한국 사람들이 기지촌에서 벌어들인 달러는 귀하게 생각하면서 그 공간에서 일했던 여성들이나 그 지역에 대해서는 안 좋은 인식을 갖지 않나. 그런 얘길 자주 하셨고 그에 대한 자기방어도 크셨던 분이다. 70년대 초반에 이태원에 오시면서 빚을 많이 지고 ‘그랜드올아프리’를 인수하셨다. 그래서 이 공간을 내 것으로 만들고 지켜야 했다는 얘기를 해주시면서, 그전에는 일은 힘들었어도 여성국극도 보러 다녔는데 이태원에 오고 나서는 그런 걸 한 번도 못 했다고 하시더라. 또 여성들끼리의 관계망도 쫀쫀하게 이어가신다. 영화 말미에 요양원 같은 델 찾아가시는데, 그분들이 생선 장수 시절에 만났던 분들이다. 아무튼 품이 넓고 따뜻한 분인데 편견 같은 건 또 세게 말씀하시고 되게 복합적인 인물이었던 것 같다.

<이태원>

나키님은 다정함을 많이 느끼게 하는 인물이다. 현재를 꾸려가는 모습을 보면 참 강인한 분이라는 생각도 들고.

나키님은 한시도 몸을 가만히 두지 않으시고 계속 움직이시며 정말 열심히 사시는 분이다. 돈을 벌든 본인 몸을 보살피든 기도를 하러 가든 항상 최선을 다하는 분이라는 생각을 많이 했다. 그러니 젊었을 때는 얼마나 더 열심히 사셨을까 싶고. 그런데 지금까지도 계속 힘들게 일을 하셔야 하지 않나. 그런데도 현실은 나아지지 않는다. 자본이라는 게 여성의 몸을 스쳐 지나가는 것 같다는 생각이 많이 들었다. 이태원은 이런 여성들의 땀과 노동으로 융성했지만, 과연 그 돈들이 다 어디로 갔을까 하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분들의 삶은 씩씩하니까 거기서 느껴지는 힘이 있다. 삶에 대한 의지도 많이 느끼게 되었고. 그리고 정말 따뜻함이나 다정함이 있는 분이다. 가면 꼭 부침개나 먹을 것들을 내주시고 요리도 해주시곤 했다.

 

영화님은 되게 거침없이 말씀하시는데 거기서 어떤 친밀함이 느껴졌다. 조카와 함께 사시다 보니 그런 부분들이 더 와 닿기도 했던 것 같고. 조카의 손을 가만히 잡는 장면이 있는데, 그런 신체적인 접촉이 드러나는 순간들이 좋더라.

영화님은 자기 삶에 대해 남들이 뭐라고 하든 말든 정말 쿨한 태도가 있는 분이었다. 그런데 촬영할 당시에는 몸이 좀 안 좋으셔서 집 밖에 나가는 걸 싫어하셨다. 그래서 영화를 본 사람들은 우울해 보인다는 얘기도 하는데, 만날 때면 항상 유쾌하고 잔정도 제일 많으셨다. 그리고 사실 조카를 너무너무 사랑하는데 또 같이 살다 보니까 고민도 많으신 것 같더라. 아이가 커갈수록 사춘기도 오고 여러 가지 사정이 있다 보니. 미군과 결혼해서 미국에 갔던 이야기를 많이 해주실 줄 알았는데 그 얘긴 생각보다 많이 하고 싶어 하지 않으셨다. 그냥 말을 안 했다고만 하시지 않나. 외롭고 답답하셨겠구나 싶더라.

ⓒ김혜미

이태원이라는 공간과 기지촌의 역사를 이미 존재하는 자료들을 통해 제시하거나, 공적 기억을 한 축에 두고 진행되는 영화는 아니다. 현재의 그 현장에 굉장히 밀착되어 있고, 자료를 쓰더라도 개인적인 사진이나 비디오 클립을 사용했다.

초기에는 피칭 같은 걸 하게 되면 이태원이 어떤 곳인지 사람들에게 인식을 좀 시키고 시작해야 하지 않느냐는 얘기도 들었다. 이태원과 이태원의 역사성을 매핑하는 게 편집할 때 좀 어려웠다. 그런데 어쨌든 내가 보여주고 싶은 건 이분들의 기억과 현재, 그리고 지금 우리는 어떻게 이 시공간을 같이 살고 있는가 하는 점이었다. 아주 멀리 떨어진 게 아니라 서울에 있는 사람이라면 가까운 공간이니까 그런 접점을 표현하고 싶었던 것 같다. 그런데 나키님이 영화를 보시고, 이태원에 ‘그랜드올아프리’만 있었던 게 아니라 다양한 클럽들이 있었는데 그게 드러나지 않아서 좀 아쉽다고 말씀하시더라. 그런 반응을 통해서 또 나도 나름대로 취사선택 했다는 걸 느끼기도 했다.

 

클럽에서 웨이트리스 일을 하다 결혼한 여성들이 일했던 걸 감춘다는 얘기가 나올 때, 감독님이 삼숙님께 “웨이트리스 하고 그런 게 나쁜 일은 아니지 않아요?”하고 질문을 던지는 순간이 있다. 이 장면에 관해 물어보고 싶었다.

음... 그 장면이 어땠나. 그렇게 물어보는 게.

 

비슷한 질문이 들던 차에 영화 안에서 질문을 던지니까 좀 신기하더라. 1, 2초 정도 주저하는 느낌도 있었고. (웃음)

그게 참, 촬영하면서 인물을 다 파악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내가 나름대로 상을 만드는 과정이 필요하고 그 과정에서 생기는 질문들이 있는데 그걸 바로바로 물어보긴 되게 어렵더라. 그게 이분에게 어떤 의미인지도 좀 생각해봐야 하고. 삼숙님을 오래 만나오고 한참 있다가 나온 이야기인데도 진짜 용기가 필요했다. (웃음) 화를 내시거나 카메라를 물리시면 어떡하지 생각하기도 하면서. 내가 그렇게 직접적으로 질문을 던지는 걸 주저하는 성격이기도 한데, 그래도 한 번은 꼭 물어보면 좋겠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이태원>

이태원에서 일하는 여성들에 대한 시선을 의식하는 태도에 관련된 궁금함이었던 건가.

그렇다. 클럽에서 일했던 웨이트리스들에 대해서 자랑스러워하시면서도 후반부에선 조금씩 다르게 얘기하신다든지 하는 양가적인 감정을 보이시지 않나. 그런 부분들이 결국은 이태원의 여성들을 바라보는 한국사회의 이중적인 태도를 보여준다고 생각한다.

 

편집하는 과정도 쉽진 않았겠다. 기간은 어느 정도 걸렸나.

10개월 정도는 집중해서 편집했고, DMZ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에서 상영한 이후에 조금 더 고쳤다. 다시 보면서 배치 같은 것을 수정했다. 그래서 지금의 완성본이라고 생각하는 데까지 걸린 시간은 1년 반 정도 되는 것 같다.

 

편집 과정에서 중점적으로 염두에 둔 부분은 무엇이었나.

일단 시간의 흐름이 분명히 있는데 이분들의 일상은 늘 같다 보니까, 변화와 일상을 매치하면서 흐름과 리듬을 어떻게 만들어낼지를 고민했던 것 같다. 그랬을 때 우사단로에서 작업하는 청년분들의 여러 가지 활동들이 도움이 됐다. 이것저것 다양한 활동을 하시니까 공간의 변화를 보여주는 데 힘이 되었다. 그리고 작품 내적으로는 세 인물이 같은 타임라인에 올라가는 것에 대한 고민이 컸다. 낙인이나 편견에 대해 삼숙님이 얘기하시는 부분들이 같은 선상에 있는 나키님과 영화님께 상처가 되면 어떡하지 하는. 이분들의 삶의 맥락을 함께 살릴 수 있는 방식을 찾는 게 좀 어려웠다.

ⓒ김혜미

연출자의 위치를 어디에 두고 어떻게 드러낼 것인지도 고민스러운 부분이었겠다.

<모래>를 만들었을 때도 아버지를 찍으며 그런 고민을 했다. 내가 가진 궁금증이나 인물과의 대화를 통해 해소하고 싶은 나의 문제는 어쨌든 내 사정인 것이고, 나와 의견이 다르다고 해서 영화에서 다르게 묘사하지 않아야겠다는 생각이 있다. 모든 인물에겐 어떤 식의 납득할만한 이유가 있고, 그럼 그런 이유가 어떻게 생겨났는지를 조금 넓게 들여다보고 싶다. 그랬을 때 내 위치도 더 드러날 수 있겠다는 생각도 들고. 물론 내가 느끼는 불편함이나 원하는 이상이 있기도 하겠지만, 인물이 살아온 세상과 구축해온 시간에는 그 역사적 맥락이 있는 것이니까. 그 맥락을 보여준다면, 어쩌면 그게 내게 있었을지도 모르는 편견을 솔직하게 드러내는 계기도 된다고 생각한다.

 

2017년에는 <시국페미>를 만들었다. 공간과 여성의 역사를 기록하는 것에 대한 관심은 어떻게 이어지고 있나.

그동안 작업하면서 공간을 여성의 시각으로 읽어내려고 하는 시도들을 해온 것 같다. 일상적인 일들을 여성의 시각으로 읽어내는 게 좀 어려울 수 있겠지만, 그럼에도 여성들은 어떤 일이든지 성별화된 형태로 영향을 느낄 수밖에 없기 때문에 그게 잘 드러나면 좋겠다는 생각은 항상 가지고 있다. 그걸 좀 다른 방식으로 확장하거나 나 스스로도 페미니스트로서의 정체성을 더 탐구해보고 싶은 생각도 있어서, <시국페미>처럼 더 넓은 의미에서의 공간인 공론장과 그 안에서 여성의 목소리에 관심을 갖게 되기도 하고. 공간 속에서 여성의 삶이 어떻게 지워지는지, 기록되지 않으면 어떻게 잊히는지를 늘 떠올리게 된다. <시국페미> 출연자분이 트위터에 이렇게 남기신 적이 있다. 촛불에 관한 백서에 페미존 이야기가 없더라고. 그렇게 사소한 일로 취급되는 것이 안타깝고, 그래서 더 부러 찾아서 의미화할 필요가 있는 것 같다. 또 단지 기록의 차원이 아니라 더 많은 사람에게 공감을 받고 더 의미 있게 기억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고민이 된다.

<시국페미>

<이태원>이 ‘독립영화 반짝반짝전’에서 상영 중이고, <시국페미>의 경우 중편 정도의 분량이다 보니 관객을 만나는 다양한 방법에 대해 생각하게 될 것 같다.

상영이나 배급에 대한 돌파구 같은 것들을 많이 상상해야 하는 시기인 것 같다. 앞으로 어떻게 계속 작업을 이어갈 수 있는가를 생각할 때도 그렇고. 그런데 지금의 상상력으로는 계속 극장만을 생각하게 되는 것 같다. <시국페미> 같은 경우에는 ‘퍼플레이’(여성영화 전용 모바일 스트리밍 앱 서비스)라는 서비스를 통해 온라인으로 볼 수 있는 방식을 생각해보고 있다. 최근에 반짝반짝전을 진행하면서 유튜브 채널이 생겼더라. (유튜브 채널 ‘CH 가지’ https://www.youtube.com/channel/UCYSkPDz5Avi3UMCbhfROs-A) 그런 것들이 더 활성화될 수 있으면 좋을 것 같다. 

 

다음 영화는 90년대와 2000년대 초반 페미니스트 활동을 주제로 한 작업이 될 거라고 들었다.

작업을 구상한 지는 꽤 오래됐다. 그런데 계속 미루어지기도 했고 바뀐 지점들도 있다. 처음에는 아카이빙에 가까운 느낌으로 생각했었는데, 기획하다 보니 굳이 영상으로 담을 거라면 조금 다른 이야기를 하는 게 좋지 않을까 싶더라. 그때 당시에 유명했던 활동가분들이 계시는데, 그분들 말고 그때 활동은 했지만 그렇게 유명하지도 않았고 그냥 그 자장 안에 있었던 사람들이 30대 후반이 되고 40대가 돼서 어떤 삶을 살고 있는지로 질문이 좀 바뀌었다. 그래서 그분들이 살아가는 지금, 현재의 모습을 담을 것 같다. 또 현재로 가게 됐다. (웃음)

ⓒ김혜미
Feature
국수 먹고 맴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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뿔뿔이 흩어졌다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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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손시내 사진 이영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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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과 의심의 크로스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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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차한비 사진 이영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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