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년 한국에서 최초로 원폭 피해 2세임을 공개적으로 밝힌 고(故) 김형률 선생. 원폭 피해 2세 환우들의 건강과 권익을 위한 시민운동에 헌신한 그는 2005년 서른 다섯의 나이로 짧은 생을 마감했다. 부산에서 활동하며 사라져가는 공간에 대한 다큐멘터리 작업을 꾸준히 이어오던 김지곤 감독은 김형률 선생이 세상을 떠나고 오랜 시간이 흐른 뒤에야 그의 존재를 알게 되었다. '반핵 인권운동에 목숨을 건' 그의 짧은 삶과 오랜 꿈에 대한 죄책감은 결국 김지곤 감독을 <리틀보이 12725>로 이끌었고, 그는 이번 영화에서 김형률 선생이 남긴 일기와 시를 중심으로 그가 못다한 이야기를 세심하게 들려준다. <리틀보이 12725>에 등장하는 이미지와 사운드의 실험적 몽타주는 활동가와 투사로서의 업적과는 또 다른 결을 지닌 그의 내면을 보여주기 위한 효과적인 방편이다. 지난해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처음 공개된 후, 부산독립영화제와 서울독립영화제, 올해 서울인디다큐페스티발 등의 영화제에서 상영됐던 <리틀보이 12725>는 6월 5일까지 계속되는 '독립영화 반짝반짝전'에서 관객을 만나고 있다. 임흥순 감독의 초대로 전주국제영화제에 들른 그에게 인간 김형률에 관해 물었다.
임흥순 감독하고는 함께 작업한 적이 있나.
부산에 삼성극장이라고 오래된 극장이 있었다. 거길 찍은 단편이 <오후3시>(김지곤, 2009)다. 철거 직전, 극장에서 그 작품을 전시했는데, 하루는 위층에서 누가 흰 천에다 빔을 쏘고 있더라. 낡은 건물이어서 인가. 그 날 갑자기 정전이 됐다. 안내하는 사람도 없어서 두리번거리는데 위에서 빔을 쏘던 그가 와서 슬쩍 말을 걸었다. 그 분이 바로 임흥순 감독님이었다. 이후로 몇 번 교류하며 친해졌고 <비념>(임흥순, 2012) 때 촬영을 도와줄 수 있냐고 해서 작업을 함께 하게 됐다. 그 이후로 인연을 이어오고 있다.
부산 민주공원 소식지를 보고 김형률 선생의 삶에 관해 뒤늦게 알게 됐다. 어떤 계기로 영화를 만들어야겠다고 결심했나.
당시 부산 작가가 히로시마에 갈 수 있는 작가 레지던시 사업에 선정된 상태였다. 히로시마에 최대 2주 정도 머무르면서 어떻게든 결과물을 내고 전시를 해야 하는데, 그 짧은 기간 안에 영상 작업을 완성할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그래서 가기 전에 부산에서 먼저 준비할 수 있는 게 없을까 고민했다. 그러다 우연히 소식지에서 김형률 선생을 접하게 된 것이고. 먼저 김형률 선생 관련 서적을 읽고, 선생 아버지도 찾아뵙고. 자연스럽게 이 주제로 히로시마에서 전시를 진행했다. 이후에 설치영상과 사진을 갖고 부산에서도 전시를 이어갔고. 전시를 끝내고 나니 이걸 다큐멘터리로 풀어보면 어떨까 싶어서 아버님께 먼저 더 작업해도 되겠냐고 여쭸는데 괜찮다고 하셔서 다큐 작업을 시작했다. 사실 전시 뒤에 이어서 다큐 작업을 한 건 이번이 처음인데 정말 좋았다. 다큐멘터리는 감독이랑 제작진이 편집하면서 이렇게 저렇게 붙여보다가 아니다 싶으면 다 엎고 새로 시작하지 않나. 그런데 전시는 과정에서 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그 관객들의 피드백을 받고 수정할 수 있어서 좋았다.
다큐멘터리 작업으로 전환하면서 달라진 부분이 있나?
우선 사이판 티니안 섬과 나가사키 등으로 이야기가 더 확장됐다. 처음에는 조금 더 예산이 있으면 핵실험을 했던 텍사스도 가고 싶었다. 『카운트다운 히로시마』(스티븐 워커 지음, 2005, 황금가지)라는 책이 있는데, 그 책을 보면 핵실험을 처음 할 때 다들 어느 정도 규모일지도 몰랐다고 나온다. 미리 사람들한테 알리지도 않고 진행했다고 하고. 핵이 터지는 순간 학교 가는 차 안에 있던 한 학생이 금방 뭐가 번쩍 한 거 같은데 무슨 일이냐고 물어봤다더라. 그 아이는 시각장애인인데 그 빛을 느꼈을 정도니 이게 도대체 어느 정도였는지 궁금하더라. 이번 영화에 등장하는 노래 ‘리틀보이’의 가사도 그 당시 실험 현장에 있던 과학자들이 실제로 했던 말들을 가지고 쓴 거다. 그래서 거기도 가볼까 했는데 아쉽게도 실행에 옮기진 못했다. 그래도 그런 식으로 이야기를 확장해 가면서 사이판 티니안 섬에 갔고 히로시마에도 좀 더 오래 머무를 수 있었다. 또 중요한 게, 전시 작업할 때만 해도 아버님이 김형률 선생님의 일기장 얘기를 안 하셨다. 아버님 방에 선생님 유고집을 비롯한 책에서 봤던 일기의 친필 원본이 있었는데. 아버님 나름대로 기준이 있었던 것 같다. 자식이 남긴 친필 원본인데 빌려가서 안 주는 사람도 있을 수 있고 하니. 나중에 알게 됐지만 몇 월 몇 일에 누가 빌려갔다는 것을 꼭 적어 놓으신다. 그런데 어느 날 아무렇지 않게 일기장 얘기를 꺼내시더라. 일기장은 왜 안 보냐고. (웃음) 그래서 일기 속 내용을 발췌해서 영화 전반에 걸쳐 비중 있게 사용했다. 지금은 아버님께서 일기장을 포함한 김형률 선생님 유품을 민주공원에 기증하신 상태다.

왜 기증을 결심하신건가?
아버님은 그 방을 기념관이나 자료 공간처럼 만들고 싶었다. 하지만 관리할 사람이 없고 예산도 없고 본인이 계속 소개해주기에는 한계가 있다고 느끼셨고. 처음에는 합천에 원폭자료관이 생겨서 거기에 공간 문의를 했는데 얘기가 잘 안됐다. 그래서 매년 추모제를 진행했던 인연으로 민주공원에 기증을 한 거다. 그리고 작년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이 영화를 상영하기 직전에 아버님이 갑자기 뇌출혈로 쓰러지셨다. 어머님은 치매 증상이 조금 있었는데 더 심해졌고. 그래서 두 분 다 부산을 떠나서 요양원에 계신다. 선생님 방을 포함해서 부모님 집을 부동산에 내놓은 상태까지는 전해 들었는데 그 이후는 우리도 확인할 수 없었다. 추모제도 더 이상 부산에서 안 하고 합천에서 할 예정이라고 하더라. 사실 영화에 등장하는 이노우에 리에 작가의 전시처럼 다큐 작업이 끝나도 부산 선생님 방에서 매년 전시를 하고 싶었다. 다른 작가들을 초대해서. 그런데 방 자체가 없어진 거다.
이노우에 리에 작가가 김형률 선생님 방에서 하는 전시는 영화 작업의 일환이었던 건가?
그렇다. 리에 작가가 나가사키 출신인 건 알고 있었는데 원폭 피폭 3세라는 건 몰랐다. 아버님하고 어머님을 만났을 때 본인이 그 얘길 하더라. 그래서 미술 감독으로 참여해서 같이 작업하자고 했다. 리에 작가의 남편은 우리 다큐멘터리 음악 감독이기도 하다. 여러 얘기를 나누다가 최종 정리된 전시 참여 형태가 영상에 나온 방식이다. 그 아파트가 오래 돼서 공용화장실을 쓴다. 사람들도 다 사는 곳이고. 그래서 너무 많이 오가면 문제가 되니까 한 시간에 몇 명씩 오도록 미리 신청을 받아서 인원을 제한했다. 전시할 때는 이게 촬영이 되고 있고 영화에 나올 수 있다는 내용의 동의서를 받았고. 리에 작가는 단순히 작품만 만들기보다는 자기가 직접 그 방에 머물면서 작업 하고 싶다고 해서 우리 집에서 열흘 정도 지내면서 선생님 방을 오가며 작업했다.


후반부에 등장하는 김형률 선생님의 시가 담긴 문집도 일기장 원본처럼 주요한 사료 중 하나다.
나는 그분이 살아계실 때 한 번도 만나본 적이 없으니 촬영 본이 없었다. 그러니 다큐멘터리 작업을 하게 되면 살아계실 때 같이 활동하셨던 분들만 화면에 담게 될 텐데, 그렇게만 표현하면 한계가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다른 게 어떤 게 있을까 스텝과 얘기 하다가 생각한 게 선생님 일기장에 등장하는 ‘새마음 야학’이었다. 야학 자체가 지금은 당연히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대학생인 우리 막내 스태프가 자기 친구가 요즘에도 야학에 봉사활동을 나간다고 해서, ‘새마음 야학’을 검색해 보니 있더라. 지금 교장 선생님도 김형률 선생이 졸업생인지 몰랐다고 하더라. 그분 도움으로 야학에서 김형률 선생이 쓴 시와 문집을 발견했다.
처음에 그 시들을 읽었을 때 어떤 느낌이었나.
이분이 커밍아웃 이후에는 자기를 알리고 목소리를 내기 위해 글을 썼다. 몸이 안 좋으시니까 밖에 나가긴 어렵고. 그런데 컴퓨터와 이메일이 있으니 폭발적으로 글을 쓰신 거다. 단지 자기의 개인적인 생각을 표현하고자 했던 것이 아니라 자신이 뭔가를 해야 되겠다는 집념으로 글을 쓰신 거지. 그런데 시는 그 이전에 쓰신 거다. 김형률 선생의 투사, 활동가, 운동가의 이미지 이면에 다른 모습이 거기에 담겨 있었다. 시를 실제로 잘 쓰고 싶어 하셨던 거 같기도 하다. 연습도 많이 하시고. 일기에 보면 신춘문예 접수 일정도 체크되어 있더라. 사실 다큐 작업 중에 인터뷰할 때마다 시를 먼저 드리고 그 중에 아무거나 마음에 드는 것을 읽어달라고 했다. 읽다가 눈물을 흘리는 분도 계셨다. 이걸 다 찍긴 했는데 최종적으로 영화에는 야학에 같이 다니셨던 분이 읽어주신 것만 썼다. 그리고 관객과의 대화가 있는 날에는 선생님 시를 엮어 만든 작은 시집을 드리고 있다. 영화 보고 나서 시도 읽으면 관객 분들이 김형률 선생을 알아가는 데 있어 폭이 좀 더 넓어지지 않을까 해서.


영화에서 반복되는 물 이미지는 많은 의미를 품고 있다. 김형률 선생의 어머님이 뛰어노셨을 물이기도 하고, 희생자들이 뛰어들었던 강변이기도 하고
물은 전시할 때부터 이어진 관심사다. 히로시마에 가면 강이 시내 중심을 흐른다. 집을 가기 위해 건너는 강과, 동시에 원자폭탄 떨어졌을 때 뜨거우니까 사람들이 뛰어들고 시체가 떠내려 오기도 했던 그 강은 그래서 산 자와 죽은 자가 뒤섞이는 공간이다. 처음에 갔을 때는 강 밖에서 물만 찍었는데 다큐 작업 때문에 다시 가게 되면서 배를 두 번 탔다. 그래서 한 번은 하늘을 찍고 두 번째는 물만 찍어서 그걸 편집해 영화에 넣었다.
흐르는 물과 폐허의 이미지를 동시에 담아내서 인상 깊었다. 영원한 듯 보이는 영광스런 건물 또한 시간의 흐름 속에서 폐허가 될 수 있음을 말하는 것처럼 보였다. 폐허로서의 원폭 돔 이미지와 강 이미지의 병치도 강렬하고.
사실 그 원폭 돔은 계속 보수공사를 하고 있다. 조명도 밤에 예쁘게 해놓고. 그거 때문에 사람들이 많이 오니까. 특히 8월에 유등행사 때는 예약 받고 줄까지 서야 할 정도다. 희생자들에 대한 추모를 뭐라 하는 건 아니지만 근본적 반성 없이 이런 것만 강조하는 것에 대해서 김형률 선생이 얘기하신 것을 나 또한 느낄 수 있었다. 원폭 자료원에 가면 그 당시 8시 15분에 멈춰 있는 녹은 시계가 있다. 그리고 밥은 검게 탔는데 철은 그대로 있는 도시락통도 있고. 슬프긴 슬픈데 그거 말고 다른 큰 이야기들은 없는 거다. 어떻게 이 히로시마를 바라봐야 할까 생각이 많았다. 그런 생각들을 다큐멘터리로 표현하면서 사실 설명을 어디까지 적어야 할까도 고민이 되더라. 같은 히로시마 현 안에 차로 가면 4-50분 거리로 한쪽에는 히로시마 원폭 돔이, 다른 한쪽에는 2차 대전 당시 세계 최대 전함으로 건조된 야마토 전함의 모형으로 유명한 야마토 뮤지엄이 있다. 그게 딱 지금의 일본 모습이다. 여기는 반성하는 거 같지만 저기는 아직도 욱일기가 있고. 근데 예를 들어 이게 같은 히로시마 현 안에 있다는 설명을 넣어야 할까? 어쨌든 영화인데 이미지로 사람들이 생각하는 부분도 있어야 하지 않나? 이미지로 보면서 관객이 상상할 수 있고 생각할 수 있는 부분을 남겨둬야 한다는 마음과 역사적인 사실을 어느 정도는 설명으로 적어줘야 한다는 마음 사이에서 고민이 많았다.

영화 후반부에 등장하는 일련의 실험적 몽타주 시퀀스를 봤을 때 확실히 이미지와 사운드의 몽타주만으로 무언가를 표현하고자 하는 마음이 느껴졌다.
그 시퀀스를 많이 어려워하시더라. 핵실험 카운트다운 당시 아름다운 교향곡이 같이 나왔다고 해서 그런 모순의 상황들을 떠올리며 작업했다. 영상에 나오는 삼나무는 히로시마 히바야마 숲에 있는 1000년 된 삼나무다. 원폭이 터졌지만 거기까진 피해가 안 간 거겠지. 계곡도 그 숲에서 찍었는데 거기 일본 건국 여신을 모시는 법당도 있다. 일본인들은 법당 속 여신의 그림을 신성한 것으로 여겨 제대로 쳐다보지도 못한다. 그리고 그 숲이 오래 됐으니까 히바곤이라고 하는, ‘빅 풋’ 같은 큰 유인원에 대한 소문도 있고. 이걸 어떻게 정리해야 하나. (웃음) 부산에도 김형률이라는 반핵 인권운동가가 있었지만 아직도 고리 원전 발전소가 멀쩡히 돌아가고 있다. 티니언 섬에도 그 아름다운 자연환경 속에 강제 집용의 아픈 역사들이 있고. 처음엔 그 설명들을 조금씩 적었다가 아무래도 자막을 읽게 되면 이미지에 집중할 수 없어서 다 뺐다.
공간과 인물에 대한 관심이 이번 작품에서 더욱 극적으로 확장됐는데.
지금 참여하고 있는 오민욱 감독의 <해협>도 로케이션이 다양하다. 대만도 가고 중국도 가고 일본도 가고. 그런데 자연스러운 수순인 것 같다. 작업하면서 하나에 매몰되기 보다는 좀 더 확장해서 연결해보고 크게 아우르는 뭔가를 찾아보게 된다. 그리고 ‘할매’ 연작부터 같이 하고 있는 이 ‘탁주조합’의 멤버들이 발전하면서 서로 영향을 주는 부분도 있다. 내가 이 정도까지만 생각할 수 있는 부분이 같이 하고 있는 오민욱 감독이나 손호묵 조감독과 얘기하면서 넓혀진다. 서로 공부하면서 의견을 귀담아듣고 그걸 반영해서 찍어보고. 그렇게 서로 조언을 구하면서 관심과 경험이 확장되는 것 같다.
전시 때와 영화의 제목이 다른데.
전시 제목은 ‘메아리’였다. 이마무라 쇼헤이의 <검은 비>(1989)라는 영화가 있는데 히로시마 원폭 이후에 하늘에서 떨어진 검은색 비를 뜻한다. 그때는 그게 방사능인지 뭔지 모르는 상황에서 비를 맞지 않았나. 1945년 8월 6일 8시 15분에 원폭이 떨어졌는데 그 숫자들을 가만히 보다가 과연 원폭이 떨어진 날부터 오늘까지는 며칠일지 생각했다. 그래서 한 프레임을 하루씩 잡아서 총 작품길이를 정했다. 원폭이 투하 된지 25662일째인 2015년 11월 8일 비가 내리는 날 숙소에서 원폭 돔까지 걸어가면서 하늘을 촬영했고 이를 25662 프레임으로 편집한 거다. 그 사이사이 김형률 선생이 태어난 날, 내가 태어난 날, 김형률 선생이 돌아가신 날에 해당되는 프레임에 <검은 비>에서 따온 사운드를 넣는 식으로 구조를 잡았다. 완성된 작품은 전시 공간 천장에 쏘는 식으로 공개했다. 그러면서 시간 개념을 생각한 거다. 사실 김형률 선생님이 날짜로 몇 년 살았다고는 생각하는데 며칠 살았다고는 잘 생각 안하지 않나. 영화 제목에 선생님 사셨던 기간이 들어가면 어떨까 생각했고 <리틀보이 12725>로 정했다. 앞서 말한 시를 생각해보면 선생님이 쓰셨지만 문집으로만 있었을 뿐 사람들은 듣지 못한 거였지 않나. 누군가가 듣는다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숫자 때문에 읽기 힘들다고 말하시는 분들도 계시지만. (웃음) 그래도 제목에 선생이 살아낸 날을 넣으면 김형률이란 사람에 대해서 한 번 더 생각해 볼 것 같았다.

추모제 영상이 나오고 나서 어머님의 독송 장면으로 연결된다. 반핵 인권의 상징으로서 많은 사람들이 아들을 기억하고 또한 추모하고 있지만 그렇다고 어머님의 상처가 아무는 것은 아닐 거다.
어머니가 계속 하루도 안 빠지고 금강경을 외우신다는 얘기를 처음 들었을 때부터 이걸 영화적 이미지로 담아내고 싶었다. 어머니가 일어나시기 전에 내가 여기 와서 문을 열고 들어와 있어야 처음 방에 들어오시는 것부터 찍을 수 있으니 다음 날 아침 일찍 5시쯤 일어나서 갔다. 근데 찍으면서 어머니가 선생님을 기억하는 혼자만의 시간을 내가 와서 방해하고 있다는 생각이 많이 들었다. 그래서 그날 찍고 두 번 정도만 더 촬영 했다. 리에 작가도 말하기를, 자기가 여기 올 때마다 와줘서 고맙다고 얘기는 해주시지만 부모님 입장에서는 아픈 얘기를 또 꺼내야 되는 거니 그게 마음에 걸린다고 하더라. 관객 중에 어머님 인터뷰는 없고 아버님 인터뷰도 짧게만 넣은 이유가 있냐고 묻는 분이 계셨다. 굳이 그걸 안 여쭤 봐도 충분히 이 안에서 아픔이, 자신 때문에 아들이 그렇게 갔다는 죄책감이나 자책이 느껴지기 때문에 더 묻거나 하지 않았다고 대답했다. 결국은 제도적인 측면을 통해서 국가 간에 해결해야 할 문제들이 있을 텐데 그런 거 말고 다큐멘터리가 이분들한테 어떤 실질적인 도움을 드릴 수 있을까. 다큐가 할 수 있는 게 어디까지일까 생각을 많이 했다. 8월이 되면 원폭 1세, 2세에 대한 기사들이 많이 나올 텐데, 이 영화나 시집이 김형률이란 사람을 또 다른 방식으로 기억할 수 있는 매개로서 다가갔으면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