뿌리 깊은 방랑자를 찾아
<굿바이 마이 러브NK: 붉은 청춘> 김소영
글 정한석 사진 김혜미 / Interview / 2019-05-16

김소영 감독의 <눈의 마음: 슬픔이 우리를 데려가는 곳>(2014), <고려 아리랑: 천산의 디바>(2017), <굿바이 마이 러브NK: 붉은 청춘>(2019)은 이른바 ‘망명 삼부작’으로 명명된다. 혹은 감독 스스로의 다른 표현처럼 ‘고려 시네마’라고 불려도 될 것이다. 시작은 고려인이 운영하는 안산의 작은 식당. 학교 수업의 일환으로 찾아간 곳이었다. 하지만 김소영 감독은 그 곳에서 깊은 창작의 영감을 얻었다. 망실된 역사가 그녀를 소환했다. 그러니까 그녀는 고려인의 역사 안으로 들어갔고, 중앙아시아의 풍경에 몸을 맡겼으며, 그들의 문화 안에서 그들을 대면했다. 삼부작의 마지막 작품 <굿바이 마이 러브NK: 붉은 청춘>이 마침내 개봉했다. 우리는 이 영화를 통해 격동하는 1960년대 북한에서 소비에트로 영화 유학을 떠난 뒤 고국으로 돌아가지 못한 유라시아의 영화 망명자들과 만난다. 그 뜨거웠던 붉은 청춘을 영화는 온화하면서도 긴장감 있게 바라본다. 인터뷰에 응한 김소영 감독은 때로는 유쾌한 웃음으로 때로는 내밀한 직감으로 때로는 깊은 혜안으로 <굿바이 마이 러브NK: 붉은 청춘>을 포함한 ‘망명 삼부작’에 관한 생각을 들려주었다.

 

 

 

작업의 시작을 얼마간은 알고 있는 저로서는 이번 영화를 보고서 대장정이 끝났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만드신 분 입장에서는 감회가 훨씬 더 깊고 넓을 것 같은데, 즉자적인 감회나 소회 같은 걸 들려주신다면요.

여기까지 고려인들의 집단 소망이 끌어온 것 같아요. 다큐멘터리를 만들면서 느낀 게, 어떤 집단의 오래된 소망이 카메라라는 매체를 만났을 때 그것에 에너지를 주는 것 같거든요. 1865년부터 시작된 이주의 역사에 비하면 사실은 굉장히 빨리 끝난 거예요. 2014년에 시작해서 2019년에 3부작의 마지막을 개봉했으니까.

 

저한테 '망명 3부작'의 아주 큰 흥미로움, 그리고 깊은 인상 중의 하나는 이 영화가 거대한 도식적 프로젝트로 시작하지 않았다는 겁니다. 3부작의 흐름을 역으로 보면 발굴이라든지, 발견이라든지, 혹은 우연이나 그리고 조금 거창하게 말하면 운명 같은 것들을 믿으면서 프로젝트를 형성시켜 나갔다는 것이 굉장히 인상적이거든요. 이는 영화를 찍으시면서 만나는 사람, 혹은 일들에 주목하면서 세심하게 관심을 기울이셨기 때문일 것으로 생각됩니다. 지금 다시 돌아 보건데 가령, <고려 아리랑: 천산의 디바>(2016, 이하 <고려 아리랑>)의 방 타마라 선생을 만났던 순간이랄지, 혹은 최국인 감독의 영화를 만난 순간이랄지, 이런 것들에 대해서 어떤 느낌이 있었는지 듣고 싶습니다. 

한 번도 착오나 실수가 없었어요. ‘고려극장’의 <아리랑 앙상블> 영상을 보고 방 타마라 선생을 다큐멘터리로 담아야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리고 그 분을 만나게 됐고 또 그 분이 흔쾌히 거기에 응하셨죠. 최국인 감독 같은 경우는 한국연구재단의 토대연구지원사업 중 한국영화사총서 프로젝트를 수행하면서, 제가 기존 한국영화사의 아주 외부에 있던 소련 시절 러시아와 중앙아시아 쪽을 주로 찾으려고 했어요. 그때 최국인 감독하고 송 라브렌티 감독을 알게됐죠. 최국인 감독님이 원래는 아무하고도 인터뷰를 안 하셨는데, 우리가 아파트 밖에서 계속 기다리니까 편찮으신데도 만나주셨어요. 돌아보면, 단 한 번도 기회를 놓친 적이 없고, 그냥 마음먹고 하면 다 되는 거예요. 최국인 감독님은 인터뷰하고 다음해에 돌아가셨잖아요. 정말 마지막 순간에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만나고 이런 게, 질문을 받으니까 이 점을 얘기하고 싶네요.

<고려 아리랑: 천산의 디바>
<고려 아리랑: 천산의 디바>

그런 순간들이 정말 많이 있으셨을 것 같아요.

네, 그리고 송 라브렌티 감독이 <고려사람>(1992)에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했던 마리아 코발렌코, 저한테도 제일 중요했던 그 분의 딸들도 우연히 카자흐스탄 우슈토베에서 만났고요.

 

만나는 것에서 그치는 게 아니라 영화 안으로 들어오게 되었죠.

네, 맞아요.

 

저는 그게 개인적으로 큰 매혹의 지점이라고 생각하면서 영화를 봤습니다. 선생님 입장에서도 그런 것들이 중요하지 않으셨을까 생각했습니다. 아마도 이런 오해가 있을 수 있을 텐데요. 뛰어난 영화학자인 건 다들 인정하는 바이지만.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그런 분이 영화를 만들면 “저 사람은 학자처럼 만들 거야”라고 도식적으로 예견하곤 합니다. 저는 바로 그 틀을 벗어나서 만들었다는 것이 이 프로젝트의 굉장히 매혹적이고 흥미로운 길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사실 제가 <경>(2009)을 만들었을 때, 저는 그걸 알레고리적으로 만든 게 아니고 오히려 관객들이 쉽게 이해하게끔, 전경과 후경으로, 앞의 경과 뒤의 경, 이런 식으로 쉽게 접근하고자 한 거였어요. 근데 그걸 언론에서는 아무래도 학자가 만든 영화로 소개하거나 받아들이더라고요. 지금도 한겨레신문의 어떤 영화평을 기억하고 있어요. 개봉하고 나서 한겨레신문에서 일기예보처럼 우산인지 비가 오는 눈구름인지가 떠있고, 굉장히 나쁜 점수를 주면서 아까 그 얘기가 쓰여져 있었어요. 평론가가 만든 전형적인 영화라는 식으로 (웃음). 이 얘기를 왜 하냐면 제게 그런 생각이 있었던 거 같아요. 한 번 굉장히 밑으로 가서, <김 알렉스의 식당: 안산-타슈켄트>(2014, 이하 <김 알렉스의 식당>)처럼, 사람들이 한 번 다큐멘터리라고 생각하는 걸 만들어보자. 그걸 하면 어떻게 될까 하는.

<경>(2009)

사실 그런 작업에서는 사람 대 사람으로 만났을 때 필요한 인터뷰의 절차랄지 사람을 대하는 응대의 방식과 같은 것들이 필요하게 되잖아요? 그 부분들에 대한, 일종의 방법론 같은 건 어떻게 깨쳐나가셨나요?

제가 한건, 저한테도 제일 중요하고 그분한테도 제일 중요한 데를 찾아가는 거예요. 맨 처음에 김 알렉스 씨하고 말을 튼 게 12월 30일에 저희가 식당에 가서, 31일 넘어가는 새벽에 사람들 다 식당 마무리 하고 나서 그때부터 보드카 한 병을 사서 얘기했어요. 그리고 1월 1일에 시화 방조제에 같이 가서 굉장히 맛있는 두부 점심을 먹고 나서 뭘 하고 싶으시냐고 물었죠. 그랬더니 여기 낚싯배를 빌려서 한번 나가보고 싶다더라고요. 우즈베키스탄에서도 시르다리야 강에서 자기가 그걸 했다고. 그래서 그 소원을 들어드렸죠. 이분도 그전까진 이혼 중이었잖아요. ‘너머’ 에서 촬영을 도와주라고 하니까 본인도 열린 사람이어서 하긴 하는데, 그게 되게 힘든 거예요. 그러다가 가장 중요한 날에 와서 우리가 안 돌아가고 1월 1일에도 같이 있고 하니까. 그게 되게 중요한 거 같아요, 시간. 그래서 제가 다음에 고려인들한테 갈 때도 한식날 가는 거예요. 구정에 가고. 그래서 아버지가 돌아가셨는데 구정에 거기 가서 아버지 제사를 혼자 드리는 거죠. 겸사겸사 (웃음)

 

제가 아주 좋아하는 장면이죠.

그분들한테 중요한 시간을 선택한 게 지금으로 보면 어떤 순풍을 탈 수 있게 해준 것 같아요.

 

<김 알렉스의 식당>을 말씀하신 김에 생각났는데, 전에도 이야기를 했지만, <눈의 마음: 슬픔이 우리를 데려가는 곳> (2014, 이하 <눈의 마음>)에서 허 스베타 씨가 약간 속이는 게 있잖아요. 그런데 나중에 그걸 영화에 넣으셨단 말이죠. 그 장면을 편집하실 때의 판단에 대해 말씀해 주실 수 있으실까요?

네, 그건 되게 중요한 장면이었어요. 일단 원칙이 있었어요. 제가 ‘트랜스 아시아 영상문화연구소’를 오래 했잖아요. 그때 그 ‘트랜스 trans’의 뜻 중 하나가 번역이거든요. 트랜스레이션 translation. 그래서 번역이 되게 중요한데, 이때의 번역은 매끈한 번역을 안 하게 하는 거예요. 매끈한 번역은 다 봉합을 하면서, 우리가 모르고 잘 이해하기 힘든 것들은 다 쳐내고 우리가 이해하기 쉬운 방식으로 봉제를 하잖아요. 우리 피디는 그래도 번역과 통역 전문가를 써야 하는 거 아니냐고 계속 말했는데, 결국 그 커뮤니티 내에서 어쨌든 좀 더 소통을 잘할 수 있는 사람 정도로 구했어요. 처음부터 번역에서의 오역이나 노이즈가 설계에 있었어요. 설계할 때부터 그걸 열어놓고 시작한 거죠. 앞서 말한 영화 속 장면에서 스베타 씨가 분위기가 굉장히 이상해지면서 “입양한거야”라고 말하길래, 제가 “왜요?”라고 묻잖아요. “왜요?”가 꼭 “왜 입양하셨느냐?”가 아니고 이 이상한 분위기는 뭔가, 이런 정도의 얘기였는데. 사실 제가 당시에는 굉장히 후회했어요. 왜냐면 그분의 반응이 “아파서”라고 그러니까 제가 실례되는 질문을 한 거잖아요, 여자한테. 불임이었던 거니까요. 그래서 내가 인터뷰어의 자세가 안 됐구나 곱씹으면서 후회했죠.  오랫동안 자책했고요. 그런데 나중에 통번역한 영상을 다시 보는데 그 대화가 딱 나온 거예요. (영화에서 허 스베타는 다른 아빠에게서 태어난 아들들에 대해서 얘기하고 싶지 않으니 계속 제작진이 그에 대해 물어보면 입양한 거라고 말해달라는 말을 통역을 담당하는 이에게 전한다.) 그래서 일단은 제가 윤리적인 실수를 안 한 거고, 그리고 이게 정말 좋은 거죠. 다큐멘터리로서는. 허 스베타 씨가 혹은 김 알렉스 씨가 어떤 상황이었는지 이 공동체의 결들이 보이는 거니까요. 관객들이 보통은 그냥 실수한 것 정도로 보고 넘어가는데.

<김 알렉스의 식당: 안산-타슈켄트>
<김 알렉스의 식당: 안산-타슈켄트>

망명 3부작을 보고 나니, 개별 작품마다의 비중은 약간씩 다르긴 합니다만 세 가지 꼭짓점을 돌고 있는 것 같습니다. 여성, 이산민, 그리고 예측하진 못했는데 예술가. 이 세 가지 항들을 각각의 때마다 도식적이지 않게 거쳐 가고 있는 것 같은데, 이에 대해서 어떤 정도의 의식을 갖고 계셨는지 여쭙고 싶었습니다.

사람들이 고려인들을 생각할 때 이게 역사적으로 어느 정도 정박되어 있잖아요? 강제이주 사건을 둘러싸고. 그래서 처음엔 그걸 되게 느슨하게 만들고 싶었어요. 그런 고려인들의 역사나 이미지를 다른 방식으로 이동시키고 싶었죠. 그래서 사실 처음 생각에는 카자흐스탄에서 고려인 4세 같은 젊은 고려인들이 가는 가라오케에 가서 어떻게 노는지도 보고 싶은 그런 생각이 있었어요. 그래서 김 알렉스의 조카, 김 나타샤가 고려인 4세인데 그 친구를 좀 따라가 보기도 한 거죠.

 

아주 단순하게 표현하자면, 망명 3부작을 통해서 저희가 모르는 영상 문화를 많이 접하게 됐어요. 이건 민족지 연구물로서의 긍정적인 자평을 할 만하다 (웃음) 이런 생각이 드는데, 그 부분에 대한 생각은 어떠신가요?

(웃음) 민족문화는 아니고, 뭐 세계문화 속의 어떤 고려인이라는 에스닉한 것들을 더 연 거죠.

 

아카이브로서의?

네, 디아스포라 아카이브. 제가 ‘고려 시네마’라고 명명하고 작년에 부산영화제에서 <용의 해>(최국인, 1981)와 <눈의 마음: 이후>(김소영, 2018)를 같이 틀었는데, 그걸 고려 시네마라고 한 이유가 ‘고려인의 시네마’라는 의미는 아니에요. 러시아하고 소비에트 중앙아시아의 마이너리티 시네마로서의 '고려 시네마'인 거죠. <고려사람>이라는 송 라브렌티 감독의 영화가 고려 사람은 아무도 안 나오고 고려 말을 하는 여러 민족들이 나오는 영화잖아요? 그런 의미에서의 고려 시네마를 가리키고자 했어요. 그런 식으로, 아무도 모르는 얘기를 그냥 하고 있죠 (웃음). 어쨌든 고생 더럽게 하는 (웃음).

 

그 덕분에 이런 것들을 보게 되는구나 싶었습니다.

그렇죠. <용의 해>는 정말 굉장한 발견이었죠.

<굿바이 마이 러브NK: 붉은 청춘>
<굿바이 마이 러브NK: 붉은 청춘>

<굿바이 마이 러브NK: 붉은 청춘>(이하 <굿바이 마이 러브>), 이 영화의 시작은 어떻게 되나요?

아까 이야기한 한국영화사총서 프로젝트를 하다가, 처음부터 주로 목표했던 내용이 ‘세계 속의 한국영화사’인데, 그 세계가 다른 세계여야 되는 거예요. 그 세계라는 건 일종의 참조 틀인데 그게 보통 일본이나 미국으로 생각하잖아요? 저는 냉전의 다른 쪽으로 가보고 싶었어요. 그래서 그쪽으로 찾던 중에 송 라브렌티 감독하고 최국인 감독을 알게 된 것인데. 한 사람은 고려인 감독이고 또 다른 사람은 북한 출신 감독이자 모스크바 국립 영화학교를 다녔던 거죠. 우리가 또 러시아 영화에 대해서 굉장히 궁금해 하는 사람들이잖아요? 이 사람들은 그런데 러시아 영화사에 속한 사람이기도 하고, 그러면서 북한 사람이기도 하고 고려 사람이기도 하고. 그래서 그 해에 2014년에 두 개의 리서치 여행을 떠난 건데, 하나는 구정에 키르기스스탄으로 수의(壽衣)를 찾아 떠난 거고 그게 <눈의 마음> 으로 완성이 된 거고, 또 다른 건 카작 필름아카이브에 최국인 감독을 찾아 떠난 거예요.

 

병행했던 거군요?

사실 <굿바이 마이 러브>는 다큐를 만들려고 생각을 안 하고 그냥 고증 작업으로 기록한 거예요. 지금도 보면 색깔이 달라요. 굉장히 단출한 채록물 같은 걸로 한 거죠.

 

그럼 그때 <굿바이 마이 러브>에 나오는 분들의 존재라든지 이런 것들에 대해서 알게 되신 거군요?

그렇죠, 2014년에 그분들을 만나 뵀던 거죠. 그 전에 조사는 했고.

 

그럼 그 채록 영상들이 어떻게 <굿바이 마이 러브>에 이르렀는지 궁금합니다.

사실 3부작은 좀 돼야 관객도 알고 나도 좀 알겠다 싶었지만 처음에는 엄두도 못 냈어요. 그런데 <고려 아리랑>은 그렇게 길게 만들 생각은 없었어요. 왜냐면 이함덕 선생이 돌아가셨잖아요. 그래서 될까 하다가, <고려 아리랑>은 우리한테는 선물처럼 온 거예요. 재료로 보자면 <굿바이 마이 러브>가 제일 크잖아요. 이건 굉장히 복잡하고 두 분 빼놓고 다 돌아가시고. 사실 이게 제일 영화적이기도 하고. 이게 제일 공력이 많이 들었죠. 계속 편집하면서 방향도 바꾸고. 편집 버전이 여럿 있었어요.

ⓒ김혜미

저는 망명 3부작인 세 편의 영화가 다 다른 거 같습니다. 이를테면 이런 느낌인데요. <눈의 마음> 같은 경우는 애도라는 감정을 떨칠 수 없습니다. 아주 중심적이죠. 그런데 <고려 아리랑>의 경우는 이와는 달리 공동체적인 연대기, 그리고 공감의 시간대 같은 게 느껴지거든요. 충만하게, 어떤 껄끄러움 없이. <굿바이 마이 러브>는 또 조금 다른 거 같습니다. 여기선 어느 정도의 거리, 혹은 냉정함, 혹은 적절한 친밀도 같은 것들을 영화가 유지하기 위해서 장르적 방식 혹은 영화적 방식을 고민했다는 생각이 들거든요. 그러니까 어쩌면 <굿바이 마이 러브>가 감독으로서 대하기 가장 어려울 수도 있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질문은 두 가지입니다. 어떤 영화적 방식이었는지, 그리고 그 인물들을 대할 때의 느낌 같은 것들에 대해 이야기해 주신다면요. 

한 번 정한석 평론가가 생각해보세요. 평생 여자들 영화만 찍다가, 갑자기 남자들 여덟 명이 주인공인 다큐를 만들어야 되는 거예요. (웃음) 그런데 제가 <김 알렉스의 식당>을 하면서 그걸 훈련을 좀 했어요. 김 알렉스가 그냥 남자도 아니고 되게 크잖아요, 사람이. 사실 <김 알렉스의 식당>을 안 했으면 못했을 거 같아요. 남자들 나오는 걸 작업을 한 적이 없고 별 생각도 안 해서. 남자들 여덟 명이 나오는 이 다큐를 어떻게 너무 남성주의적이지 않게 할까 고민을 많이 했는데, 제가 제일 많이 생각했던 영화는 사실 <김 알렉스의 식당> 때부터 <휴머니티>(브루노 뒤몽, 1999) 예요. <휴머니티>가 남성을 어떻게 걷게 하는지. 그리고 촬영감독한테는 <팅커 테일러 솔저 스파이>(토마스 알프레드슨, 2011)를 보고 상상해 달라고 했어요. 프로듀서이자 촬영감독한테 그 얘기를 많이 했던 거 같아요. 약간 냉전시대 스릴러 같은 방식으로 상상해 달라고. 그래서 두 가지예요. 스태프들은 스릴러로, 나는 <휴머니티>로. <휴머니티>를 제가 되게 좋아해요. 거기서 남성들의 비극적이면서도 어떤, 큰 남자들을 다루는 방식이요. 그래서 말씀하신 것처럼 굉장히 복잡한 역사 속에서 이 남자들의 우정 같은 것들을 약간 장르적으로 그리려 했던 게 맞아요.

 

질문을 조금 바꿔보면요. 김종훈 선생과 최국인 선생 모두 일반적인 남성 화자의 화법 이상을 넘어서는 웅변적인 화법을 갖고 계시더라고요. 그런데 그런 웅변적인 화법을 갖고 있는 화자를 대할 때는 두 가지 마음이 공존하곤 합니다. 끌려가고 싶은 마음도 있거니와 또 한쪽으로는 되게 부담스럽거든요. 그런데 어쨌든 이 영화에서 가장 중요한 화자들이란 말이죠. 이 사람들의 말을 카메라가 이 웅변적 화법에 무릎 꿇지 않으면서 동시에 그것에 공감하기 위해서 어떤 스탠스를 취해야 할 것인가를 굉장히 고심하셨을 거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네, 맞아요. 카메라가 대상과 긴장 관계를 유지하는 거, 그게 사실 굉장히 관건이었어요. 4년간 찍은 것 중 앞의 3년 동안 촬영한 분량을 거의 못 썼어요. 그것 때문에요. 그리고 정말 제가 김종훈 감독님을 버리고 이 영화도 버리고 싶었어요. 뭐가 안 나오는 거예요 (웃음). 그런데 사실 방 타마라 선생도 웅변조로 얘기하시고 모든 사회주의, 그 당시 스탈린 시대에서 유년을 겪었던 사람은 다 웅변조로 기함을 토하는 그런 방식이거든요. 게다가 인민군이잖아요. 최국인 감독님은 좀 덜한데 김종훈 감독님은 한국의 우파 매체에서 계속 인터뷰를 해서 자신의 레퍼토리가 완벽하게 있어요. 그래서 제가 어떻게 했냐면 제가 그전에 극영화를 찍었잖아요. 설정까진 아니지만 이 분이 다른 세팅에서 자기를 볼 수 있도록 해야겠다고 생각한 거예요. 그래서 양복을 사고 외투도 사고 천산이 보이는 알마티 호텔에 방을 잡고. 거의 귀빈 대우를 한 거예요. 그리고 그분이 모스크바 국립영화학교에 도착했던 사진들을 다 판넬을 해서 주고. 그랬더니, 특히 사진을 보여드렸더니 그때 처음으로 저한테 왜 우리들에게 관심을 갖느냐고. 그 얘기를 한 거예요. 그래서 제가 영화 얘기를 하니까 그때부터 변하신 거예요. 그리고 계속 걷게 했어요. 걷는 장면을 찍은 거 엄청 많아요. 계속 걷게 하면서 힘을 좀 빼시게끔. 그래도 계속 인민군처럼 걷고 그러셨는데 마지막에 갔을 때 마침 좀 편찮으셨어요. 기운이 없으셔서 그렇게 못하시는 거예요. 그때 카메라가 둘이었는데, 카메라가 이분을 좀 껴안듯이 포옹하듯이 찍으면 좋겠다고 얘기를 했어요. 이분 심장 박동 소리가 들리는 것처럼. 카메라 돌아가는 그 장면은, 원래 참고했던 영화는 자크 오디아르 감독의 <내 심장이 건너뛴 박동>(2005)이었어요. B촬영감독한테 그걸 보라고 했어요. 그랬더니 자기는 그렇게 못 찍는다고 (웃음). 그래서 그렇게는 못 찍었지만 내가 심장의 박동소리를 들은 거죠, 포옹을 하시니까.

<굿바이 마이 러브NK: 붉은 청춘>
<굿바이 마이 러브NK: 붉은 청춘>

맨 마지막 장면에 김종훈 감독과의 그 일화를 넣으셨죠?

네, 그게 그 전환의 지점에서 가능했던 거였어요. 카메라가 압도되는 게 아니라 약간 미학적인 긴장을 만들어냈던 그 부분에서. 인민군 찍기 되게 힘들어요 (웃음). 우리가 관심을 갖고 있는 게 당신이 얘기하는 김일성 체제에 대한 비판만이 아니라, 영화인으로서, 사회주의자로서의 당신의 모습이라는 걸 한 3년 걸려서 겨우 전할 수 있었죠. 그러니까 정한석 평론가가 얘기한 것처럼 그제야 긴장이 좀 생긴 거예요.

 

그 영향이 있으셨는지 모르겠지만, 최국인 선생을 찍는 느낌과 김종훈 선생을 찍는 느낌이 조금 다릅니다. 한진 선생과 어떤 한 여성과의 일화를 김종훈 선생이 말씀하시는 부분 있잖아요? 저는 그게 약간 복잡하게 보였거든요. 그분께서는 자기 친구인 한진이 겪었던 일에 대한 단순한 일화를 전하는 것처럼 느껴지지만 사실 그게 그의 화법과 그의 성격으로 다뤄지지 않을 법한 다른 무엇이 그 안에 들어와 있는 것 같은, 약간 비껴나가 있어서 오히려 이질적으로 보이면서도 도드라지는 그런 느낌이 들었거든요. 그 일화에 대한 설명을 좀 들려주실 수 있을까요?

그게 일단 굉장히 반복적으로 저희한테 들려주신 일화여서, 그걸 제가 좀 깊이 생각을 해야 했던 거예요. 일단 제가 그걸 촬영했던 처음 결정은 뭐였냐면, 북한 사람들을 떠올릴 때 섹슈얼리티도 없고 정말 이념을 위해서 모든 것을 바치는, 뭐 이렇게 생각하는데, 그게 아니고 사실 살과 뼈와 피가 다 있는 그런 사람으로 보여주고 싶었어요. 그리고 또 그 에피소드를 좋아했던 것은 이게 그 여자가 직접 와서 보라고, 그니까 여자가 ‘미투’를 해버린 거잖아요? 그래서 거기에 힘의 균형이 보였어요. 어쨌든 여자가 고발을 한 거니까. 그래서 그렇게 비윤리적이고 여성 비하적이고 그런게 전혀 아니라고 생각했고. 오히려 그 당시 유학생 때 피와 살과 뼈, 즉 육체가 다 있는 ‘붉은 청춘’으로서의 사회주의자, 이걸 굉장히 잘 보여준 일화였어요. 그리고 그 다음에 보면 김종훈 감독이 온갖 러시아 여성이랑 있는 사진이 계속 나와요. 그러니까 이게 본인의 이야기이기도 한 거예요 (웃음). 다들 그랬던 거죠. 그리고 자기는 한진 만큼 인기가 없었다고 얘기하는 것 같았어요. 김종훈 감독의 그 얘기에 다른 층위가 있는데, 한국전쟁을 얘기하실 때도 항상 그런 방식으로 얘기하세요. 자기를 싣고 가던 남자 군인과 여자 간호사가 자기 앞에서 섹스를 했다, 그리고 그 여자가 자기를 버리고 도망가자고 얘기를 했다는 식으로. 한국 전쟁을 겪었기 때문에 그런 살과 피를 가진 인간의 원초적인 걸 잘 얘기할 수 있는 거예요. 거기에 자기 검열이나 이런 게 없어요. 전쟁을 심하게 겪었기 때문에. 원래는 한국전쟁 때 얘기가 영화에 들어가 있었는데 안 그래도 영화가 너무 복잡한데 그 얘기까지 들어가면 안 될 거 같아서 뺐죠.

<굿바이 마이 러브NK: 붉은 청춘>
<굿바이 마이 러브NK: 붉은 청춘>

저는 그 장면이 복잡하게 느껴진 또 한 가지 이유가, 약간 징후적으로 읽혔다고 할까요. 제가 과장한 걸지도 모르겠지만 추정해보자면, 원래 감독님께서 적극적인 여성 화자를 찾으셨을 거 같아요. 이를테면 최선옥 선생은 이름은 가끔 등장하는데 왜 전면에 등장하지 않는 걸까, 궁금했거든요. 어떤 비하인드 스토리가 있었나요?

그 역할을 한 게 지나이다 이바노브나 여사예요. 지나이다 여사가 완전히 역사적인 레슨을 다 하잖아요. 오히려 최선옥 선생은 약간 현모양처 형이고 본인도 굉장히 뛰어난 의사이지만 이 이야기와는 좀 멀었어요. 저는 굉장히 방대한 이야기를, 이 북한 청년들을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게 정말 많이 줄인 거예요. 맨 처음 1차 편집이 2시간 48분이 나왔어요. 그래서 그 다음부터 저랑 피디랑 엄청 줄이고, 그리고 개봉 버전으로 재편집하면서 또 줄이고.

 

지나이다 여사를 다루는 방식이 방 타마라 여사를 다룰 때하고는 다르다고 느꼈어요. 방 타마라 여사는 말 그대로 영화의 주인공이구요, 지나이다 여사는 이 영화의 길잡이라고 느꼈거든요. 김종훈, 최국인 두 분을 찍을 때 방식이 다르듯이, 지나이다 여사를 찍을 때 또 다른 관점과 주의점을 갖고 계셨으리라 생각이 듭니다. 어떠셨나요?

지나이다 여사가 처음 등장할 때, 말러 노래가 나오는데 사실 그 가사가 한진 선생이 지나이다 여사한테 보내는 연가 같은 내용이거든요. 이분은 어떤 진짜 비(非)고려인 러시아 여성으로 재현을 한 거예요. 음악도 배경도. 조명도 소프트하게 하고. 이 영화를 남한에서 보게 될 텐데 남한에서 러시아 영화를 볼 때 갖게 되는 그런 방식으로 재현을 한 거 같아요. 너무 친밀하지 않게. 하지만 이 분이 또 사람들을 종훈, 국인 이렇게 부를 때 너무 좋잖아요. 그렇게 그 두 개가 약간 결이 다르게 했어요.

 

그래서 그런 생각이 들었나 보네요. 다큐로 찍었고 기록영상물인데 지나이다 여사를 찍을 때는 픽션화된 느낌을 받았어요.

네, 맞아요. 그렇게 했어요. 카메라도 다른 사람들은 안에 있거나 밖을 이방인처럼 거닐거나 그러는데, 지나이다 여사는 밖에서 안으로 들어오는 핸드헬드로 해서. 그리고 포즈도 계속 있고.

<굿바이 마이 러브NK: 붉은 청춘>

그 부분도 여쭤보고 싶던 부분인데요. 전 그 카메라 워킹이 굉장히 독특하다고 느꼈습니다. 제가 기억하기론 비슷한 카메라 워킹이 첫 장면에 김종훈 선생 찍을 때도 등장하는데요. 가만히 생각해보니 그런 카메라 워킹을 제가 잘 못 본 것 같아요. 인물을 보여주다 카메라가 떠나는 건 많이 씁니다만, 인터뷰 시작하기 전에 혹은 그 사람을 대면하기 전에 바깥에 어딘가에서 부유하다가 그것이 사람의 앞에 불려오는 그런 느낌을 주는 카메라 워킹이 일어났을 때 느낌이 좀 기묘하다 생각했는데, 설명을 해주실 수 있으실까요?

그 부분은 제가 그렇게 하자고 촬영감독한테 확실하게 얘기를 한 거예요. 지나이다 여사 핸드헬드는 프로듀서인 강진석 씨가 찍고, 김종훈 감독 거는 모스크바 국립영화학교 나온 이민호 씨가 찍었거든요. 조금 달라요. 강진석 씨가 찍은 건 훨씬 여성적인 방식으로 내가 그대로 큐를 줬고, 이민호 감독이 찍은 건 약간 더 영화적이죠. 그렇게 좀 다르긴 한데, 그건 설명하기가 힘드네요. 근데 정확하게 그건 제가 원한 거고 이게 안 나오면 앞에 도입부가 없다고 생각했어요. 지나이다 여사는 반드시 그걸로 시작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죠.

 

왜냐면 감상자의 입장에서 묘사적인 언어를 사용하자면 그 자리에 누군가 들으러 온다는 느낌을 받습니다. 바깥에서 그 사람의 말을 들으러 그 자리로 그 앞에 온다는 느낌 같은 걸 줬어요. <눈의 마음>과 <고려 아리랑>에 나왔던 묘지를 배회하는 카메라와는 또 다른 느낌이더라고요.

맞아요, 배회가 아니에요. 그건 3부작의 마지막이니까 가능한 거 같아요. 설명하기가 어렵네요 (웃음). 오히려 정한석 평론가의 묘사를 더 들어야 할 거 같아요. 어쨌든 그건 굉장히 정확하게 제가 지시를 한 거예요.

 

그리고 최국인 선생이 떠나는 장면 같은 경우도 인상적이었는데요. 그땐 미처 모르셨던 거죠?

좀 알았던 거 같아요. 그건 연출을 좀 한 거예요. 완전히 연출한 건 아니고 그게 그분의 원래 동선인데 조금 일찍 내려서 찍었죠. 원래는 거기다 내려드리면 안 되고 좀 더 들어가야 되거든요. 병원에서 모시고 와서 비도 오는데 굳이 미리 내려드리고 (웃음). 제가 완전한 연출은 원래 안 하지만 생활공간에서 앞뒤는 조정하죠.

ⓒ김혜미

최국인 선생은 많이 등장하시는데, 뭐라고 할까요, 역시 개인적인 느낌입니다만 김종훈 선생보다 조금 더 궁금해요. 김종훈 선생은 성격적 외향성이라고 할까요 이런 걸 충분히 갖추고 계신데, 최국인 선생은 나를 좀 더 궁금하게 만드는 사람이구나 하는 생각을 하면서 그분을 봤어요. 선생님께서 보시기엔 어떠셨나요?

저도 똑같이 느꼈죠 (웃음). 나의 4년간의 고민은 김종훈 감독님하고 어떻게 다큐를 할까, 이게 최대의 고민이었다니까요. 오죽하면 제가 버릴 생각까지 했겠어요. 최국인 감독님은 맨 처음에 우리가 조사해서 보는데, 그렇잖아요, 뭐 이런 분이 있나. 북한 출신으로 중앙아시아에 가서 위구르에 대한 영화를 만들고.쇼칸 발리하노프가 카자흐스탄의 민족영웅이거든요. 그리고 굉장히 영화를 많이 만들었어요. 코미디도 만들고 엄청 많아요. 그러니 영화하는 사람으로서 너무 궁금하잖아요. 사실 저에게 굉장히 중요한 이미지 중의 하나는, 그래서 이걸 맨 처음 최국인 감독 나올 때 겹쳐 놨는데, 눈사태 나는 영상이요. 이게 양원식 감독님 다큐멘터리인데, 제가 그 포스터를 봤던 거 같은데 우리 피디는 없었다는 거예요. 완전히 빙벽의 심연, 크레바스가 딱 있는 그 포스터가 이 사람들의 카타스트로피catastrophe를 보여주는 거였어요. 그래서 계속 그걸 찾고 싶었죠. 우리가 정말 카타스트로피라고 할 때 저한테는 최국인 감독이 그건 거예요. 그래서 양원식 감독의 영상을 쓴 거고. 카타스트로피가 재앙이기도 하지만 국면 전환이기도 하거든요. 무대를 바꾸는 거. 이 분의 삶이, 만주 의용군을 만나는 게 우리가 일생에서 몇 번이나 되겠어요. 만주 의용군이고 북한의 첫 영화에 배우로 출연했고 영화감독이고. 또 <약속의 땅>(슬람벡 따우에껠, 2011)이라고 카자흐스탄의 국가 영화가 있거든요, 거기서도 배우로 나와요. 고려인 역으로. 고려극장에 가도 사진이 많아요. 연극에도 많이 출연하셨고. 그러니 저한테는 완전히 다른 대륙이잖아요. 그래서 엄청난 경외감을 갖고 뵈었죠.

<굿바이 마이 러브NK: 붉은 청춘>
<굿바이 마이 러브NK: 붉은 청춘>

이건 사람의 문제가 아니고 풍경에 관한 이야기인데요. 크레바스라고 말씀하셔서 문득 떠오르는 건데, <눈의 마음>을 찍으셨을 때의 풍경도 아름다웠거든요. 그런데 그때의 아름다움은 영화가 담고 있는 풍경에 대해서 자신이 이방인이라는 걸 인정할 때의 경외감이었어요. 그런데 <굿바이 마이 러브>를 보면서 대장정의 마무리가 왔구나, 생각이 들었던 게 그 풍경을 친밀하게 느끼는 것 같더라고요, 이 영화가. 이 영화 역시 다른 망명 3부작의 영화처럼 자연의 광활함이랄지 놀라움을 충분히 담고 있지만 그걸 바라보는 시선이 훨씬 친밀해졌다고 느꼈어요. 만약에 그렇다면, 중앙아시아의 풍경이라고 하는 것을 많이 보셨을 거잖아요? 그걸 느낄 때 감각의 변화나 정서의 변화를 선생님께서도 의식하셨는지 궁금했습니다.

제가 그걸 많이 보고 다녀서 그랬다기보다는 최국인 감독님의 영화를 통해서 제가 이해한 거예요. <용의 해>를 보고, 송 라브렌티 감독 영화도 보고. 송 감독님 영화가 중앙아시아의 생태나 소수민족 문제를 많이 다루고 있거든요. 제가 그걸 보면서 고려인과 같은 소수민족이 중앙아시아의 풍경에 대해 느끼는 느낌을 받게 되었어요. 그래서 영화의 마지막에 보면 <용의 해>가 나오고 우리가 바로 그 장면을 다시 찍잖아요. 재현의 현시라고 할까. 레프레젠테이션representation을 우리가 프레젠테이션presentation 하는 느낌. 전에는 굉장히 조심스러운 눈으로 봤다고 한다면 지금은 최국인 감독의 영화라는 프리즘으로 그 풍경을 프레젠테이션 하는 거죠. 그리고 빅토르 초이의 노래를 처음부터 쓰려고 했어요, 그 풍경에. 빅토르 초이 노래에, 병사들이 몸을 가누지 못하고 칼을 잎사귀에 닦고 이런 가사가 나오잖아요. 빅토르 초이나 최국인 감독을 통해서, <고려 아리랑> 때도 방 타마라 선생을 통해서, 제가 익숙해져서라기보다는 오히려 그런 영화들을 아카이빙 하면서 그곳에 사는 사람들의 문제가 제게 들어온 거죠. 그리고 되게 재밌는 게 우리가 맨 마지막에 가서 우리가 드론을 날린 그 협곡이 굉장히 유명한 국립공원인데, 거기가 굉장한 관광지이기도 하지만 카자흐스탄과 중국의 국경이에요. 그래서 국경의 뭔가가 있어요. 끝이고 그 다음에 뭐가 다시 시작될 거 같은. 그걸 굳이 비교하자면, <눈의 마음> 때도 마지막 장면에서 빅토르 초이의 노래를 썼고 차가 도로를 지나가거든요. 그게 우즈베키스탄하고 카자흐스탄의 국경이에요. 거기도 국경지대에서 끝나요. 그때는 우리가 차를 타고 가면서 횡단을 한 거라면, 지금은 최국인 감독을 통해서 다시 한 번 그 풍경을 알고 우리가 오마주를 하는 거죠. 최국인 감독에 대한 오마주.

 

아주 귀여운 장면이 하나 있었습니다. 열매들이 있잖아요. 이게 빨갛게 변하는 거예요 흑백이었던 게. 이게 좋았어요. 어떻게 보면 이 차원에서 저 차원으로 넘어갈 때의 단순한 전이적인 형식이라고 볼 수 있는데, 겹쳐지는 것에 대해서 굉장히 큰 생각을 하게 되는 작은 세부처럼 느껴져서 그 부분에 주목하게 됐던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네, 저도 이상하게 그 장면이 좋았어요. 그게 심지어 두 컷이나 있잖아요. 보통 감독은 빼는 장면인데 (웃음). 다행히 개봉 버전으로 다시 편집하시는 분도 안 빼셨더라고요.

<SFdrome: 주세죽>

<굿바이 마이 러브>에서는 픽션들을 많이 도입하셨습니다. 세심하게 본 관객들이라면 여기에 픽션의 결들이 많다는 걸 충분히 느꼈을 겁니다. 그 부분도 망명 3부작에서의 좀 더 특별한 점인 거 같거든요. 여기에서 그게 필요하다고 느끼신 건 어떤 이유에서였나요?

제가 영화의 반응이 굉장히 재밌다고 느낀 게 있어요. 정한석 평론가는 이렇게 질문을 하잖아요? 그런데 미술 쪽에서 한 분이 VIP 시사회에 와서 저한테 이런 말을 던지고 갔어요. 그 사람은 <SFdrome: 주세죽>(2018)을 좋게 본 사람인데, “굉장히 미니멀한 리얼리즘이에요.” 이렇게 얘기를 하는 거예요 (웃음). 처음엔 무슨 얘기지 하다가, 이게 설치 영상 작업을 하는 사람들이 보면 그게 너무 다 소여(所與)된 거예요. 우린 그게 다 구성된 거잖아요. 그런데 워낙에 더 가공하고 구성하는 그쪽에서 보면 미니멀한 리얼리즘으로 보이는 거예요. 그래서 이게 참 설치 영상하는 쪽하고 특히 다큐라는 장르가 비주얼을 놓는 방식이 다르구나를 다시 한 번 느꼈어요.

 

이후 계획을 들려주세요. 

제일 좋은 건 누가 나한테 뭐 찍으라고 주는 거예요 (웃음). 너무 이게 아카이빙하고 찾고, 될지 안 될지도 모르면서 신의 은총을 기다리는 건 이제 힘들어요 (웃음). 지금 관심 있는 게 있긴 한데, 간단히 얘기하자면 <SFdrome: 주세죽> 이후에, SF가 다 하늘에서 많이 일어나잖아요. 기존의 SF가 우주나 하늘 이쪽에서 일어난다면, 저는 흙, 대지 밑에서 뭘 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 중입니다.

ⓒ김혜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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