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적이 없는 한밤중의 한강공원에 두 남녀만이 앉아있다. 남자(배창호)가 여자(김성령)에게 그가 오늘 꾼 꿈에 대해 이야기한다. 남자가 꾼 꿈이 영화 속 영화로 주어지고 그 꿈의 불균질한 질감과 에너지는 순식간에 우리의 주의를 사로잡는다. 꿈속에서 배우인 남자는 아는 감독지망생 동생(한창록)과 함께 영화를 찍고 있다. 자신의 이야기를 해보라는 감독의 말에 가정폭력의 트라우마를 떠올리지만 이를 어떻게 표현하고 담아낼지 모른 채 무언가에 쫓기는 기분에 휩싸인다. 그러다 아버지를 죽여야겠다는 결심을 하고 실행에 옮긴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꿈은 현실과 뒤섞이고 인적이 없던 한강공원에 감독지망생 동생을 포함한 스태프들이 나타나며 카메라의 앞과 뒤도 구분이 사라진다. 꿈속에서 표현됐던 아버지의 억압과 부친살해의 욕망은 허구 속 인물로 자신을 창조한 감독과 그 인물을 연기해야 하는 배우 사이의 관계로 전이된다.
한창록 감독은 정작 모르고 있던 일화지만, 배창호 하면 누구나 먼저 떠올릴 한 영화감독은 2015년 6월 새벽 지하철 승강장 아래로 투신한 적이 있다. 다행히 가벼운 부상에 그쳤던 이 사건은 오랜 기간 써온 차기작에 대한 부담감에 의한 것이었다. 어느 장편영화 프로젝트에서 배우와 조연출로 만났던 배창호 배우와 한창록 감독은 배우 워크샵의 일환으로 이 영화를 시작했다고 한다. 당시 배창호 배우 또한 연기에 대한 압박을 느끼고 있었고 이는 영화의 주요 모티프로 담겼다. 한창록 감독은 전작 <멜로영화> <토요일 밤, 일요일 아침>부터 지속적으로 꿈과 현실, 판타지와 실재, 픽션과 논픽션 등의 경계를 넘나들며 영화만이 할 수 있는 게 무엇인지 탐색하고자 했다. 전작부터 이어진 이 관심이 배창호라는 배우를 만나 기괴한 에너지로 가득 찬 <배창호 SHOW>를 탄생시켰다.
서울독립영화제와 인디포럼에 단편들이 공개된 적이 있고 이번에 전주에서 상영되는 영화가 세 번째 단편이라고 알고 있다.
2009년에 서울예술대학 영화과에 진학하면서 본격적으로 영화 공부를 시작했다. 2013년에 공개된 <멜로영화>는 학기 중에 찍은 작품이고, <토요일 밤, 일요일 아침>(2014)은 졸업영화 개념으로 찍었다. 이번 영화는 2016년 10월쯤에 처음 찍었다가 편집을 반 년 넘게 안 해서 2017년 5월에야 1차 편집이 나왔다. 망했다 싶어서 추가촬영을 바로 진행했고 최종적으로 완성된 건 2018년 초쯤이었던 것 같다. 장편 영화 찍느냐고 욕도 많이 먹었다 (웃음). 작년 전주국제영화제에는 시기를 놓쳐서 지원조차 못했다.
졸업을 하고 나서 찍은 영화일 텐데. 어떻게 처음 시작하게 된 건가?
배창호 배우를 알게 되면서 시작했다. 독립 장편을 준비하면서 만났는데 그때 내가 조연출이었고 배창호 배우가 주연 배우였다. 그 프로젝트는 아버지에 대한 트라우마가 있는 배우들을 모아서 작업하는 것이었다. 프로젝트는 결국 완성이 안됐는데, 프로젝트 마치고 그 형이랑 조금 더 해볼 수 있는 게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처음엔 되게 가볍게 워크샵 식으로 짧게 해보자고 하면서 시작했다.
배창호 배우의 어떤 면이 같이 작업을 하고 싶게 만들었나?
그 형이랑 나랑 좀 상극인데 그래서 더 끌린다. 나는 지금보다 좀 더 차가운 느낌이었다면 그 형은 좀 뜨거운 느낌이 있어서. 이 사람이랑 하면 어떤 시너지가 날까 하는 궁금증, 연출로서 배우한테 기대하고 보고 싶게 만드는 게 있었다. 사실 엄청 저예산으로 그냥 연기 워크샵 식으로 시작했던 건데 하다 보니 욕심도 생기고 돈도 많이 쓰고 그러면서 난해하게 완성됐다 (웃음). 대여 업체에서 100만원어치 장비를 지원해주는 이벤트가 있었다. 그게 투표까지 가서 주변 인맥 다 동원해서 결국 따냈다. 원래 카메라 하나만 들고 그냥 붐만 붙어서 소규모로 하려고 했는데 장비를 100만원어치를 빌리니까 사람도 필요해지고 인건비도 더 들고 판이 얼떨결에 커진 케이스다. 뭐 엄청 큰돈은 아니지만 알바 해서 돈 벌어 영화 찍는 처지에서는 큰돈이었다. 한 1년 동안 영화제에서 안 틀어줄 때는 ‘아, 내가 무슨 짓을 한 건가’ 싶었다.
시나리오를 쓰거나 컨셉을 잡을 때 배창호 배우와 대화를 많이 한 편인가?
아버지에 대한 트라우마 같은 건 모티브만 가져오고 컨셉이나 그런 건 내가 다 정했던 거 같다. 형은 형대로 하고, 나는 나대로 하고, 한 번 싸워봅시다 이런 느낌이었다. 구체적인 트라우마나 사건들 같은 건 오히려 더 안 물어보려고 했다. 그래서 정확히 디테일이 일치하진 않겠지만, 형이 지니고 있는 억압의 대상으로서의 아버지나 배우로서의 열등감 같은 것들을 옆에서 관찰하면서 이런 식으로 표현해보면 어떨까 하면서 했던 거 같다. 나 편한 대로 쓰고 그걸 형이 연기하는 입장에서는 아예 극으로 받아들이고 하고. 그러다보면 그 형은 자기가 살아왔던 것과 대본 안에서의 이야기 사이에서 간극을 느낄 수도 있고. 그걸 다 가져가려고 했다.

배우 이름이 배창호다 보니까 아무래도 배창호 감독님을 떠올리게 된다. 영화는 거의 다른 이야기긴 하지만. 제목에도 이름을 그대로 가져다 썼는데?
사실 그 감독님을 염두에 두진 않았다. 처음에는 훨씬 더 황당무계한 시나리오였다. 어떤 분이랑 술을 마시다가 그 분이 그때까지 찍어놓은 걸 보고 약간 비아냥거리는 식으로 “아, 그냥 배창호 쇼네, 원맨쇼네.” 이런 느낌으로 얘기를 했다. 그래서 “어, 맞아.” 그러면서 오기로 그 제목을 쓴 느낌이다. 배창호 감독님은 사실 잘 알지 못한다. 배창호 쇼라 그러면 사람들이 다 그 유명한 감독님 얘기로 여길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하긴 했지만 다른 제목을 떠올릴수록 뭔가 더 창피한 느낌이 들어서 그냥 단순하게 가자고 결정했다.
김성령 배우는 <토요일 밤, 일요일 아침>에도 출연했다. 그러고 보면 이 배우도 유명 배우와 동명이인이다.
의도한 건 아닌데 나도 신기하게 생각한다. 학교 동문이다. 전작에서 함께 할 때도 되게 좋게 작업을 했기 때문에, 사실은 여배우 비중이 엄청 크진 않았지만 내가 믿고 맡길 수 있는 사람과 작업하고 싶어서 부탁했다. 전작에서 처음 함께 작업했고 그전에 알지는 못했다.
<토요일 밤, 일요일 아침>에도 꿈으로 이야기를 풀어가고 이번 영화도 꿈에 대해서 얘기하면서 진행된다. 꿈에 대해 특별히 관심을 두고 있는 게 있나?
사실 두 영화가 공교롭게도 좀 그냥 장난 식으로 해보자고 하면서 시작했던 지점이 있었다. <토요일 밤, 일요일 아침> 같은 경우에도 학교에서 돈 주는 사업이 있는데 이걸 놓치기 아까워서 전날 뭘 쓸까 하다가 꿈 얘길 써볼까 해서 쓴 거고. 그냥 꿈 얘기가 나한텐 되게 편하더라. 재밌기도 하지만 사실 편해서 그랬던 거 같다. 리서치가 필요한 것도 아니고 후딱 쓸 수 있으니까 (웃음). 아마 <배창호 SHOW> 같은 경우에는 그 전의 것에 영향을 받은 것도 있는 거 같다. 사실 첫 영화까지 세 편이 되게 비슷하다. 경계를 부수는 작업의 일환이었던 거 같다. 영화와 현실일수도 있고 꿈과 현실일 수도 있고. 다큐멘터리와 극영화일 수도 있고. 그런 것들이 복잡하게 엮이는. 예를 들면 이번 영화에서 사진 장면 같은 경우에도 그 사진이 실제 배우의 가족사진이니까 다큐멘터리적인 요소인데, 그런데 그게 꿈 장면에서 나오는 식으로. 이분법적으로 나누자면 꿈이랑 극영화랑 닮아있는 거 같은데 그걸 비틀어보기도 하고 그랬던 거 같다.
<멜로영화>는 감독 지망생이 주인공이고 이번 영화에서는 감독으로 직접 출연도 했다. 감독이라는 역할에 대해서, 이것도 경계를 뒤섞는 것의 일환이기도 하겠지만, 감독이라는 자의식을 영화로 풀어내는데 관심이 있나?
예전에 문학 수업 시간에 “문학적인 것이 무엇인가?” 하는 얘기를 많이 했다. 다른 매체가 아닌 문학으로만 할 수 있는 것. 나는 영화 전공이었으니까 영화적인 것은 무엇인지, 영화로만 표현할 수 있는 방식에 대해서 관심이 있었던 거 같다. 편한 스토리텔링 구조보다는 형식 같은 것들에 대해서 고민하면서 영화를 만들었던 거 같다. 글을 쓰건 뭘 만들건 할 때 어떤 소재를 취하더라도 큰 고민이나 일종의 화두 같은 것 안에서 그 소재를 살펴보는 게 있는 것 같은데, 나에게는 그런 큰 질문 중 하나가 “이 이야기 안에서는 영화로만 표현할 수 있는 방식이 무엇인가”인 것 같다.


기괴한 에너지가 마구 분출되는 후반부의 장면들이 특히 인상적이었다. 배창호 배우가 아버지를 죽이는 장소의 연출도 그렇고.
그렇게 음침한 곳이 서울숲에 있었다. 추가 촬영할 땐 없어졌더라. 창호 형이 그 때 성수동에 살아서 거기를 많이 알았는데, “여긴 오기만 하면 음침해, 기운이 안 좋아.” 그러더라. 지금은 다 그걸 밀어버렸더라. 후반부에는 추가로 촬영한 부분이 많다. 원래 마지막 결말이 내가 다스베이더 가면을 쓰고 둘이서 칼싸움하면서 끝나는 거였다 (웃음). 근데 내가 워낙 몸치라 액션도 이상하고, 영화 자체가 그전까진 되게 무거웠는데 난데없이 칼싸움을 하니까 굉장히 별로더라. 너무 애들 장난 같고. 내가 돈을 얼마나 들였는데 이렇게 내보내면 안 될 거 같다는 생각에 다시 찍었다. (웃음) 그리고 밤의 숲 장면에서 망치질 하는 부분도 거기서 뭔가 힘이 안 붙는 느낌이어서 조금 더 호러 영화적인 이미지들이 필요할 거 같더라. 그래서 아버지 시신 같은 이미지나 자기 눈을 망치로 파는 이미지들을 추가로 찍었다.
앞으로의 계획은 어떤가?
사실 영화를 하면서 먹고 사는 게 가장 큰 목표인 거 같다. 지금은 영화로는 생계유지를 할 수 없어서. 내가 영화를 하는 사람인가 하는 질문이 맴돌고, 그러면서 조금씩 나태해진다. 예전에 문경에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사람이 있었다. 그걸 소재로 해서 개발 중인 장편 시나리오가 있다. 그것도 이번 영화와 비슷한 느낌일 수 있는데, 한 남자가 자기 스스로 예수라고 믿게 되는 과정을 다룬다. 그 안에서 그 사람의 트라우마를 다루되, 신병이나 환각 장면들도 들어가는 그런 시나리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