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풍 가족
JIFF 2019 <링링> 윤다영
글 손시내 사진 김혜미 / Festival / 2019-05-03

중학생 진아(김주아)의 가족은 별다른 점 없이 평범해 보인다. 아빠(김선빈)는 취미생활인 낚시를 조금 과도하게 즐길 뿐이고, 엄마(김선경)는 잔소리가 조금 과도하게 많을 뿐이다. 그러나 진아에겐 이 모든 것이 의미심장하게 다가온다. 아빠의 수첩엔 링링이라는 이름이 쓰여있는데 아무래도 외도 상대인 것 같다. 엄마는 아빠에겐 딱히 관심이 없고 화초에만 정성이다. 아빠가 바람을 피운다면, 부모님이 이혼한다면, 우리 가족이 더는 함께 살 수 없다면? 진아의 불길한 상상력은 꿈틀대고, 집 밖에선 점점 태풍이 다가온다. <링링>이 가족의 붕괴를 두려워하는 진아의 예민한 기척을 따라 진행되는 건 맞지만, 동시에 이 영화는 인물의 내면에만 머물지 않고 명확한 상황을 제시하며 그 속에 놓인 인물들의 반응과 변화를 포착하는 데까지 나아가는 힘을 지녔다.

아이디어를 떠올린 때까지 손꼽아 보면, 윤다영 감독은 <링링>과 5년 정도의 시간을 함께 보냈다. 2016년엔 졸업영화로 <링링>을 완성하고 싶었지만, 시나리오를 발전시키는 데 애를 먹다가 결국 찍지 못했다. 아르바이트로 모은 돈을 들고 여행도 시도해봤지만 소용이 없었다. 그렇게 찍지 못한 영화와 함께 2018년을 맞았고, 여기서 꼭 끝맺음해야 다음으로 넘어갈 수 있겠다는 생각에 기어이 시나리오를 완성했다. 지나간 ‘고통의 시간’은 결과적으로 큰 도움이 됐다. 단편적으로 흩뿌려져 있던 생각들과 이미지들이 모여 지금의 <링링>이 탄생한 것이다. 윤다영 감독은 전주국제영화제에서 상영되리라 상상조차 하지 못했지만, 이렇게 되고 보니 오랜 기간을 두고 영화를 찍은 게 나쁜 선택은 아니었던 것 같아 안심이란다.

 

 

어떤 특정한 이미지나 심상에서 시작되었는지, 특정한 사건이나 설정에서 시작되었는지 궁금해지는 영화다. <링링>은 어떻게 시작되었나.

난 원래 이미지로부터 시작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번 영화는 간단한 두 줄의 설정에서 시작해서 여기까지 오게 됐다. 성도착증에 대해 분류해놓은 글에서 자연재해와 연관된 성도착증이 있다는 것을 읽었다. 그래서 한 가정의 아빠가 태풍에 나왔다가 발기한 채로 죽어 가족에게 돌아오면 어떨까를 떠올렸다. 처음엔 일기 형식의 글을 먼저 썼고 그게 시나리오가 되고 그걸 또 다듬으면서 영화로 찍게 된 거다.

 

주인공 진아의 입장에서 써나가는 일기였던 건가.

맞다. 그래서 시나리오를 쓰면서 고민이 많았다. 일기는 진아가 어떻게 생각하고 어떻게 느끼는지를 다 알 수 있지만, 시나리오는 그럴 수 없으니까. 시나리오 작업을 하면서 덜어낸 것들도 꽤 있고 표현하기 어려운 부분을 더 잘 표현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작업의 시작을 물어본 건 영화에 인상적인 이미지가 많았기 때문이다. 고요한 물가에 선 가족의 뒷모습이나 잘린 교복 치마, 진아의 정면 얼굴과 그 표정, 천둥 번개가 칠 때 저수지에 서 있는 아빠의 뒷모습 같은.

아빠의 뒷모습은 처음부터 떠올려서 그대로 옮긴 이미지다. 잘린 교복 치마의 경우에는 시나리오 단계에서부터 호불호가 좀 있었다. (웃음) 그런데 내가 찢어진 교복이나 욕조에 담긴 생선처럼 잘 어울리지 않아 보이는 이미지들을 좋아하는 편이다. 정면 부감 같은 것도 그렇고. 아마 내가 좋아하는 느낌의 이미지들을 직감대로 넣지 않았을까.

<링링>

특별히 애착이 가는 이미지나 장면이 있나.

아빠가 영안실에 누워있는 장면. 가장 먼저 떠올린 장면이다. 카메라가 많이 이동하지 않고 좀 딱딱하게 보이기도 하지만, 그렇게 그림처럼 서 있는 사람들을 보여주고 싶었다. 시체의 형상은 과도하게 표현되고 분위기는 정적인데 웃음이 새어 나오기도 한다.

 

태풍이 오기 직전의 위태로운 공기를 잘 포착했다고 생각한다. 날씨뿐만 아니라 진아의 가족에게도 거대하고 위험한 무언가가 다가오고 있다는 느낌이 드러나는데 그게 한편으론 매혹적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더라.

그게 점점 고조되고 전략적으로 무언가 터뜨리는 흐름이라기보다 조금씩 삐걱거리는 흐름으로 드러난 것 같다. 태풍이 점점 다가오고 있다는 데서 느껴지는 위기감은 가족의 모습이 어떻게 만들어지느냐에 따라 달라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가족들의 반응이나 아빠의 반응 같은 것으로 태풍이 오고 있다는 걸 표현하고 싶었다. 그래서 이 가족이 태풍에 휘날려갈지 그냥 태풍이 지나쳐갈지 지켜보게 되는 거다. 진아의 나이에서 느끼는 불안감을 드러내기에는 태풍이 잘 맞을 것 같기도 했다.

 

태풍의 전조에는 물이나 바람의 기운 같은 것들도 포함된다. 진아가 일상적으로 느끼는 물의 감각이나 인물들을 휘감고 지나가는 바람이 인상적이더라. 실제로 분 바람이었나.

다 사람들이 만들어낸 바람이다. (웃음) 강풍기를 들고 만든 바람이고 비도 다 직접 뿌렸다. 그래서 스탭들에게 미안하고 고마운 마음이 크다. 아빠가 저수지에서 비를 맞으며 서 있는 장면이 들어갈 것은 처음부터 확실했기 때문에, 시나리오를 쓰면서 물이나 식물과 관련해 파생된 이미지들을 많이 넣었던 것 같다. 욕조에 담긴 물고기를 보는 진아가 물에서 비린내를 느낀다든지 하는.

ⓒ김혜미

영화에 등장하는 집 안 풍경이 기억에 남는다. 액자나 장식품도 매우 많고 특히 방금 말한 것처럼 식물이 무척 많다. 베란다는 물론이고 화장실까지 화초로 가득 차 있다. 집안 풍경을 만들면서 신경 쓰거나 염두에 둔 점이 있다면.

진아의 집은 엄마가 크게 장악하고 있어서 아빠가 비집고 들어설 틈은 거의 없는 장소다. 아빠의 장소는 저수지이고 그와 관련해서 풀과 물, 산 같은 것을 떠올렸기 때문에, 집 안에서는 엄마 나름대로 잡동사니들과 뒤엉킨 상태로 식물을 많이 키우고 있으면 어떨까 싶었다. 비슷하면서도 굉장히 다른 방식으로 식물을 통해 일종의 욕망을 드러내는 두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던 것 같다. 엄마가 집을 채우다 못해 화장실에까지 화초를 두게 되는데, 가족들의 불편함보다 자기가 가꾸는 화초가 우선인 거다. 진아가 양치를 하다가 화초에 거품이 튀면 그걸 또 집어내기도 하고.

 

배우들은 어떻게 만나게 되었나.

이번에 함께 작업한 배우들은 모두 처음 만난 분들이다. 지원서와 사진을 받고 연락해서 만나는 방식으로 배우를 찾았는데, 다 맨 처음에 미팅한 배우들과 함께하기로 결정되어서 더는 미팅을 하지 않았다. 내가 직관적인 성격이 있기도 하고, 배우들도 시나리오를 먼저 읽어보고서 좋아해서 역할에 대한 조율이라고 할 만한 게 거의 없었다. 배우들 덕을 많이 봤다고 생각한다.

 

진아를 연기한 김주아를 처음 만났을 때는 어땠나.

처음 보자마자 정말 진아 같은 느낌이었다. 김주아 배우가 실제로도 중학생이어서, 내가 원했던 진아의 담담함이나 절제된 놀라움을 표현하는 게 힘들겠다고 생각하기도 했다. 그런데 대화를 나누면서 표정 같은 것을 볼 때, 과하게 표정을 쓰거나 배워서 연기하는 티가 없는 사람인 것 같더라. 본인이 느낀 것을 현장에서 직관적으로 표현해내는 스타일이기도 하고. 그런 부분들 때문에 진아의 모습이 잘 드러나게 된 것 같다.

<링링>
<링링>

가족이나 관계의 균열을 염려하는 인물은 다양하게 묘사될 수 있을 텐데, 그중에서도 10대 여성을 주인공으로 정한 특별한 이유가 있을까.

지금까지 작업한 몇 편 안 되는 단편에서 주인공이 다 여성이었다. 내가 잘 표현할 수 있는 인물을 떠올려보면 역시 여성, 그중에서도 학생이 많다. 실제로 내 자신이 어른이라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웃음) 돌이켜보면 내가 주변의 충격에 가장 예민했던 시기가 중학생 시절이었는데, 큰일이 아닌 것에도 되게 불안해하고 그걸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했다. 시나리오 작업을 하면서 그때 민감하게 받아들였던 상처들을 조금이나마 치유할 수 있었다.

 

이전에 작업한 영화들도 궁금하다. 제목들이 <링링>과 관련이 있는데.

학교에서 맨 처음 캠코더랑 핸드폰으로 <생선>이라는 영화를 찍었다. 내가 주인공으로 나온다. ‘생선을 보면 야릇한 생각이 든다. 나는 전생에 생선이었나 보다.’라는 내레이션이 나오고, 생선과 뽀뽀하는 장면이 있는 좀 이상한 영화다. (웃음) 그때는 스무살이었고 배우와 함께 협업해서 영화를 만든다는 생각을 하지 못할 때였다. 그래서 그냥 내가 주인공이면 아무데서나 내 마음대로 찍을 수 있겠다는 단순한 생각으로 만든 거다. 다음에 찍은 <생선2>는 임산부가 생선을 낳는 내용의 5분짜리 단편영화고, 그전에 찍은 <양치>는 양치하는 게 섹슈얼한 이미지와 비슷하다는 생각에서 출발한 영화다. 거기서도 주인공 이름이 진아다. 아마 나를 좀 아는 사람들이 <링링>을 보면 이전 영화들의 내 모습을 합쳐놓은 것 같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다.

ⓒ김혜미

생선이나 양치질 등에서 섹슈얼한 이미지를 떠올리는 점이 흥미롭다. 계속 그런 주제로 영화를 만들고 싶어 하는 이유가 있나.

딱히 이유가 있는 건 아니고 내가 거기에 가장 흥미를 느끼기 때문인 것 같다. 살아가면서 그런 것들만 보거나 떠올리며 살진 않지만, 창작을 한다고 할 때는 그런 데 제일 관심이 가게 된다. 그래서 <생선>부터 <링링>까지 계속 그런 부분들이 부각되는 영화를 찍어온 것 같고. 낯설기도 하지만 어떻게 보면 평범하기도 한 이미지들이라고 생각한다. 메시지를 주고 싶거나 한 건 아니고 그냥 재미있다. (웃음)

 

명확한 결말 없이 모호하게 영화가 끝날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는데 굉장히 확실하게 마무리된다. 오히려 그 결말이 영화의 출발점이라고 말하기도 했고.

태풍에서 끝냈어야 한다는 분들, 아빠가 벼락에 맞았을 때 끝냈어야 한다는 분들도 있었고 영안실에서 끝냈어야 한다는 분들도 있었는데 난 굳이 하나를 더 간 거다. (웃음) 그런데 가족들이 아빠의 뼛가루를 뿌리는 그 마지막 장면이 너무 찍고 싶었다. 내가 보기에 진아는 거기서 끝내야 했고, 마지막 장면에서 보여주는 진아의 표정이 영화를 끌고 온 모든 것을 표현한다고 생각했다. 아빠가 죽은 것보다 진아가 앞으로 어떻게 살아갈지가 더 중요하지 않을까. 처음의 진아와는 조금 달리, 이제 막 감정이 나오려고 하는 그런 작은 변화가 보이는 장면이다.

 

영화를 시작하게 된 계기는.

원래는 글 쓰는 걸 좋아했다. 그러다 이명세 감독님의 <M>을 보고서 영화에 관심이 생겼다. 그래서 고등학교 때 친구들이랑 캠코더로 이것저것 찍어보기도 하고 동아리도 만들었는데, 아무것도 모르는 채로 영화를 찍는 게 너무 재미있더라. 그럼 영화과를 가서 더 배워보자는 생각으로 학교에 갔는데, 가고 나서는 좀 놀랐다. 나는 쉽게만 접근했었는데 할 것도 많고 배울 것도 많더라. 그렇게 시작하게 됐다.

 

앞으로 어떤 영화를 만들고 싶나.

나는 뭔가 어긋나는 것 같고 삐걱거리는 느낌의 영화를 좋아하고 그런 영화를 만들고 싶은데, 그게 장점이 될지 단점이 될지는 계속 의심하고 생각을 많이 하게 된다. 꼭 어떤 영화를 하고 싶다고 말로 하기는 어려운 것 같다. <링링>이 규모도 그렇고 나에겐 좀 큰 작업이었기 때문에, 다음에는 처음에 했던 것처럼 좀 더 가벼운 영화를 찍고 나서 다시 다른 작업을 하게 되지 않을까 싶다.

ⓒ김혜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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