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도 모르게 리셋
박영주 감독의 <선희와 슬기>
차한비 / Choice / 2019-04-02

지금 선희(정다은)는 인생을 ‘리셋’하고 싶은 심정이다. 암흑 속에서 두꺼비집을 내렸다가 올리듯, 버스를 타고 낯선 곳을 향해 떠난다. 불이 들어오고 주위가 밝아지면,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태연하게 연기해볼 작정이다. 유별난 욕구는 아니다. 성장도 극복도 불가능할 때, 과거로부터 교훈을 얻는 대신 상처와 죄책감만 남아서 버거울 때, 누구나 한 번쯤 인생을 초기화하고 싶다는 꿈을 꾼다. 아무도 모르는 곳으로 가서 다시 시작하려는 마음이야 평범하지만, 선희의 행보는 어딘가 부적절해 보인다. 이름을 바꾸고 배경을 지운 채 새로운 사연을 뒤집어쓰는 일은 온통 거짓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선희는 스스로 꾸며낸 리셋 버튼을 누른다.

집은 부유하지만 화목하지 않고, 부모는 자식에게 별 관심이 없다. 대화를 청하는 선희를 냉대하고 얼마간 돈을 주는 것으로 부모 된 도리를 다한다고 여긴다. 학교에서도 선희는 존재감 없는 학생이다. 그런 선희에게 처음으로 “안녕, 선희야” 하고 이름을 불러준 사람은 정미(박수연)다. 정미 주변에는 늘 왁자지껄하게 친구들이 모인다. 선희는 정미와 친해지고 싶어서 거짓말을 한다. 정미와의 공통점을 인위적으로 늘려냄으로써, 간격을 좁히려고 노력한다. 정미가 좋아하는 아이돌 콘서트 티켓을 암표로 사서 건네고, 정미의 머리 모양을 따라 한다. 급기야는 없는 남자친구를 만들고, 정미의 연애담을 자기 이야기인 양 떠든다. 선희의 태도는 친구들의 의심을 살만큼 맹목적이고 노골적이며, 거짓말은 허술하기 짝이 없다. 얼마간 정미와 친구들 무리에 끼어 시간을 보내지만, 곧 ‘이상한 애’ 취급을 받는다. 선희를 거세게 자극한 것은 다른 친구들의 멸시가 아니라, 정미의 동정이다. 정미는 뒤에서 수군대는 친구들을 어른스럽게 타이르며 선희가 불쌍하다고 두둔한다. 선희는 앙갚음하듯 충동적으로 거짓말을 하는데, 약간의 면박을 주려던 계획과 달리 비극이 닥친다.

영화는 판결을 요구하지 않는다. 선과 악을 나누어서 싸움을 부추기지도, 가해와 피해를 구분하여 응징하지도 않는다. 하지만 의도와 상관없이 선희는 심판에 놓이고 처벌을 수행한다. 선희는 선희인 채로 시작하는 법을 모르는 인물이다. 안녕, 나는 최선희야. 그다음 문장을 이어나갈 자신도 능력도 없다. 환영받지 못하는 선희에게 타인의 호의란 쉽게 베풀어지는 친절이 아니다. 거짓말이라도 해야, 그 정도 애라도 써봐야 겨우 얻을 수 있는 무엇이다. 선희는 “딱 봐도 거짓말인” 허무맹랑한 말들을 늘어놓지만, 관심을 받고자 하는 본심에 악의는 없다. 그러나 정미의 죽음을 눈앞에서 목격한 순간부터 선희는 ‘나쁜 사람’이 된다. 누구에 의해서가 아니라, 저 스스로 그렇게 된다. 정미가 자살한 후, 선희는 무작정 집을 뛰쳐나온다. ‘리셋’이 아닌 ‘종료’를 결심하며, 외딴 강으로 걸어 들어간다. 결과적으로 종료에는 실패하지만, 잠시 리셋된 인생을 얻는다. 우연히 만난 보육원 원장의 도움으로 선희는 두 번째 삶을 산다. 이름을 슬기로 바꾸고 고아 행세를 한다. 선희가 슬기일 때, 인생은 전보다 풍요로워진다. 무관심과 의심을 걷어내고, 응원과 보살핌 속에서 소속감을 느낀다.

이름은 그 자체로 존재를 의미하며, 정체성을 말하는 표식이다. 나 자신이 누구인지를 설명하고, 타인에게 어떤 식으로 호명될지를 알려준다. 이름을 묻고 답한 다음에야 비로소 관계 맺기가 시작된다. 내가 나인 것을 견디기 힘든 선희는 이름을 버리고 나서야 조금이나마 자유로워진다. 보육원에서 만난 민경이란 아이와 특별한 유대 관계를 형성하고, 새 신분으로 등교한 학교에서는 먼저 이름을 물으며 방울(정유연)에게 다가가기도 한다. 거짓말은 선희에게 생기를 불어넣는다. 선희는 다시 한 번 ‘이상한 애’가 되지 않으려고 최선을 다한다. 적당히 웃고 둘러대면서 눈치껏 버틴다. 하지만 선희가 그랬듯이, 슬기의 거짓말도 아슬아슬하기는 마찬가지다.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처럼 선희는 자신의 비밀에 위협받는데, 그 불안과 공포를 누구에게도 발설할 수 없다. 카메라가 클로즈업하는 선희의 얼굴에는 거짓말이 부여한 활기와 고립감이 뒤엉킨다.

선희는 타인의 생일을 제대로 축하하지 못한다. 태어났다는 사실만으로 축하받는 자리가 어색하다는 듯이 시선을 피한다. 선희일 때는 정미의 생일파티를 멀리서 지켜보고, 슬기일 때는 생일을 맞은 민경 옆에 불청객마냥 앉아 있다가 ‘넌 여기에 낄 자격이 없다’는 말을 듣기라도 한 것처럼 황급히 자리를 빠져나온다. 같은 맥락에서 선희는 사진 찍기를 거부한다. 사진이 취미인 친구 방울은 “남의 사진을 찍어도 이상하게 내가 보인다”고 말하는데, 이때 선희의 얼굴은 붕괴를 예감하는 사람처럼 황량하다. 선희의 거짓 세계는 단숨에 무너지지 않는다. 내부에서부터 조금씩 녹슬고 부식되어서, 어느 순간 돌아보면 이미 사라지고 없는 형태에 가깝다. 방울의 말대로, 아무리 나를 지우고 남인 척 감춰보아도 선희는 자꾸 선희가 된다. 결국 슬기가 아니란 사실이 발각되자, 선희는 이름 없이 “저기야” 하고 불리며 머물던 자리를 박탈당한다. 도망친 선희는 세 번째 이름을 갖는다. 슬기가 될 때 사용한 거짓말은 새 삶을 획득하고 보호하려는 엉겁결의 시도였으나, 이후 방울이 될 때는 양상이 다르다. 막연하게 지어낸 이름이 아니라 구체적인 대상의 이름을 훔치고, 그의 말과 꿈을 가장한다.

선희를 중심으로 사건은 군더더기 없이 전개된다. 거짓말과 정체성이라는 소재를 결합하여, 점차 이야기를 확장해나간다. 원칙적으로 유지된 클로즈업 화면은 인물의 복잡한 심리를 추적하며, 거짓말의 효과와 동기를 끈질기게 다룬다. 영화에는 이해와 공감은 시혜적인 결정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이유와 과정을 들여다보는 데서 출발한다고 믿는 태도가 반영된다. 동시에 섣부른 기대를 단념한다. 적어도 선희가 리셋 버튼을 눌러대는 한, 영화는 선희에게 밝은 미래를 허락하지 않는다. 다소 막막한 엔딩은 무거운 질문을 던진다. 선희의 이름 바꾸기를 어떻게 멈출 수 있을지, 선희는 과연 누구인지.

 

선희와 슬기 Second Life 제작 K'arts 감독 박영주 출연 정다은, 박수연, 정유연, 전국향 배급 리틀빅픽처스 제작연도 2018년 상영시간 70분 등급 12세이상관람가 개봉 2019년 3월 2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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