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의 전도, 세계의 변곡
<강변호텔>
남다은 / Choice / 2019-03-28

홍상수의 23번째 작품인 <강변호텔>은 그간 그가 창조해온 세계에 지각변동이 일어나고 있다는 인상을 어느 때보다 강렬하게 주는 영화다. 홍상수가 ‘극적인 사건으로서의 변화’를 불신하는 감독이라는 사실을 모르지 않지만, 이 영화에서 벌어지고 있는 어떤 과격한 변화의 운동을 부정하긴 어렵다. <강변호텔>에 새겨진 무서운 비약과 가차 없는 단절, 낯선 온기와 깊은 비애를 경험하는 동안 우리는 어쩔 수 없이 이렇게 중얼거리게 되는 것이다. 한 세계의 시작과 다른 세계의 끝을 동시에 활성화하는 것만 같은, 전에 없이 독보적인 이 지평은 무엇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간단하게나마 <강변호텔>에서 특별하게 감지된 몇몇 기운을 상기해보려고 한다. 먼저 배우 ‘기주봉’이라는 세계가 있다. 지난 영화들에서 기주봉은 어딘가에서 인물들을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자연스레 등장해서 짧게 머물다 사라지지만, 신기하게도 홍상수의 세계가 기대는 작고 단단한 언덕 같은 존재였다. 그의 직업이나 거처는 알 수 없을 때가 더 많았고, 그는 늘 고독한 단독자였으나, 그 세계의 유일한 ‘어른’ 남자처럼 보였다. 그런 그가 <강변호텔>에서는 영화의 중심에 오롯이 놓인다.

그는 한 겨울 호텔방에 혼자 기거하는 시인 영환이다. 그에게는 그다지 친밀해보이지는 않지만 아들도 둘-경수(권해효)와 병수(유준상)가 아버지를 만나기 위해 호텔에 찾아온다-이나 있다. 그리고 다른 누구도 아닌 그가 죽음과 마주하는 자가 된다. 물론 <풀잎들>에서 연극배우로 분한 그는 자살기도에 실패했던 경험을 사후적으로 되새기며 “자살하고 나서는”이라고 이상하게 말한 적이 있지만, 이 영화에서 시인 영환은 별다른 저항감이나 방어막 없이 현재적 감각으로 ‘그곳’을 응시한다. 죽음은 더 이상 과거나 미래에 속한 개념이 아니며 삶을 말하기 위한 수사도 아니다.

아버지와 아들의 혈연관계라는, 홍상수의 영화에서 이례적인 구도만큼이나 주목을 요하는 건 상희(김민희)와 연주(송선미)의 관계다. 영화 속 부자관계가 얼마간의 통념적인 사연과 감정으로 엇갈리길 반복한다면, 두 여자는 우정과 사랑 사이에서 비결정적인 감정의 온도를 평온하고 끈끈하게 생성해내고 있다. <밤의 해변에서 혼자>(2017)에서도 영희(김민희)와 준희(송선미) 사이에는 다른 무엇으로 대체될 수 없는 밀도가 존재했고, 언제부턴가 홍상수의 세계는 남녀의 구애활동보다 여자들의 관계에 보다 애틋한 시선을 보내고 있다. <강변호텔>의 상희와 연주가 창조해낸 지평은 그중에서도 가장 강력하다. 아버지와 아들들의 세계가 현실 언저리에서 여전히 발버둥 치며 스스로와 싸우고 있다면, 여자들의 세계는 이미 그런 시간을 어느 정도 지났거나 다시 바라보는 자리에 서서 감탄하고 감사하고 슬퍼하고 흐느낀다.

이분화 된 도식으로 <강변호텔>을 설명해서는 안 되겠지만, 다음과 같은 표현 정도는 허락되길 바란다. 한 쪽이 다가오는 사건 앞에서 불안하고 절실하게 떨리며 그 사건을 멈출 힘을 부재한 세계라면, 다른 한 쪽은 그 흔들림과 균열을 응시하고 애도하며 버텨내주는 기이한 힘을 내장한 세계다. 전자의 사건으로 인해 무언가 부서질지라도 후자의 풍경에 의해 시간은 지속될 거라는 예감을 안기므로 두 여자의 관계는 단순히 남자들로부터 분리된 이질적인 장면이 아니라, 이 영화 전체를 지탱하는 축으로 감각된다. 지금으로서는 여자들의 정서적이고 육체적인 거리와 운동이 이루어낸 일련의 풍경들이 그간 홍상수의 영화가 기꺼이 몸을 맡겨온 흰 눈의 풍경만큼이나, 혹은 그보다 더 투명하고 압도적이라고 말할 수 있을 따름이다.

‘강변호텔’이라는 미지의 시공간이 이 모든 활동들을 발생시키고 가능하게 한다. 인물들은 한 호텔에 있지만, 마치 다른 시간과 장소에 분리되어 존재하는 상태처럼 체감된다. 그러면서도 그들 각각이 놓인 장면들이 종종 서로를 주시하거나 상대에게 응답하거나 통한다는 느낌을 안기는 건 신기한 일이다. 내부의 구도가 잘 그려지지 않는 ‘강변호텔’은 그런 의미에서 인물이 아니라 쇼트들이 서로에게 간절하게 반응하며 성립되는 시공간이다. 그 점이 중요하다. 한 세계의 끝이 불현듯 들이닥칠지라도 그 장면에 치열하게 반응하는 다른 세계를 포기하지 않으므로 <강변호텔>은 그렇게 자신을 지켜낸다. 정념의 파동에 세차게 휩싸이면서도 이 영화가 끝내 강하다면 그 때문일 것이다.

 

 

강변호텔 Hotel by the River 제작 영화제작전원사 감독 홍상수 출연 기주봉, 김민희, 송선미, 권해효, 유준상 배급 영화제작전원사, 콘텐츠 판다, 무브먼트 제작연도 2018년 상영시간 95분 등급 15세 이상 관람가 개봉 3월 2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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