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갑내기 영화찍기
<내가 사는 세상> 곽민규·김시은
글 차한비 사진 소동성 / Interview / 2019-03-25

곽민규는 바이크를 좋아한다. 빠르고 멋있으니까. 김시은은 걷기를 즐긴다. 생각 정리하는 데 그만한 방법이 없단다. 곽민규는 이따금 고개를 숙인 채 느릿느릿 말을 고르고, 김시은은 어떤 질문에도 막힘없이 대답을 잇는다. 서울 토박이인 곽민규는 산과 바다, 숲과 강을 가까이에서 느낄 수 있는 여행을 선호하는데, 구미에서 나고 자란 김시은은 새로운 골목을 걸으며 도시의 숨겨진 매력을 발견할 때 가장 즐겁다. 다르다면 아주 다른 두 배우는 함께 출연한 여러 단편을 통해 독립영화의 흥미로운 단짝으로 자리 잡았고, 얼마 전 개봉한 <내가 사는 세상>(최창환, 2019)에서는 현실감 넘치는 커플 연기를 선보였다. 약속이나 한 듯 비슷한 색깔로 옷을 맞춰 입고 온 두 사람을 리버스에서 만났다. “늘 좋기만 한 사이는 아니”라지만, 나란히 앉은 모습만으로도 순식간에 분위기가 편안해졌다.

 

 

 

포털 사이트에서 서로의 이름이 연관검색어로 나오더라. 다섯 편이나 함께 작품을 했다는 건, 그만큼 일정한 성과를 내고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김시은_ 한두 작품을 같이 한다 해도 다음 작품에서 다시 만나기 어려운데, 이렇게 이어질 줄은 몰랐다. 특히 민규랑 찍었던 작품들은 큰 기대 없이, 영화제에서 상영되지 않더라도 영화로 완성되면 좋겠다는 마음으로 시작한 작업이었기에 더 신기하다. 친구이자 동료로서 귀하고 특별한 관계라는 생각이 든다.

 

언제 처음 만났나. 작품이 계기였나.

김시은_ 2012년 연극 <빵집 마누라>로 만났다. 민규는 이미 연습을 하던 중이었고, 나는 좀 늦게 합류했다. 동갑이다 보니 금방 친해졌다.

곽민규_ 나는 건국대를, 시은이는 상명대를 나왔는데, 두 학교의 학생들이 주된 멤버로 참여한 연극이었다. 처음 봤던 날이 아직도 기억난다. 연습 때 시은이가 연기를 너무 뻔뻔하게 하는 거다. 내가 계속 웃음을 못 참아서 나중엔 분위기가 싸늘해지기까지 했다.

김시은_ 얘가 날 좋아하나 싶었다. 뭐만 하면 웃으니까.

곽민규_ 아니다. 진짜 아니었다. (웃음)

김시은_ 나도 아니거든. (웃음) 그때 연극 마치고 민규가 다른 작품에 소개해주기도 했다.

곽민규_ 배우를 추천할 때 굉장히 조심스러워지는데, 시은이는 어디에 추천해도 불안하지 않다. 워낙 열심히 하고 잘하는 친구라서.

 

대학에서 연기를 전공했다. 어릴 적부터 배우가 꿈이었나. 곽민규 배우의 경우, 연출작 <홍콩멜로>(2018)에서 90년대 홍콩영화와 스타들을 향한 애정이 드러나기도 한다.

곽민규_ 동네 비디오 가게를 자주 드나들었다. ‘대한비디오’라고 <은하비디오>(김현정, 2015)에 나오는 딱 그런 곳이었다. 초등학생 때, 주성치 영화를 처음 봤는데 충격적일 만큼 재밌더라. 특유의 코미디에 반해서 주야장천 빌려봤다. 그때는 개그맨이 꿈이었다. 중학생 때는 가수. (웃음) 고등학생 때 <올드보이>(박찬욱, 2003)를 보고 나서 영화라는 장르에 관심이 생겼고, 배우가 되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김시은_ 배우라는 꿈은 늦게 가진 편이다. 구미에서 학창 시절을 보냈는데, 당시엔 연기학원도 없었고 주변에 배우가 되겠다는 사람도 없었다. 다만 뭔가를 만들고 사람들 앞에서 보여주는 걸 좋아했다. 십대 때 교회를 열심히 다녔는데, 성경 이야기로 연극을 올린 적이 있다. 성경이랑 똑같으면 심심하니까 약간 퓨전 식으로 바꿨지. 사람들이 연극 보면서 웃을 때 기분이 너무 좋은 거다. 배우가 되고 싶어서라기보다는 연극에 매력을 느껴서 연극학과에 진학했다.

 

그럼 배우가 되겠다는 결심은 언제였나. 계기가 된 작품이나 인물이 궁금하다.

김시은_ 대학교 2학년 겨울방학 무렵이었다. 이전까지는 연기를 하면서도 배우라는 정체성보다 연극에 참여하는 일원으로서 그 시간을 재밌게 즐기려는 마음이 컸다. 방학을 앞두고 우연히 본 오디션에 합격하면서 얼떨결에 대학로 입봉을 했다. 무대에서 엄청 혼나며 배웠다. 학교에서 연극할 때와는 현저히 다른 공기였다. ‘프로라는 게 이런 거구나’ 싶었다. 방학이 끝난 후에도 휴학하고 2년 정도 계속 연극을 했다. 복학했을 때는 배우가 되겠다는, 정말 잘 해보고 싶다는 마음을 먹은 상태였다.

ⓒ소동성

2015년부터 본격적으로 영화 작업을 시작했다. 어떻게 첫 발을 내딛었나.

김시은_ 원래는 연극을 계속 하려고 했다. 더 이상 불안한 마음으로 무대에 서고 싶지 않아서 9개월 과정의 연기워크숍에 참여했는데, 그때 만난 선배들이 영화 작업을 계획하던 사람들이라 자연스레 관심이 생겼다. 졸업하고 찍은 첫 단편영화가 <배우의 탄생>(이진호, 2015)이다.

곽민규_ 재학 중일 때는 교내 연극과 단편영화에 출연했다. 졸업 후 필름메이커스를 통해 가리지 않고 배역을 맡았다. 몇 작품은 영화제에서 상영되기도 했는데, 사실 20대에는 영화보다도 연애나 취미 활동을 우선시하던 때라서 크게 와 닿지 않았다. 영화제 초청받아도 “감독님, 저 여행 가야 돼요” 하고 말았다. (웃음) 진지하게 관객들과 만나고, 나라는 배우를 알리기 시작한 건 <당신도 주성치를 좋아하시나요?>(강동완, 2017)부터였다.

 

두 배우를 이야기하면서 <당신도 주성치를 좋아하시나요?>라는 영화를 빼놓기는 어렵다. 다수 영화제에서 관객들의 호응을 얻으며 ‘곽민규&김시은’이라는 앙상블을 각인시킨 작품이었다. 강동완 감독까지 포함하여 세 명이 일종의 ‘크루’처럼 보이기도 한다.

곽민규_ 동완이가 만든 <적조>라는 영화에 출연하며 친해졌다. 수많은 영화제에 낙방했지만, 우정이 깊어졌지. (웃음) 둘이서 여행 얘기를 자주 하는 편인데, 동완이가 홍콩에 가지 않겠냐고 물었다. 나도 마침 쓰고 싶은 시나리오가 있어서, “그럼 기왕 가는 거 같이 영화를 찍어보자”고 했다. 일전에 밴드 혁오의 ‘공드리’ 뮤직비디오 작업에 참여했을 때, 소규모 인원이 외국으로 떠나 매력적인 장면을 담아온 기억이 남아 있었거든. 나도 그렇게 영화를 찍고 싶다는 소망이 일종의 버킷리스트였다. 아무래도 배우가 한 명 더 필요하겠다는 판단이 섰고, “내 친구한테 부탁해볼게” 한 다음 시은이에게 제안했다. 다행히 흔쾌히 받아줬다.

김시은_ 흔쾌히 안 받아줬는데? (웃음)

곽민규_ 그런가.

김시은_ 말도 안 되는 시나리오 초고였다. 고쳐 나가면서 나도 욕심이 생긴 거다. 대화를 많이 했다. 이건 진짜 아닌 것 같은데, 다른 얘기 말고 네 얘기로 다시 써보라고. 민규야, 기억나니?

곽민규_ 아, 초고는 차마 말을 할 수가 없는데… 거의 한 장소에서 찍는 식이었다. (웃음)

김시은_ 이럴 거면 왜 굳이 홍콩까지 가야 하냐고 물었다. 한국에서 찍어도 된다고! 처음 연락 받았을 때는 농담인 줄 알았다. 여행가서 영화를 찍자고 하니까. 그러다가 동완이까지 만났는데, 두 사람 모두 되게 진심인 거다. 솔직히 셋이서 어떻게 영화를 찍나 싶긴 했지만, 친구들과 떠나는 여행에 의미를 두고 기꺼이 함께 하자는 결심을 했다. 동시에 개인적으로 실험해보고 싶은 것도 있었다. 편한 친구들과 같이 연기하면 긴장이 좀 풀릴지, 그때 내 연기가 어떻게 나올지 궁금했다. 아무튼 두 사람의 도전을 응원해주고 싶다는 마음가짐으로 시작했던 작품이다.

곽민규_ 네, 그렇습니다. (웃음)

김시은_ 동완이가 한국에 오자마자 바로 편집을 해서 놀랐다. 결과가 좋아서 셋이 영화제를 갈 기회도 많았다. 여행과 영화, 양쪽 모두 만족스러운 경험이었다.

곽민규_ 따지고 보면 <내가 사는 세상> 캐스팅도 그 작품 덕분이다. 최창환 감독님과는 2017년 대구단편영화제에서 만났다. 감독님이 당시 심사위원이었는데, <홍콩멜로>와 <당신도 주성치를 좋아하시나요?>를 좋게 봐주셨다. 영화제 기간 동안 대화를 나누면서 많이 친해졌다. 시나리오가 없을 때부터 같이 영화를 찍자고 하셨다.

ⓒ소동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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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사는 세상>을 선택한 이유를 묻고 싶다. 시나리오가 없는 상황에서 출연을 결정했다는 건 그만큼 믿음이 있었다는 뜻인가.

곽민규_ 시나리오를 기다리는 동안 무척 설렜다. 감독님이 노동영화를 만들었다는 사실만 알고, 전작도 본 적이 없어서 궁금했다. 내 경우엔 작품을 선택할 때, 감독과 대화가 잘 통하는지도 중요한 기준이다. 감독님은 그런 면에서 신뢰가 갔다. 시나리오 받았을 때는 금방 쓰윽 읽었고 재밌었다. 대구 올로케이션으로 촬영하는 점도 매력적이었다. 딱 하나 두려웠던 건 과연 내가 DJ에 어울릴까 하는 점이었다.

김시은_ 나는 캐스팅 과정에서 완성본에 가까운 시나리오와 감독님의 전작 <호명인생>(2008), <그림자도 없다>(2011)를 받았다. 사실 ‘노동영화’라고 해서 일종의 편견이 있었다. 안 봐도 무슨 내용인지 알 것 같았는데, 막상 영화를 보니 너무 좋은 거다. 노동문제부터 인간의 욕망까지 굉장히 폭넓게 다룬 작품이었다. 메시지가 분명하면서도 억지로 강요하지 않는 태도가 좋았고, 같이 작업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사는 세상> 시나리오 자체에 공감도 많이 했다.

 

꾸준히 단편영화에 출연하다가 첫 장편 주연작으로 <내가 사는 세상>을 만났다. 애정이 남다를 것 같은데, 개봉하고 기분이 어떤가.

김시은_ 처음 제안은 단편이었고, 촬영 때도 개봉을 염두에 두지 않았다. 촬영 과정에서는 바랐던 일이 아니기에 좋은 평가를 받고 나서도 한동안 얼떨떨했다. 장편, 주연, 개봉과 같은 부담이 없어서, 오히려 편안하게 연기할 수 있지 않았나 싶다. 요즘 관객들과 만나며 비로소 개봉이란 과정을 체감한다.

곽민규_ 현장에서 많이 배운 작품이다. 촬영은 4회차로 이루어졌는데, 이 일정이 가능했던 배경에는 좋은 사람들이 있다고 생각한다. 배우와 스태프로 참여한 유지영, 김용삼, 고현석, 김현정 등 대구 영화인들은 현장에서 최고의 호흡을 보여주었고, 내 곁에는 김시은이라는 오랜 친구이자 동료가 함께 했다. 촬영 시간이 연장된 적도 없이 신기할 만큼 속전속결로 진행되었다. 물론 배우로서 테이크를 더 가고 싶다는 욕심이 날 때도 있었고, 실제로 감독님께 한 번 더 찍자고 말하기도 했다. 그때 감독님은 괜찮다고 하시더라. 사소한 욕심을 내려놓고 진짜 중요한 것을 파악하는 법, 제한된 조건에서 최선을 선택하는 법을 배웠다.

ⓒ소동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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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차 만큼이나 작품 내에 흐르는 시간 역시 짧다. 길어야 일주일 사이에 벌어지는 내용인데, 개인적으로 상상했거나 또는 감독과 공유한 캐릭터 전사가 있는지 궁금하다.

김시은_ 민규의 애인으로서 어떤 언어를 구사할 것인지가 고민스러웠다. 영화의 지리적 배경은 대구이고, 나를 포함해 등장인물 대부분은 경상도 방언을 능숙하게 사용할 수 있지만, 민규는 짧은 시간 내에 숙지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관객이 보기에 거부감을 최소화하고 싶었고, 극중 시은의 이주 경로를 대구-서울-대구로 설정했다. 서울에서 민규를 만나 연애하다가 함께 시은의 고향인 대구로 내려온 상황이라고 가정한 다음, 민규와 대화할 때는 ‘서울말’을 사용하고 다른 사람과는 ‘대구말’로 대화하는 전략을 가져갔다.

곽민규_ 특별히 설정한 부분은 없다. 영화 속 인물들이 이루는 관계도가 실제로 내가 사는 현실의 관계도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민규가 하는 음악에 내가 하는 영화를 대입하면 연결되는 지점이 많았다. 친한 형, 여자친구, 지인, 업무 파트너 등의 관계와 그 안에서 야기되는 갈등이 비슷한 맥락에 놓여 있어서 자연스럽게 역할에 몰입할 수 있었다.

 

<내가 사는 세상>의 경우에는 연인이라는 관계뿐만 아니라, 예술가와 노동자라는 정체성도 두드러진다. 배역을 소화하기 위해서 어떤 준비를 했나.

곽민규_ 보통 캐릭터의 내적인 면뿐만 아니라, 외양도 가능한 밀착시키려고 노력하는 편이다. 이번에는 디제잉을 하는 역할이라 좀 부담스러웠다. 게다가 ‘DJ 뱁새’ 역으로 출연하는 강동완 감독에 비해서 내가 너무 밋밋하지 않나. (웃음) 감독님께 “머리를 밀까요? 타투를 해볼까요?” 라고 제안해보기도 했는데, 그런 생각 말고 평소 하던 대로 하라셨다. 영화에 입고 나오는 옷도 실제로 내가 자주 입는 옷들이다.

김시은_ 나는 사전에 리딩을 많이 하는 스타일인데, <내가 사는 세상>은 촬영 전에 다 같이 모이기가 어려웠다. 사는 지역도 다르고 일정도 촉박해서 겨우 시간을 맞춘 것이 부산국제영화제 기간이었다. 촬영이 얼마 남지 않았을 때라 당연히 리딩을 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감독님이 “우리 리딩 대신 각자 살아온 얘기하자”고 하는 거다. (웃음) 감독이 원하는 연기 톤을 알아야 현장에서 시행착오를 덜 겪는다고 생각해왔기에, 도리어 내가 더 마음이 급해졌다. 조르고 졸라서 딱 한 번 리딩을 했다.

곽민규_ 맞다. 시은이가 엄청 설득했다. (웃음)

김시은_ 감독님과 대화하면서 많은 생각이 들었다. 무례하다 싶을 만큼 날 선 질문도 여러 번 던졌다. 감독님은 내가 어떤 시각으로 세상을 바라보는지 궁금해 하셨고, 옳고 그름을 강요하기보다는 왜 그렇게 생각하는지 되물으며 대화를 이어나가셨다. 질의응답 과정에서 나도 모르게 가지고 있던 편견을 깨닫기도 했다.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이 확장되는 경험이었다. 결국 극중 시은이라는 인물을 표현하기 위해서는 시은이의 가치관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했던 거다. 연기 톤은 민규와 마찬가지로 본래 지닌 톤으로 했으면 좋겠다고 하셨다.

김시은 ⓒ소동성

영화에서 서로를 향한 감정이 자연스럽게 연결된다는 느낌을 받았다. 뭐랄까, ‘연애케미’보다는 ‘이별케미’가 조금 더 좋은 것 같기도 하다(웃음). 연인으로서 공유하는 뜨거운 순간이 아니라, 어쩌면 그 후에 찾아오는 애정, 우정, 의리, 존중 등 다양한 감정이 섞여 있는 태도가 담겨서 인상적이었다.

곽민규_ <내가 사는 세상>은 기본적으로 노동문제를 다루는 ‘멜로영화’라고 생각한다. 주인공이 지금 막 연애를 시작한 커플이 아니라, 오래된 연인이었기 때문에 다가가기 어렵지는 않았다. 음, 연애를 해보니까 오래 만나면 만날수록 친구처럼 느껴지더라. 내가 꿈꾸는 연인은 가장 친한 친구에 가깝기도 하다. 정말 좋은 친구. 그런 감정이 시은이라는 친구에게 느끼는 마음과 크게 다르지 않다고 생각했다.

김시은_ 커플 연기를 위해 굳이 무언가를 설정할 필요는 없겠다고 생각했다. 알고 지낸 세월이 얼만데. (웃음) 오랜 친구는 오랜 연인과 비슷한 구석이 있지 않나. 좋아하고 아끼는 마음과 더불어, ‘저렇게 안 했으면 좋겠다, 이것만 좀 바꾸면 좋을 텐데’ 싶기도 하고. 관계가 깊어질수록 좋은 모습만큼이나 싫고 미운 모습도 발견하게 된다. 민규도 그럴 거다. 잘 되길 바라는 마음에서 아쉬운 소리도 나오고. 그런 현실의 감정들을 영화에 가져왔던 것 같다.

<내가 사는 세상>

두 사람이 마주앉아서 말없이 국수를 먹다가 시은이 “너 안 힘들어?” 라고 물으면, 민규가 “뭐가?” 하고 툭 되묻는 장면이 기억에 남는다.

곽민규_ 단일 쇼트라고 해야 하나, 전체적으로 컷이 많지 않은 편이다. 감독님 스타일인데, 연기하는 입장에서도 롱테이크가 훨씬 편하다. 테이크를 여러 번 가기보다는 한 테이크에 충분히 집중하는 거다. 국수 먹는 장면에서도 레디, 액션! 한 다음 바로 들어가지 말고, 한참 먹다가 대사하라고 하셨다. 시간을 갖고 천천히 정서를 만들어가는 방식인데, 나도 이번 촬영하며 많이 배웠다.

 

‘오래된 연인’을 표현하는 디테일을 하나씩 찾아보는 재미도 있다. 대화에서는 기본적으로 반말을 하지만, “알겠습니다” 라든가 “죄송합니다” 라며 존대를 섞어 쓰기도 한다. 이때 존댓말은 미안한 마음을 전하거나, 불안해하는 연인을 안심시켜주고 싶은 상황에서 사용하는 연인의 언어다.

김시은_ 즉석에서 낸 아이디어였다. 계속 똑같이 연기하기가 싫기도 하고, 민규와는 워낙 오랫동안 호흡을 맞춰왔으니까 테이크마다 약간씩 변화를 시도하는 편이다. 민규가 일하는 클럽에서 싸우고 난 다음 집 앞에서 화해하는 장면인데, 처음엔 시나리오대로 “미안해”라고 하다가 끝에 “죄송합니다”라고 정중하게 사과해봤다. 진짜 미안한 마음을 전달하면서도 연인만의 농담이 섞인 분위기가 느껴졌으면 했다.

<내가 사는 세상>

비니는 커플모자인가? (웃음)

김시은_ 민규가 모자 쓴 모습을 보고, 나도 써야겠다고 생각했다. 미술학원에서 장시간 일하는 역할이니, 퇴근 후에 기름진 머리카락을 가리는 용도이기도 하다.

곽민규_ 그게 또 사연이 있지. (웃음) 엄청 비싼 모자다.

김시은_ 부산에서 충동적으로 샀다. 화면이 흑백이라 잘 안 보이는데, 실제로 보면 엄청 예쁜 털모자다. (웃음) 의상팀에 어떻겠냐고 물어봤는데 선택이 됐다.

곽민규_ 센스가 좋은 친구다. <홍콩멜로>에서도 치파오를 입혀 달라는 것이 계약조건이었다. 괜찮을까 싶었는데, 그게 나름 한 수였다. 너무 잘 어울리는 걸로 골라 와서 놀랐다.

김시은_ 평소에 도전하지 못하는 패션을 영화에서 실현한다. (웃음) <당신도 주성치를 좋아하시나요?> 촬영 때도 직접 스타일링을 했다. 동완이가 활동적인 룩이면 좋겠다면서 캡모자를 쓰자고 했는데, 헤어밴드는 어떻겠냐고 아이디어를 냈다. 결과적으로 영화와 잘 어울려서 다행이었다.

<내가 사는 세상>

두 배우를 ‘세트’처럼 연결하는 시선도 있지만, 사실 둘의 연기 스타일은 꽤 다르다. 곽민규 배우가 망설임 없이 공을 던져서 흐름을 만든다면, 김시은 배우는 어떤 변화구가 오든 안정적으로 받아쳐낼 줄 안다. 상대적으로 캐릭터가 부각되는 쪽은 곽민규이지만, 영화를 보고 나서 무게 중심이 누구에게 있었는지를 생각하면 김시은 배우인 것 같다. 서로 다른데도 화면에서 주고받기를 조화롭게 이어나간다. 실제로는 어떤가. 호흡이 좋다고 느끼는가.

곽민규_ <당신도 주성치를 좋아하시나요?> 촬영하면서 확실히 느꼈다. 내가 무엇을 어떻게 보내든, 이 친구는 다 받아쳐주는구나. 믿음이 쌓인 관계 같다. 마치 놀이를 하듯 연기에 변화를 주며 실험해볼 수 있는 사이이다.

김시은_ 어떻게 쳐도 편안하니까. 처음 만나는 배우와 연기할 때는 아무래도 이것저것을 고려하다 보니, 진행을 위해 대본대로 가는 경우가 많다. 민규와 있으면, 전체적인 틀을 벗어나지 않는 범위에서 최대한 자유롭게 연기하고 싶다는 마음이 충족된다. 굳이 말로 하지 않아도 ‘선’이 어디쯤인지 이해한다. 난무하는 애드리브 때문에 주제가 흐려지는 상황은 지양해야겠지만, 기본적인 약속이 지켜지면서 마음 편히 연기할 수 있어서 좋다.

곽민규_ 촬영 중에 대화를 많이 나눈다. “방금 좀 과한데?”라든가, “더 해도 되겠는데?”하면서 농담처럼 말하지만, 합을 맞추는 과정이다.

김시은_ 나만 등장하는 장면인데도 꼬박꼬박 모니터링을 해준다. (웃음) 자기 일처럼 생각해주니 고마울 따름이다.

곽민규_ <홍콩멜로> 편집을 1년 했다. 김시은이라는 배우가 등장하는 모든 테이크를 반복해서 본 거다. 이 친구가 얼마나 훌륭한 배우인지 알기에 욕심이 날 때가 있다.

김시은_ 와, 그때는 다른 말했다. 연기 별로라고. (웃음)

곽민규_ 아니, 편집할 때 너무 힘드니까.

김시은_ 갑자기 전화해서 “야, 연기 가짜로 하지 마라” 이러고 툭 끊었다. (웃음) 사실 우리는 연기도 연기지만, 성격이나 사고방식도 굉장히 다른 사람들이다. 한동안 안 보고 지낸 적도 있고, 늘 좋기만 한 사이는 아니었다. 친구 관계에도 올라갔다 내려갔다 하는 흐름이 있지 않나. 지금은 또 되게 가까워졌다. 어떨 때는 너무 친해서 연기에 방해를 받기도 한다. 이 친구가 왜 이러는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다 보이니까. 하지만 도움을 받는 경우가 훨씬 많다. <내가 사는 세상> 마치고 나서는 ‘나한테 민규 같은 동료가 또 있을까’ 생각하기도 했다.

곽민규 ⓒ소동성

서로의 연기를 오랫동안 지켜봐왔다. 상대에게 배우로서 어떤 매력을 느끼는지 궁금하다. 칭찬하고 싶은 면을 들려준다면?

곽민규_ 김시은은 용감한 배우다. 연기를 대하는 마음, 배우로서 살아가는 자세가 용감하다. 겁이 없다기보다는 용감하다는 표현이 적절하다. 갖고 있는 얼굴이 정말 다양하고, 매체와 장르에 따라 자신의 색깔을 잘 드러낼 줄 안다. 어느 현장에서든 프로페셔널하게 임하는구나 싶다. 같이 홍콩으로 촬영 갔을 때, 시은이가 보여준 단단함이 존경스러웠다. 이렇게 ‘깡’ 좋은 사람이 또 있을까 싶을 정도였다.

김시은_ 민규는 나에게 용감하다고 하지만, 옆에서 나야말로 놀랄 때가 많다. 나는 타인의 시선이나 여러 입장에 부딪쳐서 하려던 연기를 못할 때가 있는데, 민규는 그 시선을 밀고 나간다. 욕심으로 비춰지더라도 현장에서 어떻게든 부딪치며 소임을 다하는 모습이 대단하다. 배우로서 가져야 할 덕목이랄까, 자질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무엇보다 곽민규는 사람을 좋아한다. 인류애가 있어. (웃음) 그런 친밀함을 나눈 관계가 새로운 작업으로 이어지는 계기이자 자양분으로 작동하기도 한다.

 

앞에서 곽민규 배우가 말했듯, 김시은 배우는 영화․드라마․공연 등 다양한 분야에서 연기해왔다. 제작환경에도 차이가 있고 현장마다 배우에게 요구하는 바도 다를 텐데.

김시은_ 아무래도 상업영화나 드라마 현장은 사람도 훨씬 많고 항상 바쁘게 돌아가다 보니, 소속감을 느끼기는 어려운 것 같다. 제때 ‘치고 빠져야’ 하는 역할이기에 더 긴장되기도 한다. 사실 이전까지는 별 고민 없이 독립영화 다음이 상업영화라고 생각했다. 줄곧 ‘큰 물’에서 놀아야 한다는 말을 들어왔고, 나 역시 어떤 계단식 성장으로써 내 활동을 인식해왔다. 그런데 어느 순간, 숨이 막혀 오더라. 상업 현장이 힘들었다기보다는 연속해서 긴장 상태에 놓이다보니 지쳤던 것 같다. 점점 인지도를 높일 수 있는 배역을 따내면서도, 막상 연기할 때 예전보다 신나거나 즐겁지가 않았다. 강에서 바다로 넘어갔다고 생각했는데, 바다가 아닌 거대한 수족관에 갇힌 고래가 된 느낌이었다. 구경 오는 사람들은 많지만, 정작 나는 그 안에서 갑갑한 거다.

 

일종의 슬럼프처럼 들리기도 한다.

김시은_ 슬럼프는 얼마 전, 장편을 찍으면서 왔던 것 같다. <내가 사는 세상>은 촬영도 짧고 기본적으로 민규의 흐름으로 가는 영화라서 ‘장편 주인공’이라는 부담은 거의 없었다. 그런데 이번 영화에선 잘하고 싶은 마음이 너무 큰 거다. 연기할 때 벽에 부딪치는 것 마냥 한계를 맞닥뜨리기도 했다. 이대로 가면 안 되겠다 싶어서 1년 정도 느슨히 쉬어보려고 한다. 내가 열심히 달려서 그렇지, 차로 따지면 연비 좋은 차가 아니거든. (웃음) 혹사시키다보니까 연기에도 영향이 가는 것 같다. 올해를 나에게 주는 안식년으로 삼을 계획이다. 오디션 생기면 가서 또 열심히 보긴 하지만. (웃음) 예전보다는 마음이 편안하다.

ⓒ소동성
ⓒ소동성

곽민규 배우는 많은 영화에서 ‘서툴고 답답한, 근데 너무 진심이라 탓할 수가 없는 인물’을 연기해왔다. 멜로영화에서 본인의 장점이 살아나기도 하지만, 전작을 보고 캐스팅하는 경우가 많기에 특정 이미지로 고정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욕심나는 장르나 역할은 없나.

곽민규_ 욕망 때문에 무너져가는 인물을 연기해보고 싶다. <폭스캐처>의 채닝 테이텀처럼 뭔가에 미쳐서 파멸까지 내달리는 캐릭터가 인상적이다.

김시은_ 스펙트럼이 넓은 배우다. ‘미련의 대명사’ 같은 인물을 자주 연기하는데, 나는 다른 모습도 많이 봤다. 예전에 다단계 영업사원 역할을 너무 잘해서 놀랐다.

곽민규_ 나는 그때 내 연기 싫은데. (웃음) 오히려 시은이랑 다른 케미스트리를 만들어보고 싶다. 연인 말고, 원수지간? 서로 속고 속이는 관계를 연기하면 재밌을 것 같다. 연출도 계속 하고 싶다. 지금은 말뿐이긴 하지만, 생각나는 이야기들은 있다. 언젠가는 또 영화를 만들지 않을까.

 

차기작이 정해졌다고 들었다. 

곽민규_ 가장 빨리 볼 수 있는 작품은 <파도를 걷는 소년>(최창환, 2019)과 <이장>(정승오, 2019)이다. 5월에 열리는 전주국제영화제에서 상영한다.

김시은_ 작년에 촬영한 <사자>(김주환, 2019)가 여름에 개봉할 예정이다. 주연을 맡은 <빛과 철>(배종대, 2019)도 곧 공개될 것 같다.

 

마지막으로 두 사람에게 ‘내가 바라는 세상’을 듣고 싶다.

김시은_ 내가 자유로운 세상. 타인에 의해 좌지우지되기보다는 내 삶에서 나를 우선시하며 살고 싶다. 누군가를 원망의 대상으로 삼는다는 것이, 남을 탓하는 마음이 너무 괴롭다. 설령 결과가 안 좋더라도 내 선택과 결정이라면 납득할 수 있다. 내 의지로 움직이는 삶을 살면 좋겠다.

곽민규_ 독립영화에는 소수자의 의견과 시각이 담기는 경우가 많다. 그런 점이 가장 큰 매력이기도 하고, 영화 작업을 하면서 내 가치관이 바뀌기도 했다. 계속해서 자유롭고 안전하게 얘기할 수 있는 세상이기를 바란다. 요즘 뉴스를 보면 끔찍한 일이 수두룩하다. 돈이나 권력을 취득하면 괴물로 변하는 사람들이 있는 것 같다. 괴물이 되지 않도록 자기 자신을 돌보고 확인하며 살았으면 좋겠다. 나 또한 노력하겠다.

ⓒ소동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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