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상에서 실재로
<아사코>
강소원 / Choice / 2019-03-19

4년 전 <해피 아워>로 차세대 일본 영화계를 이끌어갈 선두주자로 주목받은 하마구치 류스케 감독이 시바사키 도모카의 원작을 바탕으로 신작을 내놓았다. 올해 칸영화제 경쟁에서 처음으로 소개된 <아사코>는 비전문 배우의 자연주의적인 연기로 격찬 받은 전작에 비해 보다 정형화된 연기에 다소 관습적인 멜로의 세계를 도입한 영화처럼 보이지만 문득문득 타고난 직관과 감각으로 힘들이지 않고 다른 차원의 세계로 이행해가는 신묘한 영화다.

영화는 어떤 과도함으로 다소 의심스럽게 시작된다. “말도 안돼. 그런 만남이 세상에 어딨어?” 아사코(가라타 에리카)와 바쿠(히가시데 마사히로)가 첫눈에 사랑에 빠지게 된 얘기는 그들 친구의 이런 반응만큼이나 오프닝에서 그 순간을 직접 본 우리에게도 믿기지 않는다. 아사코는 고쵸 시게오의 사진전에서 쌍둥이 소녀의 사진을 보고 나오는 길에 작렬하는 폭죽소리에 돌아보던 바쿠와 눈이 마주친다. 마치 예정된 일인 양 폭죽 속에서 서로의 이름을 묻고는 키스를 나눈 그들은 그렇게 연인이 되었다. 운명적인 사랑인가.

하지만 이 꿈결 같은 연애의 시초는 지나치게 환상적이어서 실감을 잃고 지나치게 상투적이어서 초현실의 문턱 가까이에 가닿는다. 아사코의 절친은 “절대 사귀면 안되는 부류”라며 바쿠와의 연애를 만류하고, 배경음악은 달콤한 로맨스에 불안한 기운을 퍼트리고, 카메라는 문득 트랙아웃으로 아사코에게서 멀어진다. 무언가 잘못되어 가고 있다. 그 인상이 짙어질 즈음, 바쿠는 “늦더라도 네가 있는 곳으로 돌아올게”라는 말을 남기고 환영처럼 사라진다. 그리고 2년 뒤, 오사카에서 도쿄로 온 아사코 앞에 그와 똑같은 얼굴의 회사원 료헤이(역시 히가시데 마사히로가 연기한다)가 나타난다.

초연하고 대담한 마성의 자유인 바쿠와 사려 깊고 다정하고 평범한 직장인 료헤이. 같은 얼굴에 판이한 성격을 가진 그들 사이에서 아사코가 겪는 대대적인 혼란은 한 인물의 내면에서 일어난 지진이나 쓰나미에 비견할 만하다. 언제까지나 아사코 곁에 있어줄듯 한 현실의 료헤이는 속을 알 수 없고 손에 잡히지 않아서 더욱 매혹적인 저 세계의 바쿠를 이길 수 있을까. 아니, 이 영화는 여러 평자들이 언급한, 기묘한 삼각관계를 다룬 도플갱어 이야기나 <현기증>의 여성 버전, 혹은 환상과 현실 간의 대조를 다룬 은유의 서사를 넘어선다. 말하자면 <아사코>는 아사코와 바쿠, 아사코와 료헤이, 바쿠 대 료헤이의 관계를 메인 플롯으로 삼아 표면적으로 장르 영화의 관습을 부분적으로 취하는 듯 보이지만(그래서 부당하게도 이 영화가 매우 상투적인, 순정만화 톤의 일본 멜로로 간과되기도 하는 것 같다) 정작 이 영화의 신비한 매혹과 활력, 불가해한 감흥은 플롯 바깥에서 온다.

여기서 하마구치 류스케 감독이 그리고자 한 것은 아사코의 내면에서 일어나는 혼란과 갈등, 어떤 선택과 결단에 관한 것이다. 이 중에는 시각화되는 것이 있고 그럴 수 없는 것이 있다. 하마구치 류스케는 이미지로 재현할 수 없는 것, 그러니까 그녀의 내면에서 일어나는 일에 대해서는 놀랍도록 대담하게, 그냥 건너뛴다. 대신 어떤 절박한 육체적 움직임과 격렬하게 요동치는 리듬, 급작스런 활력으로 그 플롯의 빈 칸을 넘치도록 채운다. 이를테면 영화의 후반부, 바쿠와 료헤이가 레스토랑에서 대면하는 약간 으스스한(한 명의 배우가 적대적인 두 인물을 연기하기에, 둘 중 하나는 유령처럼 보이는) 시퀀스에서 아사코의 망설임 없는 어떤 선택은 우리를 명백히 충격에 빠트린다. 아사코는 지금 ‘절대로 용서받지 못할’, ‘최악의’ 짓을 저지른 참인데, 정작 우리는 그녀의 내면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아무것도 알지 못한다는 사실이 충격을 배가시킨다. 이야기를 예기치 못한 방향으로 과격하게 비트는 아사코의 선택에 대해 하마구치 류스케는 단호한 태도로 일말의 설명도 보태지 않는다. 하지만 알지 못하는 것을 알지 못한 상태로 두고서도 아사코의 선택은 수긍될 수 있다는 이 영화의 믿음에는 아무런 의문도 들지 않는다. 그 선택의 이면에는 해명될 길 없이 내면에서 뛰쳐나온 미스터리한 일말의 진실이 있다. 요컨대 <아사코>는 아사코가 품은 내면의 미스터리에 관한 이야기다.

영화는 어느덧 환상적인 오프닝에서 가혹한 실재계로 접어들었다. 거의 수습 불가능한 지점까지 다다른 이 배신의 드라마는 다시 불가해한 변곡점을 거쳐 마지막 지점에 이른다. 이제 무엇이 더 남았을까 싶은 순간이다. 거기에 누구에게나 인상적으로 각인될 아름답고 절박한 광경이 있다. 소낙비를 맞으며 들고 있던 우산을 내팽개치고 달려가는 료헤이와 아사코가 아득한 롱쇼트로 포착되는 신이다. 프레임 상단에 아사코에게서 달아나는 료헤이와 그를 쫓아가는 아사코가 제각각 필사적으로 달리는 동안 프레임 하단에는 어느새 비가 그치고 그들을 향해 햇살이 서서히 퍼져간다. 달려가는 그들의 절박한 움직임이 망원렌즈로 포착된 롱 쇼트 속에 거의 포박된 것처럼 보일 즈음, 달리는 그들의 측면 쇼트로 장면이 전환된다. 놀라운 속도감과 리듬의 변화 속에 삶의 새로운 국면으로 몸을 들이려는 아사코의 안간힘이 역동적인 시각적 활력으로 재현되고 있었다. 여기서도 아사코 내면의 미스터리는 해명되지 않지만 그 몸짓은 우리에게 온전히 납득된다. 하마구치 류스케는 더 이상 어찌할 수 없을 지경에 이르러서도 거기서 다시 한 발 나아가보려는 아사코의 애절한 움직임으로 마지막 순간을 채운다. 나란히 서서 ‘더럽고도, 아름다운 강’을 바라보는 그들의 모습에 이상한 감흥이 인다.

 

아사코 寝ても覚めても 감독 하마구치 류스케 출연 카라타 에리카, 히가시데 마사히로, 세토 코지, 야마시타 리오, 이토 사이리, 와타나베 다이치, 타나카 미사코 수입 올댓시네마 플러스 배급 이수C&E 제작연도 2018년 상영시간 120분 등급 12세 이상 관람가 개봉 2019년 3월 1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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