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애들 아나?
<내가 사는 세상>
차한비 / Choice / 2019-03-09

강한 비트의 음악이 밤거리에 울려 퍼진다. 모자를 눌러쓴 남자가 캐리어를 끌고 등장한다. 그는 귀에 이어폰을 꽂고 시선은 아래에 고정한 채 묵묵히 앞을 향해 걷는다. 편의점과 카페와 식당 앞을 지나서 도착한 곳은 뜻밖에도 공원이다. 주변은 한산하고 하천 건너편에는 고층 아파트가 빽빽하다. 흰 불빛과 검은 강 사이에서 남자는 고개를 들고 길게 한숨을 내쉰다. 20대 중후반 정도 되었을까. 젊은, 그러나 마냥 어리다고 할 수는 없는 얼굴이다. 뭔가 억울해 보이기도 하고 잔뜩 실망한 눈치 같기도 하다. 화가 난 듯 미간을 찌푸린다 싶더니 이내 먼 곳을 바라본다. 지켜보는 입장에서는 어떤 표정이라고 확언하기 어려운데, 남자 역시 자신의 기분을 정확히 설명할 수 없는 듯이 보인다. 그의 얼굴에 드러나는 감정은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막막함에 가깝다.

두 청년이 있다. 민규(곽민규)와 시은(김시은)은 연인 사이다. 침대에 누워 익숙하게 포옹을 나누고, 늦은 밤 마주 앉아 국수를 먹는다. 민규는 퀵서비스 배달로 돈을 벌고 시은은 미술학원에서 강사로 일한다. 오토바이를 세워둔 채 길에서 빵과 우유로 대충 끼니를 때우는가 하면, 텅 빈 학원에 혼자 남아 입시생들이 따라 그릴 그림을 그린다. 고단한 하루가 끝나간다 싶을 때, 두 사람의 또 다른 일상이 시작된다. 민규는 이따금 클럽에서 ‘DJ밍구스’가 되어 춤추는 사람들 앞에 서고, 시은은 원장의 지시에 의해 기계처럼 일하는 대신 자신이 그리고 싶은 그림을 꿈꾼다. 그렇게 두 사람은 연애하고 노동하고 예술을 한다. 하지만 그럭저럭 생활의 무게를 견디며 즐겁고 ‘폼나게’ 사는 청춘을 보게 되리라 예상한다면 오산이다. 영화 속 세상은 어디까지나 ‘내가 사는 세상’이지 ‘그들이 사는 세상’이 아니다.

<내가 사는 세상>은 ‘요즘 애들’이라고 불리는 청년들의 이야기다. 꿈과 현실 사이에서 중심을 잡으려 애를 쓰지만, 현실은 번번이 그들의 꿈을 값싸거나 무지하거나 무례한 것으로 치부해버린다. 영화에서 벌어지는 고군분투를 가만히 들여다보면, 젊음이 얼마나 쉽게 빈곤에 처하며 열정이 어떻게 그토록 간단히 착취당하는지 알게 된다. 민규와 시은은 연애와 노동과 예술 중 무엇 하나도 성공적으로 지속하지 못하고 자주 곤경에 처한다. 민규는 형이라고 부르며 친하게 지내는 지홍(박지홍)의 클럽 ‘COMMUNE’에서 디제잉 공연이 결정되자 설렘을 감추지 못하지만, 시은은 지홍을 마뜩잖아한다. 의리와 정을 앞세워 정당한 보수를 지급하지 않거나 민규가 다른 클럽에서 공연하는 것을 금지하는 등 무리한 요구를 강제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시은 또한 대학 선배 지영(유지영)이 운영하는 미술학원에서 강사로 근무하면서 초과근무를 강요받는다. 시은은 거부하지 못한 채 잠을 아껴가며 수업자료를 만든다.

두 사람은 서로가 맞닥뜨린 부당한 현실에 분노하지만, 해결은 요원하고 책임은 온전히 각자의 몫으로 남는다. 적당히 타협하고 입을 다물거나 자리를 박차고 나와서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는 수밖에 없다. 어느 쪽을 선택하든 손실은 예정되어 있고 꿈을 실현할 기회는 드물기에, 용기를 내기란 좀처럼 쉽지 않다. 무보수 노동을 반복하던 시은은 급기야 ‘서울권 대학 출신 강사’에 밀려 일자리가 불안정해진다. 문밖에서 시은과 지영의 대화를 듣던 민규가 참지 못하고 나서자, 시은은 “네 일이나 똑바로 해”라며 민규를 다그친다. 한편 공연을 앞둔 민규가 계약서를 요청하는 순간, “우리 사이”를 강조하던 지홍은 돌변해서 온갖 욕설을 내뱉는다. 결국 공연은 일방적으로 취소되고 클럽 앞에는 공연 포스터 대신 민규의 입장을 금지한다는 벽보가 붙는다. 민규는 고개 숙인 채 디제잉 장비를 실은 캐리어를 끌고 걷는다. 걸음을 멈추자 참았던 눈물이 터져 나온다.

영화는 선명한 컬러에서 오는 생동감 대신 흑백의 단조롭고 정직한 화면을 선택한다. 일정한 거리를 고수하며 고정된 위치에서 진행한 핸드헬드 촬영 역시 영화가 지닌 특징이다. 자잘한 흔들림을 동반하는 흑백 화면에는 인물과 그들이 속한 사회가 가감 없이 드러난다. 꿈쩍 않고 버티는 현실 앞에서 인물들은 변화를 요구할수록 뒤로 내몰린다. 그러나 <내가 사는 세상>은 성장과 극복을 부추기기보다는 눈앞에 닥친 절망을 끝까지 지켜보기로 한다. 이때 영화 속 ‘청년’에게는 민규와 시은이라는 이름이 생기고, 영화를 보는 누군가에게 민규와 시은은 곧 자기 자신이 되기도 한다. 그들은 연애하고 노동하고 예술을 하면서 어떻게든 나답게 살고자 하는 사람들이다. 잘못된 것을 잘못되었다고 말하기 위해 이를 악물고, 그런 다음에도 괴로워하는 ‘요즘 애들’이다.

영화가 전하는 메시지는 분명하고 진하다. 퀵 서비스 회사가 보험료를 핑계 삼아 임금을 빼돌리자, 민규는 동료와 노동상담소를 찾아간다. 사무실로 돌아간 민규는 근로계약서 작성을 요구한다. 회사 실장은 “너네 열심히 사는 거 아니까” 라며 선심 쓰듯 회유하다가 민규가 뜻을 굽히지 않자 “다시는 이 바닥에서 일 못 할 줄 알아라, 니 내가 누군지 아나!” 하고 협박한다. 일을 그만둔 그 날 밤, 두 사람은 동네 공원에서 맥주를 마시며 싸구려 폭죽을 터뜨린다. 어느 폭죽은 불량품인 듯 잠잠하더니 갑자기 펑 하고 터진다. 소리만 요란하고 불꽃은 초라한데, 두 사람은 하늘을 올려다보며 감탄을 내지른다. 시시하고 씁쓸한 밤이 잠시 빛난다. 노동문제에 관심을 두고 꾸준히 작업해온 최창환 감독의 장편 데뷔작이며, 다수의 단편에서 함께 연기한 배우 곽민규와 김시은이 호흡을 맞춘다. <수성못>을 연출한 유지영, <혜영>을 연출한 김용삼 등 대구 지역 영화인들이 조연으로 출연하여 반가움을 더한다.

 

내가 사는 세상 Back from the Beat 제작 전태일 47기 대구시민 노동문화제, 독립영화전용관 오오극장, 민예총 대구지회 감독 최창환 출연 곽민규, 김시은 배급 인디스토리 제작연도 2018년 상영시간 67분 등급 12세 이상 관람가 개봉 2019년 3월 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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