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세기 이탈리아 영화를 대표하는 감독으로 자리 잡은 파올로 소렌티노가 <일 디보>(2008)에 이어 다시 한 번 부패 스캔들에 휘말린 자국 정치인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들었다. 이번 이야기의 주인공은 세 차례에 걸쳐 이탈리아 총리를 지낸 실비오 베를루스코니다. <일 디보>와 마찬가지로 감독의 페르소나인 토니 세르빌로가 베를루스코니 역을 맡았다. 마치 <노스페라투>의 주인공과 같이 줄리오 안드레오티의 굽은 등과 경직된 어깨를 강조한 희화화된 분장으로 아카데미 분장상 후보까지 올랐던 <일 디보>에서처럼, 이번 영화에서도 토니 세르빌로는 반지르르 윤이 나는 검은 머리와 진한 화장, 광대 같은 미소로 실비오 베를루스코니의 이미지를 풍자하고 있다.
베를루스코니가 총선에서 근소한 차이로 패한 뒤 자신의 별장에서 재기를 노리던 2006년에서 시작해 2008년 총리 복귀와 2009년 라퀼라 대지진을 거쳐 2010년까지의 시기를 다루는 <그때 그들>은 이탈리아에서 원래 2부작으로 개봉됐다. 이번에 한국에서 개봉하는 버전은 감독이 직접 편집한 인터내셔널 배급 버전이다. 편집한 부분은 대부분 1부의 내용으로, 여기서는 베를루스코니의 주변 인물들에 대한 이야기가 주로 펼쳐진다. 이번 개봉 버전에서는 40여분이 흐른 뒤에야 베를루스코니가 등장하는데, 이 초반 40여분의 내용이 1부를 편집한 것에 해당한다. 감독은 1부의 내용이 이탈리아의 현실 정치에 익숙하지 않은 외국인들로서는 따라가기 어려울 것이라 생각해 이런 결정을 내렸다고 밝혔다.

이탈리아 개봉 당시 이 영화는 감독의 전작들에 비해 좋은 평가를 받지는 못했다. 특히 여성들의 나체를 과도하게 착취한다는 비판에 직면해야 했다. 섹스 스캔들로 얼룩진 베를루스코니를 풍자한다는 명분 아래 그가 했던 방식을 그대로 답습하고 있다는 지적이었다. 토니 세르빌로는 이런 비판을 향해 여성의 신체의 과도한 재현이 베를루스코니와 같은 지도자가 대중을 현혹시키기 위해 잘 활용하는 피상적 쾌락에 대한 메타포라고 옹호했다. 토니 세르빌로의 훌륭한 연기는 영화 내내 돋보이지만 특히 이 답변과 관련해서 오롯이 그 혼자만의 연기로 관객을 압도하는 시퀀스가 영화 중반에 등장한다.
엔니오라는 이름의 사업가와의 대화를 통해 상원의원 6명을 설득시켜 현 정부를 와해시키고자 결심하는 장면과, 뒤이어 그 설득을 연습하려는 목적으로 한 여성에게 전화를 걸어 거짓으로 아파트를 파는 장면이다. 여기서 엔니오는 토니 세르빌로가 1인 2역을 담당한 캐릭터다. 두 대화 모두 ‘세일즈맨’으로서의 베를루스코니의 정체성을 강하게 드러낸다. 엔니오와의 대화에서는 그의 입을 빌어 세일즈맨은 바로 우리의 꿈이 그들의 꿈이 될 때까지 계속해서 그 가치를 확신시키는 사람이라고 말한다. 또한 어떻게 자신을 그렇게 잘 아느냐며 감탄하는 전화 속 여성에게 베를루스코니는 자기는 인생의 시나리오를 안다, 고객들의 고통과 희망을 모르면서 이탈리아 최고의 세일즈맨이 되지는 못한다고 자랑스레 얘기한다.

상대방의 고통과 희망을 파악하여 자신의 꿈을 마치 그들의 꿈인 양 팔 수 있었던 것, 그렇게 피상적 쾌락 속에서 영원을 약속할 수 있던 능력이 바로 베를루스코니를 만든 것이라고 감독은 믿는 것 같다. 그런데 그런 베를루스코니의 당당하고 자신만만한 웃음은 두 여자 앞에서 벽에 가로막힌다. 부인 베로니카, 그리고 파티에 초대된 20살의 여성 스텔라가 그들이다. 아마도 이탈리아 국민들의 의심을 대신해서 베를루스코니를 심문하는 것 같은 마지막 대화에서 베로니카는 이혼을 요구하며 그를 몰아붙인 끝에 자기는 아무것도 남지 않은 채로 형편없이 나이만 먹었다며 고개를 떨군다. 파티에서 스텔라는 그녀에게 접근하는 베를루스코니를 거절하며 그의 입에서 할아버지 냄새가 난다고 말한다.
전작들에서 노인과 나이 듦, 죽음에 대해 지속적인 관심을 표명했던 감독은 영원을 꿈꾸게 만드는 베를루스코니의 거짓에 맞서 삶의 유한함을 진실의 하나로 내세우려는 것 같다. 라퀼라 대지진의 폐허 아래에서 베를루스코니의 TV는 또다시 복구의 희망과 영원을 기대케 하는 종교의 위안을 서사화하겠지만, 영화의 엔딩은 그런 TV가 보여주지 않는 작업자들의 지친 얼굴들을 천천히 보여준다. 돌이켜보면 영화 내내 화려한 볼거리가 많이 주어짐에도 가장 기억에 남는 표정들은 축제 이후의 시간에 카메라가 담아낸, 어딘가 먼 곳을 바라보는 듯한 지친 눈빛들이었다.

그때 그들 Loro 감독 파올로 소렌티노 출연 토니 세르빌로, 리카르도 스카마르치오, 엘레나 소피아 리치, 카시아 스무트니아크 수입·배급 영화사 진진 제작연도 2018 상영시간 157분 등급 청소년 관람불가 개봉 2019년 3월 7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