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굴들>은 한마디로 정리하기 어려운 영화다. 각자의 경로를 떠돌며 분주하게 무언가를 시도하는 인물들이 있고, 그 의지를 앞지르거나 관망하는 영화의 구조와 시선이 있다. 그중에서도 박종환이 연기한 기선은 유독 힘겨워 보인다. 주어진 상황을 그대로 따르는 것을 답답해하고 가능한 행동들을 가늠해보지만 쉽지 않다. 그는 축구부 학생 진수(윤종석)의 삶에 개입하려는 고등학교 행정실 직원 인가 하면, 학교를 그만두고는 최종 허가가 떨어지지 않은 사보 제작을 위해 고군분투하는 출판사 직원이 되기도 한다. 그 과정에서 헤어진 연인 혜진(김새벽)이나 택배기사 현수(백수장)와 만나기도 하지만 이내 혼자가 된다. 박종환 배우를 만나 기선의 얼굴과 마음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다. <얼굴들>의 시작부터 연기를 하며 갖게 되는 고민과 욕심들까지, 사소한 질문에도 오래 생각하고 신중히 말을 골랐던 그와의 대화를 옮긴다.
개봉을 준비하고 영화를 다시 보면서 새롭게 느껴지는 부분이 있었나.
<얼굴들>은 그전에 해왔던 작업과 비교해 좀 생소했던 측면이 있다. 내가 영화에 어떻게 소개되고 어떻게 보일 거라는 비전이 잘 안 그려지더라. 그런데 그런 마음이 하나 있었다. 시간을 두고두고 이해해볼 수 있는 작품이었으면 좋겠다는. 지금도 비슷하다. 두고두고 계속 이해해볼 만한 것들이 많이 있어서, 생각을 계속할 수 있게 돼서 좋다.
2017년 부산국제영화제에서 <밤치기>로 올해의 배우상을 받았다. <얼굴들>도 시민평론가상을 수상했고.
사실 부담감이 컸다. 2015년도에도 <양치기들>과 <프로젝트 패기>로 부산국제영화제에 방문했다. 영화제 경험을 떠나서 두 작품을 그 기간 안에 공평하게 대해야겠다는 생각이 가장 앞섰고 그게 좀 부담이었다. 그런데 2017년도에 또 두 작품으로 영화제를 가게 됐다. 결과에 얽매이지 않으려고 해도 아픈 손가락 같은 작품이 있을까 봐 마음이 편치만은 않았다. 지금까지 영화를 꾸준히 찍어왔는데, 사실 수상에 앞서서 영화제에 가는 것도 쉽게 허락되는 기회가 아니다. 어쨌든 나는 보상 없이도 이 일을 즐기고 있었고 또 계속했을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영화의 시작 지점으로 거슬러 가보면 좋겠다. <얼굴들>의 시나리오를 받아보고 작업을 시작하게 된 과정은 어땠나.
시나리오를 처음 받았을 때는 분량이 많기도 하고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쉽지가 않더라. 그런데 배우 기질이라는 게, 이해가 어렵고 내가 하게 될지 확신이 없으면서도 마치 내가 할 것 같이 읽게 된다. 대사도 이렇게 저렇게 해보게 되고. 기선이란 인물이 어디서부터 이렇게 되어서 이런 상황이 생겼고, 이 마음이 어디서부터 생겼을지 생각해보게 됐다. 처음에는 행정실 직원이 아니라 선생님이었는데, 거기서 좀 거리감을 느꼈던 것 같다. 선생님은 내가 되기엔 좀 어려운 사람이라고 생각해서. 그래서 감독님을 만났을 때, 이 영화는 내가 안 하고 싶진 않은데 그렇다고 지금 하고 싶지는 않다고 했더니 “종환 씨가 스스로 나중의 모습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모르겠지만 나는 지금도 종환 씨가 이 인물과 가깝다고 생각하는 부분들이 있다”고 얘기를 해주셨고, 다시 생각해보게 됐다. 대신 선생님이 아니라 행정실 직원이 어떨까 말씀드렸더니 반영해주셔서, 그럼 나도 감독님이 나를 바라보는 시선을 믿어야겠다, 내가 이런 사람일 수도 있겠구나 싶어서 시작하게 됐다.

‘이런 사람’이라고 하는 건 구체적으로 어떤 걸 이르는 건가.
선생님은 책임감이 많아야 하니까. 내 주변에 있는 배우들은 생계 문제도 중요하다 보니 연기학원이나 연기과외를 많이 한다. 선생님 역할을 많이 하게 되는 건데, 볼 때마다 쉽지 않아 보이더라. 나는 책임감 자체에 대한 부담이 있고 그 부담만으로도 많은 것을 못 하게 된다. 예컨대 나는 할부 같은 것도 잘 못 한다. 현금이 있으면 현금을 최대한 많이 내고. (웃음) 그런데 책임감은 중요한 것이고, 그래서 좀 천천히 책임감을 가져보려고 했던 것 같다.
기선이란 인물은 어떻게 다가왔나.
일단 시나리오를 볼 때 기선과 혜진이 헤어진 이후의 삶이라는 것이 가장 크게 와 닿았다. 그맘때는 지난 시간을 돌이켜보며 누군가에게 미안하다고 생각하는 마음이 나를 지배하고 있을 때였다. 그래서 어떤 욕구불만 같은 것이 있었다. 말실수했던 것 같은 일들이 계속 맴돌고. 내가 그래서 그랬는지, 영화가 시작하는 순간 기선이 미안한 감정이 되게 많은 것처럼 생각이 되더라. 시나리오를 기반으로 생각했을 때는 그게 혜진과의 헤어짐에도 일정 부분 관련이 있는 것 같았고. 아무튼 무언가로부터 도망치고 회피하다가 그 순간에 진수도 눈에 들어오게 되고, 학교에 계속 남아있는 것을 고민하게 되지 않을까 싶었다.
영화 소개 영상에서도 이 영화를 찍으면서 영화와 삶이 서로 간섭하고 영향을 주고받았던 기억을 지금까지 가지고 있다는 말을 했다.
그런 불만, 미안한 마음, 자꾸 숨게 되는 마음들을 통해서 이 작품에 접근하게 되었고, 촬영하면서 생겨나는 것들이 다시 내 삶에 영향을 주게 된 게 있다. 후반부에 다시 진수를 만나게 되지 않나. 나도 혼자서 미안한 마음을 가지고 있고, 누군가를 다시는 못 보게 되지 않을까 생각했던 것들에 대해 마음이 편해지기도 했고, 시간이 지나면 또 괜찮을 것 같다는 생각, 기대도 생겼던 것 같다.
기선은 주어진 역할을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고 무언가 해보려고 시도하는 인물이다. 선을 조금씩 넘어서 좀 더 책임을 져보려고 하거나 더 알아보려고 하는 거다. 그런데 태도는 또 소극적인 면모가 있다. 하고 싶은 것이 분명히 있는데 표현이 무척 서툴다.
지금까지 마음에 있었지만 구태여 표현을 해보지 않은 것들이라 스스로도 좀 낯설고 익숙하지 않고 멋쩍은 모습들을 많이 떠올렸다. 그런데 그러면서도 또 이걸 이렇게 해봐야겠다고 선택한 순간에서부터 감정적인 부분도 생겼던 것 같다. 축구 코치를 찾아갔을 때도, 진수의 아버지를 찾아갔을 때도 감정을 드러내서 얘기하는데 여전히 익숙하지 않고 막상 입이 떨어지고 말이 나오는 순간 또 정신이 없고, 그런 기선의 모습이 계속 그려졌던 것 같다.
개인에게 친절하지도, 상냥하지도 않은 세상에서 어떻게 보면 기선이야말로 가능한 타인의 얼굴들을 찾아다니는 인물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기선은 왜, 무엇을 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음... 뭘 하고 싶다는 생각인지는 잘 모르겠다. 그 생각을 못 가져봤던 것 같다. 그런데 가장 크게는 시스템에 대한 환멸이 있는 것 같다. 그게 좀 많이 부대끼고 그것으로부터 벗어나고 싶어 하는 게 가장 큰 것 같다. 그때마다 보게 되는 얼굴들이 계속 바뀌고, 그러다가 그 사람한테 느껴지는 뭔가가 있으면 그냥 뚫어져라 쳐다보는 것 같고. 시스템으로부터 피하고 숨으려고 하는데 또 거기서 배회하는 느낌이다.
<얼굴들> 같은 경우 등장인물이 적은 영화는 아니지만, 인물들이 다 같이 나와서 무언가를 함께 하지도 않는다. 각자의 세계에서 자기가 당면한 상황을 겪는데, 그 모두와 만나는 인물이 기선이다. 그 만남은 또 조금씩 달랐을 것 같은데.
진수를 만났을 때는 기선 스스로도 어떤 상태인지 잘 느끼지 못하고 낯선 느낌이 있었다. 자기 생활에 대해 어떤 불만이 있고 무기력한 상황에서 저 아이가 눈에 들어와서 뭔가를 하긴 하는데, 그게 뭔지 정확하게 인지하고 하는 느낌은 아니었고. 그래서 그런 어색하고 멋쩍은 모습들이 많이 담겼던 것 같다. 현수를 만날 때는 좀 더 의지를 가지고 사보를 제작하는 일을 하려고 하다 보니 적극적인 부분이 있었다. 학교에 있을 때는 아무래도 제정신이 아니고 정말 많은 게 싫고 답답하고 벗어나고 싶은 느낌이었다면, 후반부에는 그래도 좀 의지를 가지고 잘 지내보고 싶어서 현수와 있을 때도 약간은 차분하고 안정적인 느낌이었다. 혜진을 만날 때는 아무래도 헤어진 상태이지만 급박한 상황이라 걱정되는 그런 마음이었고.

짧은 장면이긴 하지만 기선이 좀 편하고 여유로워 보이는 장면은 혜진과 같이 살았던 시기가 잠깐 나오는 집에서의 장면이다. 뭘 먹을까 이런저런 얘기도 하고 기억에 남는 장면이다.
시나리오를 읽으면서 과거가 너무 궁금했다. 그래서 그 과거 장면으로부터 혜진과 기선의 관계를 유추할 수 있을까 생각해봤는데, 그런 건 또 아니다. 그냥 평범한 어느 날이었고 그래서 편하게 연기했던 것 같다. 권태로운 느낌도 아니었고 그냥 나른한 느낌. 그런데 개인적으로는 내가 연애할 때를 생각하면, 어느 정도 만나고 지내다 보면 텔레비전 프로그램을 보거나 하는 부분들을 공유하게 되지 않을까 싶어서, 그렇게 낯설게 물어보지는 않을 것 같았다. 그래서 편한 관계이지만 좀 낯선 느낌들도 있었다.
조금 다른 느낌의 인상적인 장면 중 하나는, 사보 제작을 위해 담당자인 삼조정관을 만나러 가는 장면이다. 어떤 답답함을 토로하기도 하고 상대가 자기 상황을 알고 있다는 데서 놀라움을 드러내기도 하는 흥미로운 장면이다.
물론 어떤 감시에 대한 느낌을 가질 수도 있는 장면이다. 그런데 그때 기선에게는 어떤 긍정적인 의지가 생겼을 때라 거기에 대해서는 신경을 덜 썼던 것 같다. 사보를 만드는 과정 중 하나로 생각했던 부분이다. 만약 학교에서 나오기 전에 그런 상황을 겪었다면 더 불편했을 것 같은데, 그 장면에선 그렇지는 않았던 것 같다.
이강현 감독은 “조금만 건드리면 울음이 터질 것 같은 눈망울이라든지 반대로는 차갑거나 하는” 박종환 배우의 감정 상태를 굉장히 좋아한다고 말한 적이 있다. 수면 언저리에서 왔다 갔다 하는 모습이 있다고.
감독님이 해주신 얘기 중에 기억에 남는 게, “종환 씨는 눈은 촉촉한데 입은 되게 건조해요.”라고 하신 말이다. 보시는 분에 따라서 내 말에 집중하느냐 아니면 눈에 집중하느냐에 따라 약간의 차이가 있을 것 같다. 영화가 내 말을 더 중요하게 생각해서 장면을 보여주고 있느냐 아니면 그때 그 순간의 표정이나 몸짓을 더 중요하게 보여주고 있느냐에 따라서도 달라질 것 같다는 생각도 든다.
그렇게 수면 언저리에 있다가 진중하고 진지해질 수도 있는 반면 코믹해질 수도 있는 것 같다. 이를테면 <뎀프시롤: 참회록> 같은 경우가 그런 유머가 드러나는 예시가 될 수 있을 텐데, 좀 더 작정하고 웃음을 주는 연기에 대한 욕망도 있나.
있긴 한데, 내가 스스로 웃기려고 해서 사람들을 웃겨본 적은 없는 것 같다. 어릴 때부터 사람들을 웃기고 나도 재밌게 웃고 싶은 마음이 있었는데, 그런 마음을 먹으면 먹을수록 더 못 웃기게 된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주어진 걸 하고 있을 때 사람들이 즐겁게 웃으면 나도 즐거워지고 그게 제일 이상적으로 느껴진다. 누군가 재밌어하는 모습이 반가워서 다시 해보려고 하면 그건 또 안 된다. 정도를 잘 못 찾겠다. 그래서 그냥 열어놓고, 상황이나 순간에 좀 의지하는 편인 것 같다. 스스로 재능은 없는 것 같다. (웃음)
어떤 장면이나 대사의 톤에 대한 고민을 구체적으로 하지 못하는 습관이 있다고 했다. 방금 말한 것처럼 현장의 감각을 받아들이고 반응하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 같다.
예습, 복습을 하고 학습된 부분으로 연기를 해보려고도 했었는데, 그게 보는 쪽에서도 부자연스러웠던 것 같고 내가 잘할 수 있는 것과도 차이가 있는 것 같더라. 그래서 좀 다른 쪽으로 고민을 해봐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시나리오를 보면서 여러 상황을 생각해보고 그걸 그냥 버리고 또 버리는 과정을 거쳤다. 그런데 그게 휴지통에서 삭제하는 게 아니라 복구할 정도가 남아있긴 해서 연기를 할 때 조금씩 나오게 되고 또 여러 가지 방식으로 조합이 되면서 좋은 결과물이 나오는 것 같더라. 그래서 어떤 행동이 한 가지 의미로만 결정되는 게 아니라 여러 의미를 가질 수 있게 되는 게 나에게 더 중요했던 것 같다. 고민은 계속하게 된다. 너무 감각에만 의존하면 노력을 덜 하게 되기 때문에 계속 노력할 수 있는 걸 찾아야 할 것 같다.



한 가정의 아버지 역할을 언젠가 해보고 싶다고 말한 적이 있다.
책임감이라는 게 내가 가장 회피하고 싶은 것이긴 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거기에 대한 열망 같은 게 있는 것 같다. 그리고 무엇보다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고. 가장이라는 건 정말 책임감이 강한 역할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궁극적으로 그 역할을 잘하면 내가 배우로서 잘 지낸 것 같은 느낌이 들 것 같아서, 당장은 아니고 좀 멀리, 나중에라도 할 수 있게 된다면 나 스스로에게는 어려운 역할이지만 잘하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최근에 관심을 두게 되는 역할이나 해보고 싶은 연기가 있다면 어떤 게 있을까.
음... 멜로영화를 해보고 싶다. <밤치기>가 개봉하고 나서 멜로 영화에 대한 생각을 질문받았을 때, 멜로를 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까지도 영화 안에 멜로적인 부분이 조금씩은 있었던 것 같고, 또 <백역사>라는 단편영화가 있었다. 그걸 장편으로 해봐도 좋을 것 같다.
<백역사>를 장편으로 해봐도 좋겠다는 건, 그렇게 적극적으로 사랑에 임하고 관계를 만들어가는 것에 대한 열망이 있다는 건가.
그렇다. 잘 해보고 싶다. 단순하게 그거 하나 바라보고 계속 뭔가를 할 수 있는 그런 영화를 해보고 싶다. 영화에 처음 관심을 가지게 되고 재밌게 보기 시작한 것도 멜로영화에 대한 인상 때문이었다.
2016년에 <양치기들>이 개봉하면서 인터뷰를 많이 했다. 그리고 그 이후에 또 인상적이고 다양한 작업을 해왔는데, 2016년까지가 한 시기였다면 그 이후가 또 다른 시기처럼 느껴질 것 같다.
그때 개봉하고 해를 넘기면서 2017년도 상반기에 들꽃영화상에서 배우상을 받았다. 정신없이 수상소감을 말하면서, 다양한 영화에 힘을 보태고 싶다는 생각이 많이 들었다. 다양한 영화라는 건 시스템적인 것도 아니고 다양한 장르도 아니다. 누군가가 이유를 갖고 강력하게 만들고 싶은 마음이 있을 때, 나도 거기 보탬이 되고 같이 잘 만들어나가고 싶다는 마음이 드는 영화들이다. 그러다 보니까 말해준 것처럼 그 뒤에는 좀 다르게 지냈던 것 같다. 조금 덜 설명적인 영화를 하게 되고 캐릭터도 이해하기 쉽지 않은 역할들을 해왔던 것 같다. 기선의 연장선에 있는 듯한, 배회하고 머물러있기도 하고 살아있지만 죽은 사람 같기도 한, 부조리한 상황에 놓여있는 인물들이었다. 감정소모나 체력소모가 심한 건 아닌데 마음이 무거울 때가 많고 여러 생각이 들기도 하고 그렇게 지냈던 것 같다.
올해 계획이나 다음 작업에 대해 들려줄 이야기가 있다면.
촬영을 마친 영화들이 무사히 탈 없이 잘 완성됐으면 좋겠다. 상반기에는 내가 참여한 <생일>이라는 영화가 개봉 예정이라고 알고 있다. 올해는 잘 쉬는 것도 고민을 해봐야 할 것 같다. 재미있는 사람들과 꼭 영화 얘기를 하지 않더라도 재미있게 지냈으면 좋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