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와 예술은 한 데 뒤얽혀 있다. 예술가로서 주변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에 관여하고 관심을 기울이는 건 선택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책임과 의무에 해당한다.” 지난해 칸국제영화제에서 <가버나움>으로 심사위원상을 수상한 나딘 라바키 감독의 말이다. 전쟁과 성폭력, 가난과 기아, 난민과 강제 출국의 문제가 들끓는 레바논 베이루트에서 활동하는 감독에게 영화는 현실의 변화에 일조하거나 적어도 현실의 문제를 강하게 환기하는 방편으로 보인다.
감독 겸 배우로 활동하는 동시에 레바논의 현실 정치 선거에도 뛰어든 이력이 있는 행동주의자 나닌. 그녀는 사회, 종교적 금기와 차별에 맞선 레바논 여성들의 이야기를 멜로와 코미디 장르로 완곡하게 풀었던 전작 <카라멜>(2007), <웨어 두 위 고 나우?(Where Do We Go Now?)>(2011)보다 훨씬 더 강렬하고 선명한 목소리로 <가버나움> 속 세상의 폭력을 보라고 말한다. 예수의 기적이 행해졌지만 혼돈 속에서 멸망한 성서 속 도시 ‘가버나움’에서 제목을 따온 <가버나움>은 카오스적 현실과 그 현실을 뛰어넘는 기적을 정연하게 공존시키지만 끝내 희망 가득한 기적에 호소하며 우리를 얼마간 안도케 한다.
<가버나움>은 교도소에 수감된 소년 자인(자인 알 라피아)이 재판장에 선 모습부터 보여준다. 출생 기록이 없어 12살로 추정될 뿐인 자인. 소년의 죄가 무엇인지 체 알지도 못한 상태에서 우리는 소년의 단호한 고발의 말을 듣게 된다. “나를 태어나게 한 죄를 물어 부모를 고소하겠다!” 낳기만 했을 뿐 아무런 돌봄과 책임을 행하지 않는 부모, 태어는 났지만 생존할 수 없는 제도와 사회를 향한 고발이다.

영화는 이 당돌한 자인의 말을 남겨두고 곧장 플래시백으로 자인의 과거로 향한다. 소년이 지은 죄와 소년이 말하는 부모의 죄의 원유를 하나씩 풀어내는데 그 내용은 대략 이러하다. 가난하고, 그래서 더 무기력하고 무능한 부모 밑에서 자인과 동생들은 법과 불법의 경계가 희미한 무방비 도시 베이루트의 거리를 떠돌며 생계 전선에 뛰어든다. 디킨스적 세계의 인물들처럼 빈곤과 잔학무도함이 뒤섞인 도시에서 길을 잃은 아이들은 순진무구함 대신 세상의 생리와 이해타산을 빠르게 체득해간다.
자인은 부모가 10살 남짓한 여동생 사하르(하이타 아이잠)를 나이 많은 남자에게 팔아버리자 참을 수 없는 분노로 집을 떠난다. 우연히 만난 아프리카계 난민 라힐(요르다노스 시프로우)의 도움으로 자인은 그녀의 집에 머물며 라힐의 어린 아들 요나스(보루와티프 트레저 반콜)를 돌보기 시작한다. 하지만 라힐이 체포되면서 자인과 요나스는 또 다시 위험에 노출되고 그 사이 비극적 결말에 이른 사하르의 소식에 자인은 결국 법정에까지 서게 된다.
영화는 자인의 여정과 자인이 만난 난민 여성들, 어린아이들의 비참함을 보여주는데 상당 부분을 할애한다. 이러한 전개는 고스란히 영화의 앞뒤에 짤막하게 삽입된 법정 장면에서 자인이 했던 진술과 고발, 그를 둘러싼 변론을 위한 증거 자료로 기능한다. 영화는 휴먼 드라마의 안정적이고 전형적인 전개를 적극적으로 가져와 감정적인 호소와 비참한 현실을 가시화한다. 그리고 마침내 영화는 우리에게 묻는다. 정부의 제도적 지원이나 부모의 윤리적 돌봄, 그 어느 쪽에서도 보호받지 못하는 아이들, 세상 끝으로 내몰린 난민, 그들이 겪는 원치 않는 생이별을 이렇게나 오랫동안 보고도 자인의 죄를 물을 수 있으며 자인의 고소가 부당하다고 말할 수 있는가. 심지어 감독은 다른 역도 아닌 자인의 변호사 역으로 출연해 그의 변호를 대리하고 자처한다.

영화가 만들어진 과정을 살펴본다면 감독이 이 영화를 통해 성취하고자 한 바는 보다 분명해진다. 자인, 라힐, 요나스, 사하르 등 영화의 출연진 대부분은 비전문 배우로 보다 정확히 말하면 영화 속 상황과 크게 다르지 않는 환경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이다. 영화를 찍을 당시만 해도 이들 대부분은 신분 증명이 어려운 상태로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사람들이었다. 시리아 태생인 자인 알 라피아는 내전을 피해 베이루트에 와 10살 때부터 길거리에서 배달 일을 시작했고, 불법 체류 중인 요르다노스는 촬영 중간에 실제로 당국에 체포되기까지 했다. 보루와티프 트레저 반콜도 불법 체류자인 부모의 체포로 한동안 감독의 집에서 살아야 했고, 사하르 역시 길거리에서 껌을 파는 아이였다.
감독은 여러 인터뷰에서 <가버나움>에서 영화적인 설정이라고 할만한 것은 오직 자인이 부모를 고소했다는 것뿐이며 그 외에는 이들의 진짜 생활을 있는 그대로 카메라에 담았을 뿐이라고 말한다. “한 번도 연기를 해달라고 말한 적이 없다. 우리는 그저 그들을 관찰하고 그들이 편안해지도록 지켜봤을 뿐이다. 본연의 것을 어떻게 포착할 것인가. 우리의 고민은 그뿐이었고 이미 있는 것을 변형하려고 하지 않았다.” 감독에게 영화의 재현이란 있는 그대로의 현실을 포착하는 것이며 영화는 충분히 그럴 수 있고 <가버나움>은 그 방식대로 시도돼 얻은 결과인 셈이다. 이러한 태도에서 비참한 현실 속 가난한 아이들을 그렸다는 점에서 충분히 가능하게도 많은 평자들은 <시티 오브 갓>(2002), <슬럼독 밀리어네어>(2008) 등을 떠올리거나 이 영화를 네오리얼리즘의 계보 아래 두기도 한다.
다른 한편에서는 다소 과도한 비판처럼 들리지만 가난에 관한 인간의 연민을 극단적으로 보여주는 “빈곤 포르노”가 아니냐는 비판이 제기되기도 했다. 여기에 대해 감독은 <뉴욕 타임즈>와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반박한다. “글을 쓰고 있는 카페 밖으로 나가서 세상을 들여다보라. 비참한 현실에 비하면 이 영화 속 장면은 아무것도 아니다. 이 영화에 강간 장면이나 진정한 학대의 장면은 없다.그것을 찍는다는 건 불가능한 일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감독의 이 결연하고 단호한 말은 되레 그 자신의 모순을 드러낸다. ‘있는 그대로의 현실을 포착하는 영화’로서의 <가버나움>과 ‘있는 그대로의 현실을 재현하는 게 불가능한 영화’로서의 <가버나움>은 양립할 수 있을까. <가버나움>은 애초부터 불가능한 것을 시도하려다 자기모순에 빠진 것일까. 혹은 반쪽짜리 성공에 불과한 것일까.
적어도 감독에게만큼은 결과만 놓고 보면 <가버나움>의 시도는 성공적이다. 영화가 완성된 이후, 자인은 유엔 난민기구의 도움으로 지난해 8월 노르웨이에 정착해 학교에 다니고 트레저는 가족들이 있는 케냐로 안전하게 돌아갔으며 시드라 등은 유니세프의 특별 지원을 받았다. 감독은 ‘가버나움’ 재단을 만들어 영화 홍보뿐 아니라 변화를 위한 정부 차원의 협력을 이끌어갈 계획이라고도 밝힌 상태이니 말이다.

가버나움 Capernaum 감독 나딘 라바키 출연 자인 알 라피아, 요르다노스 시프로우, 보루와티프 트레저 반콜, 나딘 라바키 수입·배급 그린나래미디어 제작연도 2018년 상영시간 126분 등급 15세 이상 관람가 개봉 2019년 1월 24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