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유도원도 夢遊桃源圖
장률의 ‘공간-이미지’ 변화에 대한 몇 가지 단상 ②
변성찬 / Critique / 2019-01-15

장률은 입버릇처럼 자신이 공간의 영향을 많이 받는다고 말해 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영화는 좁은 의미에서의 ‘풍경영화’가 아니다. 심지어, 그의 유일한 다큐멘터리이자 제목조차 ‘풍경’인 <풍경>(2013)조차, ‘풍경영화’라고 말할 수 없는 영화다. 장률에게 특정 공간의 분위기란, 그 속에 담긴 어떤 삶의 정서와 리듬의 다른 이름이다. 따라서 그가 말하는 ‘공간’은 단순한 배경이 아니라 특정한 삶의 양태와 정서가 체현된 공간, 즉 공간학자 에드워드 렐프(Edward Relph) 등이 말하는 '장소place'에 가깝다.

한 편의 영화를 통해 재현되거나 구성된 공간은 단순한 지리적 배경이 아니라 창작자 자신의 내적 비전이 투사된 공간이고, 그런 의미에서 일종의 ‘장소로서의 공간’이 된다. 나는 이 글에서 ‘공간-이미지’를 지리적 배경과 창작자 자신의 ‘심상image’이 혼합되어 나타나는 그런 영화적 공간을 지칭하는 말로 사용하고자 한다. 창작자의 기질, 정서, 내적 비전 등이 응축되어 있는 그 심상은, 때로는 그 배경 속에 있는 특정한 인물 유형의 창안으로, 또 때로는 특정한 촬영 및 편집 스타일로 표현되고 체현된다.

장률은 특히 “시간의 흔적이 많이 남아있는 곳”이 그의 마음을 건드린다고 말하곤 한다. 그가 말하는 ‘시간의 흔적이 많이 남아있는 곳’이란 대개의 경우 시대의 속도를 따라가지 못하는 사람들의 삶의 방식과 정서가 잔존해 있는 곳이다. 그 시대에 뒤쳐진 삶의 양태와 정서에 자꾸 눈길이 가고 남다른 애착을 보인다는 점에서, 장률의 기질에는 일종의 ‘변두리 정서’가 자리 잡고 있다. 그 변두리 정서에 특별한 점이 있다면, 그 안에 중심에 대한 지향 또는 욕망의 징후가 (적어도 아직까지는) 나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장률 영화의 공간-이미지는 기본적으로는 그의 변두리 정서에 바탕을 두고 구성된 것이지만, 모두가 동일한 것은 아니다. 그 차이를 (위험을 무릅쓰고 단순화시켜보자면) 크게 ‘여성적 공간’과 ‘남성적 공간’으로 구분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장률의 중국시절 영화는 대개 여성(또는 여성과 아이)가 주인공인 영화이고(뒤에 다시 언급하겠지만 <당시>(2003)는 예외다), 한국시절 영화는 대개 남성(또는 남성들)이 주인공인 영화다(물론, 그의 유일한 다큐멘터리 <풍경>은 예외다).

장률의 중국 시절 영화 속 공간은 대개 문자 그대로 ‘경계 공간’이다. <망종>(2005)의 북경 외곽 지역(도시와 농촌의 경계), <경계>(2007)의 몽골과 중국의 국경지역, <두만강>(2009)의 북한과 중국의 국경지역 등이 대표적으로 그런 장소다. 단지 지리적인 의미에서 ‘경계’였을 뿐 아니라(지리적 배경 또는 전-영화적pro-filmic 차원), 대개 롱숏으로 포착된 황량하고 쓸쓸한 정조의 장소(영화적filmic 또는 스타일의 차원)들이다. 이 영화들은 그런 공간 안에서 뿌리 내리지 못하고 표류하고 있는 어떤 인물들의 삶을 멀찍이에서 뒤쫓아 가며 담아내고 있는데, 그 인물들은 대개 여성과 아이다. 말하자면 그 작품들은 국가/민족 또는 가부장제라는 중심에서 벗어나 있는(또는 그 중심의 힘에 의해 경계 밖으로 밀려나버린) 그 여성과 아이들의 수난사였다.

<망종>
<경계>

이 작품군 안에는 <중경>(2008)과 <이리>(2008)도 포함시킬 수 있다. 물론, ‘충칭’과 ‘익산’이라는 도시 자체를 경계 공간이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장률은 이 작품들에서 그것을 또 다른 의미에서의 경계 공간, 즉 일종의 ‘파국의 공간’으로 그려내고 있다. 그곳은 급격한 경제발전과 도시화로 인해 이미 파국을 맞이했거나(<이리>의 경우), 임박한 파국의 징후로 숨 막힐 듯한 공간(<중경>의 경우)이다. 장률은 이 영화들 속에서 그 가속되는 속도에 적응하지 못하는 어떤 인물들의 삶을 뒤쫓으며 그려내고 있다(그 인물에는 ‘노인’(<중경>의 경우)과 ‘이주노동자’ 및 ‘젊은 남자’(<이리>의 경우)도 포함된다).

장률의 한국시절 영화 속 공간 역시 결국 ‘경계 공간’이 되는데, 중국시절의 그것과 다른 의미에서 그러하다. 물론 이 공간들도 도시 속의 주변적 장소(<필름시대사랑>의 극장 및 병원과 <춘몽>의 수색동)이거나, 과거의 유산이 남아 있는 도시(<경주>와 <군산: 거위를 노래하다>의 경우)라는 점에서 장률이 선호하는 ‘흔적의 공간’이다. 그런데 그 공간을 표류하는 것은 남자들이다. 더욱 더 중요한 차이는 그 표류의 과정 속에서 일종의 ‘시간여행’의 기호들이 본격적으로 등장하기 시작한다는 것이다. 언젠가 김소영은 <경계>에 대한 글을 쓰면서 ‘카타스트로프catastrophe 속의 환상’이라는 멋진 말/개념을 소개한 적이 있다(『파국의 지도』, 73쪽). 그 환상은 일상적이고 정상적인 시간의 질서가 붕괴의 징후이기도 하다.

다른 방식으로 말해보자. 김소영의 지적처럼 장률의 중국시절 영화에도 정상적인 시간의 질서의 붕괴의 징후가 나타나고 있었지만, 그 이미지는 매우 직접적이고 강력한 방식으로 등장하곤 했다. 그것이 삶의 위기에 처한 여성과 아이의 ‘긴장과 공포’의 표현이었기 때문이다. 갑작스러운 ‘틈입’의 형식으로 나타나는 그 이미지들은 일견 ‘시간여행’의 기호로 읽히기에는 너무 절박한 것이기도 했다. 장률의 한국시절 영화(특히, <경주>와 <군산: 거위를 노래하다>)는 어느 정도 삶의 ‘여유’를 누리고 있는 남성(한국으로 여행 온 ‘교수’이거나 사업체를 갖고 있는 아버지를 두고 있는, 한 때 시인 지망생이었던 ‘백수’)들이 주인공인 작품들이다. 이 영화들에서 시간여행의 기호들이 갑작스러운 ‘틈입’의 방식이 아니라 점진적이고 단계적인 느슨하고 여유로운 ‘이행’의 방식으로 나타나고 있다. <군산: 거위를 노래하다>(이하 <군산>)의 도입부에서 나타나는 그 이행의 공간적(시각적) 형상화는 그 변화를 가장 두드러진 방식으로 드러내고 있다.

<경주>
<군산: 거위를 노래하다>

장률 영화의 ‘공간-이미지’의 변화, 또는 정상적인 시간의 질서의 붕괴 또는 와해의 기호들이 보여주는 변화를 장률 영화 스타일(또는 그것과 분리될 수 없는 미학적이고 윤리적 문제의식)의 이완으로 받아들일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첫째, <경주>와 <군산>이 품고 있는 그 경쾌한 정서와 유희적인 리듬은, 사실 그의 가장 엄격한 형식과 무거운 스타일의 영화였던 그의 데뷔작 <당시>가 품고 있는 미학적이고 윤리적인 문제의식의 다른 표현이기 때문이다. <당시>는 어느 날 갑자기 ‘백수의 삶’을 선택한 장률 자신의 10년을 반영하고 있는 영화다(그 갑작스러운 선택의 배경 중 하나는 1989년 중국 천안문 사태를 거치며 그가 겪은 절망감이다). 돈을 버는 아내를 대신하여 집에서 살림을 하며 보낸 그 시기를 되돌아보며 만든 이 작품에는 (근본적으로 국가권력과 결탁하고 있는) ‘가부장제’에 대한 치열한 문제의식이 담겨 있다(이에 대해서는 서울아트시네마 홈페이지에 실려 있는 「장률 영화의 원형-<당시>」를 참조할 것). 

장률의 가장 엄격한 ‘미니멀리즘’의 영화라 할 수 있는 <당시>와 그의 가장 여유로운 유희의 영화라 할 수 있는 <경주> 및 <군산> 2부작 사이의 거리는, 겉보기와 달리 그리 멀지 않다. 당대의 중국 현실에 절망감을 느끼고 있는 한 지식인의 자리와 한국에서 잠시 ‘이주의 삶’을 살게 된 여행객의 자리가 같을 수는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영화 속 공간-이미지가 담고 있는 정서에는, 가부장제에 대한 질문이 공통적으로 담겨 있다. 장률의 중국시절 영화가 가부장제의 외부로 밀려난 어떤 삶들에 대한 공감 또는 분노의 정서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면, 한국시절 영화는 그 가부장제의 중심에 자리한 어떤 삶에 대한 자기 성찰의 정서가 담겨 있다.

나는 장률과 홍상수가 그 가부장제에 대한 질문을 영화를 통해 지속적 던지고 있는 작가라는 일종의 비평적 가설을 갖고 있다. 물론 두 감독이 그 질문을 수행하는 방식에는 일정한 차이가 있다. 홍상수가 그 가부장적 권력을 누리거나 그 통념에 사로잡혀 있는 인물들을 형상화하며 그 이미지를 일종의 ‘거울’로 만들고자 한다면, 장률은 그 권력과 통념에서 벗어난 자리에서 대상(주로, 여성과 아이)을 바라보려 하거나(장률의 ‘여성-영화’), 그것에서 벗어나려고 하는 인물들을 주인공으로 삼고 있는 영화다(장률의 ‘남성-영화). 홍상수가 가부장적 권력의 내부에서 그것을 내파하는 길을 모색하고 있다면, 장률은 그 외부의 자리에서 그것의 파괴를 기다리고 있다. 

홍상수의 영화에 ’불륜‘은 등장하지만 ’강간‘은 등장하지 않는다. 반면 장률의 영화에는 ’강간‘은 등장하지만 ’불륜‘은 등장하지 않는다. 똑같이 ’경주‘라는 도시를 그 배경으로 하고 있는 홍상수의 <생활의 발견>(2004)과 장률의 <경주>의 공간-이미지는 그 차이를 잘 드러내고 있다. <생활의 발견>의 경주는 불륜의 장소인 ’호텔‘과 그곳에서 바라보는 불륜의 기호인 ’오리 배‘라는 상투적인 공간을 그 중심으로 하는 반면, <경주>의 공간은 그 상투적 공간에서 벗어난 ’찻집‘(“한 잔하고 하세!”라는 여유가 있는 공간)을 그 중심 무대로 삼고 있다. <경주>와 <군산>에서 장률은 어떻게든 ’성-관계 장면‘ 앞에서 멈추거나 피하려 하고 있는데, 그것은 가부장제 사회에서 그 행위를 통과한 이후의 남녀관계가 빠지게 될 어떤 위험에 대해서 그가 잘 알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영화적으로 그 위험을 통과하려면 어떤 의미에서 더 강한 용기가 필요할 터인데, 장률은 자신이 그런 용기와는 거리가 먼 기질의 소유자라고 생각하고 있거나, 자신까지 굳이 그 용기를 가질 필요는 없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둘째, 나는 한 작품이 형상화하고 있는 공간-이미지에 대한 미학적, 윤리적 평가는 언제나 미래의 것으로 유예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는 편이다. 따라서 작가론은 언제나 미완의 것일 수밖에 없다. 가령, 장률 영화에서 나타나는 여성-이미지가 어떤 여성의 삶에 대한 동정 또는 연민(근본적으로 여성에 대한 남성지배적 오리엔탈리즘)에 불과한 것인지 아니면 진정으로 적극적이고 대안적인 여성적 삶의 형상화(또는 그런 삶의 맹아-이미지)인지에 대한 판단은, 그의 이후 영화를 통해서만 가늠해 볼 수 있을 것이다. 홍상수 영화에 나타나는 남성-이미지 역시 그것이 단지 자기 합리화의 기호인지 아니면 진정한 자기 성찰의 기호인지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물리적 시간은 가역적이지 않지만, 의미의 시간은 가역적일 수 있다. 즉 그 의미는 언제나 소급적으로 다시 읽히고 다시 평가될 수 있다. 마지막으로 이 자리에서 말할 수 있는 것은, 이제까지 장률의 영화와 그것이 구성해 낸 공간-이미지는 충분히 좋은 방향 쪽에 내기를 걸어볼 수 있는 긍정의 대상이라는 점이다.

<군산: 거위를 노래하다>
<경주>
<춘몽> 촬영장에서 장률 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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