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초, 허기와 충만의 시간
SIFF2018 배우 프로젝트 - 강태제, 문순주, 오경화, 정유미, 홍경
글 차한비 사진 소동성 / Festival / 2018-12-20

지난 12월 7일 폐막한 제44회 서울독립영화제는 다양한 독립영화를 소개함과 동시에 ‘배우프로젝트-60초 독백 페스티벌’을 진행하며 큰 관심을 모았다. 신인 발굴과 후배 양성을 목표로 권해효, 조윤희 배우가 처음 제안한 이번 행사는, 독립영화 활성화에 기여하고자 하는 서울독립영화제와 실질적인 교류의 장을 필요로 하는 창작자 및 배우의 를 자극하기에 충분했다. 총 1,440명의 지원자 중 예심을 거쳐 선발된 28명의 본선 진출자는 권해효 배우, 변영주 감독, 양익준 감독‧배우, 전고운 감독, 조윤희 배우로 구성된 심사위원과 감독, 제작자가 참여한 자리에서 자유연기를 선보였다. 배우들의 연기는 진지했고 그들의 무대는 치열했다. 60초라는 제한된 시간 내에 자신만의 개성과 매력을 한껏 드러낸 강태제, 문순주, 오경화, 정유미, 홍경, 이 다섯 배우를 <리버스>가 차례로 만났다.

 

 

 

강태제, 미련 없이 다음 장으로

ⓒ소동성

강태제는 웃음이 많았다. 한 번 들으면 잊기 어려운 이름이라 물어보니, ‘태제’는 예명이고 고향인 제주의 ‘제’를 따온 이름이라며 미소 짓는다. 한창 촬영 중이던 현장에서 우연히 ‘배우 프로젝트’ 개최 소식을 들었다. 어떤 조건도 필요 없고 오직 연기만으로 판단하겠다는 권해효 배우의 이야기에 마음이 열렸다. 주어진 시간은 딱 60초. 자신이 아닌 다른 누군가를 드러내 보이기엔 부족한 시간이었다. 그때부터 강태제는 ‘나 자신’만을 생각했다. “자연스러움을 목표로 놓고 달려가는 연기가 아니라, 당신 자체를 보여 달라는 권해효 선배님의 말씀이 인상적이었어요. 이전까지는 캐릭터와 나 사이의 접점을 찾아야겠다는 생각뿐이었고 어떻게 해야 내가 좀 더 매력적으로 보일지에 대해서만 고민했거든요.”

본선 무대에서 강태제는 제주 방언으로 연기했다. 사람들이 알아듣지 못할까봐 걱정스러웠지만 그를 가장 그답게 하는 것, 그가 절대 잃고 싶지 않은 무언가는 제주에 있었다. 특히 제주가 지닌 ‘한’은 배우의 꿈을 가진 그에게 예민하게 다가왔다. “고향에서 느꼈던 감정은 양가적이었어요. 어딜 둘러봐도 그저 아름답기만 한 풍경은 없었으니까요. 유채꽃이 피어나는 봄이 오면 친척집에서는 동시에 제사가 열려요. 정방폭포 역시 제게는 관광지가 아니라 무덤이고요. 아름다움과 아픔, 풍요와 결핍이 맞붙어 있으니 항상 속이 울렁거렸어요.”

ⓒ송기영

시작은 쉽지 않았다. 연기가 하고 싶었지만 고민의 시간이 길었다. 계기는 뜻밖의 순간, 뜻하지 않은 방식으로 찾아왔다. “지금은 트라우마라고 생각하지 않는데, 가까운 사람에게 폭행을 당한 적이 있어요. 맞는 와중에 ‘이 느낌을 잊지 말고 잘 기억해야지’ 라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때 무조건 연기를 해야겠다고 결심했죠.” 강태제는 고통스러운 기억과 상처 입은 내면을 마주하며 배우 준비를 해나갔다. 언젠가는 타인의 슬픔을, 고향에 담겨 있는 아픔을 위로하고 표현하는 연기를 하고 싶다는 목표가 생겼다. 그 무렵, <한공주>(2014)의 천우희가 보여준 연기에서 눈을 뗄 수 없었다. 자신에게 저장된 고통스러운 감정을 충분히 느끼고 다룰 수 있는 배우가 되겠다는 마음은 원동력이 됐다.

지금껏 연기하면서 가장 기억에 남는 순간을 묻자, 얼마 전 촬영한 단편영화 현장을 떠올렸다. “사실 매순간 기쁠 수는 없어요. 아무리 해도 연기가 안 될 때는 너무 괴롭고 밑바닥까지 보는 것 같아요. 그 장면을 찍을 때도 걱정이 많았어요. 리딩에서는 물론 촬영 직전까지도 연기가 안 되던 장면이었거든요. 그런데 슛이 들어가자마자 상대 배우의 눈빛이 달라지면서 그 에너지가 저한테 오는 거예요.” 강태제는 그 날 이후 ‘믿음’에 대해 오래 생각했다. 영화란 혼자서 하는 것이 아니며, 눈앞에 있는 상대 배우와 시야 너머의 스태프들을 온전히 믿는 일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 계기였다.

“제 연기가 뛰어나서 3등상을 받았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전략적인 부분에서 운 좋게 들어맞았을 뿐이니까요. 여기에 취하기보다는 다음으로 잘 넘어가야겠다는 마음이에요.” 그는 “미련 없이 다음을 준비하는 태도”를 중요하게 여긴다는 말과 함께, 2019년을 앞두고 도움닫기를 시작한 기분이라고 전했다. 각양각색의 배우들이 뿜어내는 열기를 지켜보고 그들과 무대에 올랐던 경험은 마음을 단단하게 만들었다. 강태제는 다시 신발 끈을 묶고 문 앞에 섰다. 밖에서 기다리는 것이 행복이든 불행이든 감당할 준비를 하고서.

ⓒ소동성

 

 

 

문순주, 레벨 업의 재미

ⓒ소동성

문순주는 직접 촬영하고 연기하고 편집한 동영상부터 보여주었다. 노래 <마지막 승부>를 붙여 만든 ‘원맨쇼’ 뮤직비디오. 어떻게 해도 일이 풀리지 않던 시기에 그 나름대로 애쓴 결과물이었다. 오디션에 줄줄이 탈락하며 자존심도 많이 다쳤다. 심드렁하게 일상을 보내던 중에 지인의 권유로 배우페스티벌에 참가했다. 지원자는 1500명에 육박했고 일찌감치 기대를 접었다. 본선에 진출했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 나서야 뒤늦게 불이 붙었다. “그래, 기왕 이렇게 된 거 1등 해보자!” 그리고 문순주는 정말 1등을 했다.

군 제대 후 무작정 극단을 찾아갔다. 대구의 한 극단에서 연기를 시작한 그는 2005년에 서울로 올라왔다. 그때도 ‘맨땅에 헤딩’하는 수밖에 없었다. 대학로에서 연기는 물론, 소품, 음향, 조명, 무대감독 등 해보지 않은 일이 없다. 영화 첫 출연은 2006년 <삼거리 극장>. 팝콘을 먹다가 기절하는 역할이었다. 수백 번 연습하고 현장에 들어갔는데 떨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채지도 못할 만큼 떨었다. “옆에 콜라가 있어서 마시려고 하는데 손이 덜덜거리더라고요. 컵을 드는 순간 다 쏟아버릴 지경이기에 주구장창 팝콘만 먹었어요.”

본선 무대에서 보여준 연기에 대해 묻자, 수줍은 미소와 함께 답변이 돌아왔다. “1년 반 정도 짝사랑 한 사람이 있었거든요. 고백을 하긴 해야겠는데 사이가 멀어질까봐 두려워서 끝내 제대로 마음을 못 전했어요. 그때 상황을 떠올리면서 대본을 썼어요. 그 날, 그 친구에게 진짜 하고 싶었던 얘기를요.” 다큐멘터리 감독인 사촌 형과 연기를 지도하는 지인의 도움으로 문순주의 독백이 가다듬어졌다. 늦었지만 진솔하게 고백하며 과거를 달래는 동시에 관객에게도 자신의 마음을 효과적으로 전달할 방법을 고민했다. “여기서라도 얘기하자 싶었어요. 우주 끝까지 들릴 정도로 사랑한다고 외쳤죠. 나중에 변영주 감독님이 말씀하시더라고요. 작전을 잘 짰다고(웃음).”

ⓒ송기영

작년부터 유독 힘든 시기를 보냈다는 문순주. 오랜 시간 파고를 감내하며 계속해서 연기하는 이유가 뭘까. “내가 잘한다고 생각했을 때 정말 재미없더라고요. 연기가 뭔지 다 알겠는데 아무도 나한테 역할을 주지 않는 거예요. 무기력해지고 주변 사람들 보기도 미안하고, 스트레스가 너무 심해져서 대본을 볼 수 없는 상황까지 갔어요. 그런데 신기하게도 바닥을 찍고 나니까 희미하게나마 보이기 시작하더라고요. 내가 뭐가 부족한지, 뭘 더 배워야 하는지. 이전에는 자존심 때문에 도와 달라는 말도 못하는 사람이었는데 그 후로는 옆 사람 붙잡고서 가르쳐달라고 했어요.” 배움은 또 다른 시작이었다. 몸에 익히고 현장에서 실험하며 소중한 성취감을 맛봤다. “지금은 재미있어요. 마치 게임하면서 아이템을 모으고 능력치를 올릴 때처럼 하나씩 늘려나가는 재미가 굉장해요.”

현재는 내년 개봉 예정인 이정호 감독의 영화 <비스트>를 촬영 중이다. 비중은 크지 않지만 맡은 배역에 최선을 다하려고 애쓰고 있다. 대규모 현장이라 처음엔 기가 죽기도 했는데 점차 편안해졌다. 이번 배우페스티벌이 불어넣어준 자신감과 격려 덕분이기도 하다. “권해효 선배님, 조윤희 선배님, 그리고 서울독립영화제에 진심으로 감사드려요. 만약 이 경험이 없었다면 지금 현장에서도 나답지 못했을 것 같아요. 많은 힘과 격려가 되었습니다.”

ⓒ소동성

 

 

 

오경화, 행복 큐레이터

ⓒ소동성

무뚝뚝하리만치 조용하다가 일순 쉼 없이 말을 쏟아냈다. 그러고는 다시 고요한 얼굴로 눈을 깜박였다. 오경화의 리듬은 독특했다. 좋아하는 배우를 묻자 생각할 시간이 필요하다고 했다. 그의 대답은 샐리 호킨스. 볼 때마다 다른 느낌을 불러일으킬 정도로 섬세하고 메시지가 풍부한 연기를 보여주기 때문이다. 현실의 무엇이 아니라 오직 영화만이 위안이 될 때 찾게 되는 배우, 그 앞에서 한참 쏟아내고 나면 또 다시 살아갈 수 있도록 힘을 주는 연기. 오경화는 그런 배우를 좋아하며 그런 연기를 꿈꾼다.

전공은 IT공학이었다. 맞지 않는 옷을 입은 듯 답답했지만 어쨌거나 졸업은 해야 할 것 같았다. 교류대학 제도로 서울에 한 학기 정도 머무를 기회가 생겼을 때, 그는 망설임 없이 상경해서 남산 근처 고시원에 들어갔다. “내가 속한 환경을 벗어날 수 있겠다는 생각에 잔뜩 부풀었죠. 근데 정말 외로운 거예요. 공부는 싫고 서울 생활은 고독하고 고시원에는 정말 잠만 자러 들어갔어요. 힘든 시기였는데 한편으로는 집중적으로 나 자신을 생각한 계기가 되었어요.” 오경화는 하고 싶은 일들을 펼쳐놓고 우선순위를 정했다. 1위 도예, 2위 목공, 3위 연기.

“그러다 어느 날 드라마 <해를 품은 달>을 보는데 장영남 배우에게 마음을 완전히 빼앗겼어요. 장영남 배우의 연기를 보는 순간, 제가 고시원이 아니라 아예 완전히 다른 세상에 가 있는 기분이 들었어요.” 오경화는 그날 밤을 ‘황홀한 밤’으로 기억했다. 고향으로 돌아가 취업준비생의 신분으로 모 기업 채용설명회를 듣고 있을 때, 그 강렬한 기억이 되살아났다. 오경화는 다시 한 번 낯설고도 황홀한 세계에 접속했고, 그로 하여금 두 번째 상경을 결심하게 만들었다.

ⓒ송기영

생애 첫 오디션은 백승화 감독의 영화 <걷기왕>(2016)이었다. 정신없이 오디션을 마치고 퇴장하려는데 뒤에서 “열심히 하세요!”라는 인사가 들려왔다. 그 말 때문에 탈락이라고 확신했지만 결과는 합격이었다. 두 번째 상경 이후 5년이라는 시간이 흐르는 동안, 오경화는 연기만큼이나 자기 자신을 향한 질문도 열심히 이어갔다. “왜 연기를 하는지, 정말 하고 싶은지 끊임없이 물어봐요. 만약 아니라는 대답이 나오면 그만두려고요. 제가 하고 싶지 않은데, 그 메시지를 흉내 낸다고 해서 과연 전해질까 싶어요. 결국 인간 대 인간으로 만나고 살아가는 세계에서 예술은 그런 거라고 생각해요.”

오경화가 느낀 연기의 가장 큰 매력은 ‘전달’이다. “본질적으로 행복은 사람들 각자 안에 뿌리내려져 있다고 생각해요. 저는 남에게 먼저 다가가거나 감정 표현에 능숙한 스타일은 아니지만, 연기를 하면 간접적으로나마 나눌 수 있겠더라고요. 마치 미술관의 큐레이터처럼, 연기라는 장르에서 배우란 행복을 전달하고 또 여러 사람과 함께 느낄 수 있다는 점이 매력적이에요.” 배우페스티벌에서 보여준 연기를 소개해달라고 하자 “그때 그 자리에서 하고 싶은 독백”이었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자신이 정직하게 선택해야 관객에게도 전달되리라 믿는 오경화의 얼굴이 투명하게 빛났다.

ⓒ소동성

 

 

 

정유미, 연기라는 순례길

ⓒ소동성

광주에서 태어났고 안산으로 이주했다. 어느 날에는 무심결에 중얼거렸다. ‘어째서 나는 이렇게 핍박받은 도시에서 살게 되었을까?’ 도시가 품은 그늘은 그에게 크고 작은 영향을 주었다. 도시가 주지 않았어도 그가 받을 수밖에 없는 목소리였다. 결혼 후 떠났던 무대에 다시 복귀하고자 마음먹었을 때, 세월호 참사와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 사태는 외면하기 어려운 현실이었다. “지금 느끼는 감정을 외면한 채 예쁘고 멋있는 연기만 한다는 건 가식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배우라는 업에 임하는 태도가 바뀌어야 한다고, 지금의 내가 할 수 있는 연기를 해야겠다고 마음먹었죠. 맡을 수 있는 배역이 줄어들고 설 수 있는 무대가 좁아졌다고 해도요.”

독백은 영화 대본이 아니라 5.18 광주민주화운동 증언록에서 발췌했다. 연출가의 허락과 관계없이 자유롭게 사투리 연기를 해보기는 처음이었다. 생생한 문장에 담겨 있는 진실과 연기를 향한 정유미의 절실함이 만나자 드라마틱하게 진동했다. “1분이라는 제한 시간에 맞추려고 촬영을 거듭했죠. 마치 12시를 앞둔 신데렐라처럼요(웃음). 약속이기도 하고 심사에도 중요한 조건이니까요. 나중에 조윤희 선배님이 ‘연기 마지막에 감정이 북받쳐서 우는 와중에도 다급히 카메라 종료 버튼을 누르는 포즈가 인상적이었다’고 하시더라고요(웃음).”

ⓒ송기영

오래 연기를 해온 만큼 배우를 놓고 등수를 나눈다는 것 자체가 어렵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본선 진출자 중 가장 나이가 많다는 사실을 알고 나서는 미안함이 컸다. “배우가 오롯이 한 사람으로 서서 누군가에게 발현될 수 있는 무대와 현장이 제한되어 있어요. 때문에 등수를 떠나서 이번 무대에 올랐던 경험 자체가 기쁘고 귀해요. 나보다 더 조명이 필요한 시기에 있는 배우들이 분명히 있었을 텐데, 그런 점이 마음에 줄곧 걸려요.” 정유미는 배우페스티벌이 앞으로도 지속되기를 바란다며 10년 후를 상상했다. “그때쯤엔 우리도 이제 막 시작하는 누군가를 응원하고 실질적인 발판이 될 수 있는 위치에 있으면 참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지원하시는 분들도 더 많아지고 주최하는 서울독립영화제에서도 지속가능한 부분을 만들어주시면 좋겠어요.”

정유미에게 연기는 삶과 깊숙이 연동된다. 무대나 스크린에서 펼쳐지는 연기만이 전부가 아니며, 두 발을 붙이고 살아가는 삶은 언제나 좀 더 절박하고 악조건을 무릅쓰기 때문이다. 매일 즐거워서 사는 것이 아니듯, 연기에서나 삶에서나 정점에 도달하기 위한 노력을 포기하지 않을 뿐이다. “연기는 언제 어떻게 끝날지 모르는 여행 같아요. 가시적인 결과가 없는 시간이 길어질 때면 그만 걸을까 하는 의문도 들어요. 마치 순례길 같죠. 그 길은 신이 날 때도 있고 괴로울 때도 있어요. 다른 길로 나가도 자꾸 돌아오게 되네요(웃음). 삶을 이어가는 호흡처럼 연기도 계속 해보려고요.”

함께 작업해보고 싶은 배우가 있느냐는 질문에, 정유미는 무대에 올랐던 27명의 배우를 꼽았다. 언제 어디선가 그들과 에너지를 섞을 수 있는 작품을 만나면 좋겠다는 소망이다. 무대가 그에게 기회를 주지 않을 때, 그는 길 위로 나갔다. 단순히 대사를 외우는 연기를 하는 대신, 배우로서 연대할 수 있는 사람들을 찾아서 어깨를 나란히 하고 걸었다. 정유미가 들려줄, 연기라는 순례길에서 길어 올리고 가꿔낸 이야기가 가득 담겨 있을 다음 독백이 기다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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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경, 젊음이 가리키는 쪽을 향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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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을 그리면 서너 시간은 훌쩍 지나갔다. 뭘 그리고 있는지 생각할 겨를도 없이 행위 자체에 푹 빠져들었다. 영화도 마찬가지였다. 보이지 않는 막을 뚫고 들어갔다가 나오는 것처럼, 연기는 그를 전혀 다른 세상으로 데려다 놓았다. 몰입은 기분 좋은 일이었고 그만큼 많은 노력이 필요했다. 홍경은 진정으로 몰입하는 순간, 자신이 인물에 확신을 갖고 스며드는 바로 그때 관객에게도 가닿을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연기란 주관적인 동시에 객관적이므로, 관객의 평가를 부정할 수는 없다. 때문에 홍경은 지금의 자신을 만들고 이룬 젊음을 연기하고 싶다.

최근에 본 한국영화 중에서는 이창동 감독의 <버닝>(2018)과 김의석 감독의 <죄 많은 소녀>(2018)가 인상적이었다. 마냥 푸르고 어여쁘기만 한 청춘이 아니라, 서툴고도 치열한 날 것 그대로의 성장통을 보여준 영화여서다. “시나리오를 선택할 수 있는 입장이나 능력은 아니지만, 좀 더 끌리는 역할들은 있어요. 여러 연령대 중에서도 20대는 생동감이 넘치는 시기라고 생각하는데 기대만큼 그런 인물을 영화에서 자주 만나기가 쉽지 않으니까요.” 단지 연기뿐만 아니라 삶이라는 경로에서 역시 그 나이 대에 할 수 있는 일이 있는 것처럼, 현재 고민이 충실하게 반영된 영화를 만나고 싶은 것이 그의 소망이다.

ⓒ송기영

드라마 <학교>(2017, KBS2), <저글러스>(2017, KBS2) 등에서 보여주었던 밝고 사랑스러운 이미지와는 또 다르게, 홍경은 시종일관 차분하고 신중한 태도로 말을 이어갔다. 배우로서 힘든 점을 묻자 문득 “불안해지는 것은 어쩔 수 없다”면서도 “일희일비 하지 않으려고 노력”한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흐름이 좋을 때도 있지만 안 될 때도 있어요. 처음에는 오디션을 한 번 보고 나면 오래 힘들었던 것 같아요. 지금은 좀 더 이성적으로 생각하고 나 자신을 편하게 보려고 해요. 오디션에서 나온 평가가 나라는 사람 자체에 대한 평가는 아니니까요. 잘 되든 안 되든 어떤 일정함을 유지하려고 노력해요.”

밀물과 썰물이 오가듯 성공과 실패의 연속으로 이루어진 시간 속에서, 홍경은 배우로서 과하게 들뜨거나 상처받기보다는 묵묵히 다음 기회를 준비하는 자세를 갖추기 위해 노력한다. “영화는 동시대의 아픔을 위로하고 자칫 소외되기 쉬운 현실을 조명하는 힘을 갖고 있다고 생각해요. 배우로서 모든 고통에 공감하고 표현해낼 수는 없겠지만, 연기를 통해 그런 시대상을 대변하는 배우가 되는 것이 제 목표이기도 해요.”

젊음을 깊이 들여다보는 영화들이 더 많아지기를 바란다는 그에게 좋아하는 감독을 물었다. “폴 토마스 앤더슨과 자비에 돌란. 자비에 돌란이 연출한 작품은 몇 번이나 돌려봤어요. 결국 엄마와 가족에 대한 이야기인데 매 작품마다 전혀 다르게 풀어내는 점이 대단하다고 생각해요. 거대한 선과 악이 등장하는 세계가 아니라, 정말 옆에서 살아 숨 쉬는 듯한 관계를 담아내서 좋아해요.” 홍경의 차기작은 영화다. 12월부터 2월까지 촬영장에서 겨울을 보낼 예정이다. 현재라는 시간을 품고 앓는 배우의 다음 얼굴을 곧 스크린에서 만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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