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20주년을 맞는 인디다큐페스티발이 5월 28일 개막한다. 코로나19로 인해 예년보다 두 달 늦게 열리게 됐다. 코로나 팬데믹은 전 세계의 모든 이슈를 집어삼키고 있고, 국내외 영화제도 그 여파에서 예외가 아니다. 온라인으로 영화를 관람하는 것이 보다 일상화됐지만, 영화제는 본질적으로 오프라인 이벤트의 성격을 강하게 유지해왔다. 하지만 올해 영화제들은 코로나 폭탄으로 인해 일정을 연기하거나 취소해야만 했다. 행사를 예정대로 치르는 경우, 온라인에서 영화를 공개하는 등의 방식으로 축소 운영된다. 한차례 연기됐던 인디다큐페스티발은 포럼을 온라인으로 중계하는 것을 제외하면 기존의 형태를 유지한 채 개최되는 첫 영화제로, 많은 이들이 인디다큐페스티발의 성공적 개최에 주목하고 있다.
170편(단편 136편, 장편 34편)이 출품된 국내신작전 부문에서 상영되는 작품은 모두 33편(단편 22편, 장편 11편, 봄프로젝트 제작지원작 포함)이다. 올해도 카메라 앞에 자신을 드러내는데 거리낌이 없는 작품들이 많았다. 편재하는 카메라에 대한 감각은 홈비디오를 비롯한 사적 아카이빙의 증가와도 맞닿아 있는데, 자기 전시와 반영으로서의 기록이 크게 늘어난 반면 투쟁 현장을 다룬 다큐멘터리는 좀처럼 찾아볼 수 없다는 점은 다큐멘터리가 무엇이어야 하느냐는 당위적 질문을 촉발시키기도 했다. 하지만 몇 년 간 지속되어온 중요한 흐름인 페미니즘 이슈는 더욱 일상화된 카메라를 만나 더욱 실험적인 작품들을 선보였으며, 이주와 유랑의 소재를 다루는 다큐멘터리들 또한 사적 아카이빙에 힘입어 흥미로운 결과로 이어졌다. 경계에 있는 존재들을 내세워 이질적 시공간의 중첩을 드러내는 일련의 작품들도 영화제를 기다려온 이들의 관심을 충족시킬 것이다.
있는 그대로, 있는 힘껏
한국의 페미니즘은 미투 운동과 함께 새로운 국면을 맞았다. 올해 다수의 출품작에서 이러한 변화를 감지할 수 있었는데, <해일 앞에서>(전성연, 2019, 84min 28sec)는 젊은 페미니스트들이 모여 만든 ‘페미당당’을 통해 페미니즘 운동의 현재를 있는 그대로 보여준다. 페미당당은 캠페인 ‘강남역 거울행동’을 조직한 것을 시작으로, 촛불 정국에서는 광장의 여성혐오를 비판하는 ‘페미존’ 구성에 함께 했으며, 낙태죄 폐지 운동에도 앞장선 단체. 외부의 사건을 따라가는데 매몰되지 않고, 내부의 다툼까지 직시하는 용기가 돋보이는 작품이다.
<해일 앞에서>가 ‘영영페미니스트’들의 활동에 초점을 맞췄다면, <우리는 매일매일>(강유가람, 2019, 72min 35sec)은 바로 윗 세대 페미니스트들의 고민을 담고 있다. 1990년대 후반에 활동한 ‘영페미니스트’와의 만남을 통해 강유가람 감독은 그들의 일상에 스며든 페미니즘을 확인하고, 과거와 단절된 현재 운동의 방향을 되묻는다. <일하는 여자들>(김한별, 2019, 20min 32sec)은 저임금, 장시간 노동에 시달리는 비정규직 노동자이자 대부분 여성으로 이뤄진 방송작가들의 투쟁 기록이다. 일터와 가정에서 이중으로 억압당하는 여성에 대한 이 작품은 2000년대 후반 쏟아져 나왔던, 비정규직 여성 노동자들의 싸움을 그린 많은 다큐멘터리를 떠올리게 한다.
젊은 여성 감독이 자신의 가족을 찍는 다큐멘터리는 지난 몇 년간 지속적으로 증가해왔다. 올해도 양상은 다르지 않다. 누군가는 젊은 여성 감독들의 ‘사적 기록’이 다큐멘터리의 현장성을 심각하게 훼손하거나 타인과의 관계 맺기를 회피하는 손쉬운 방편이라고 낮잡아 이른다. 그러나 이는 사적 기록이 신선한 시도와 다각적 형식을 거듭 모색 중인 활력 넘치는 범주라는 사실을 놓치고 있다. 개막작으로 선정된 <누구는 알고 누구는 모르는>(배꽃나래, 2019, 38min 21sec)과 <호랑이와 소>(김승희, 2019, 8min 16sec)는 ‘사적 기록’에 대한 편견과 폄하를 해소하기에 충분하다.
<누구는 알고 누구는 모르는>에서 감독은 자신의 할머니를 찍는다. 할머니 안치연은 성경을 읽기 위해 4년 전부터 한글을 배우고 있다. “누구는 알고 누구는 모르는” 글은 여성들에게 자신을 표현할 공적 수단을 허락하지 않았던 위계질서의 결과였음을 지적하면서, 영화는 그녀들의 몸에 새겨진, 남몰래 간직하고 은밀히 공유했던 사적인 기록을 내보인다. <호랑이와 소>는 성인이 된 딸이 엄마와 나누는 대화를 애니메이션에 담았다. 호랑이띠인 엄마와 소띠인 감독을 모티프로 삼아 홀로 자식을 키워야 했던 여성과 그 여성의 단 하나뿐인 딸로 자라온 여성의 불안을 탐구하며, 더 나아가 억압적 가부장제를 비판의 표적으로 삼는다.
이 외에도 집단적 혐오와 숭배의 대상이 된 은행나무 암그루를 성찰하는 <불편>(설수안, 2019, 17min 17sec), 과거의 폭력을 재연함으로써 픽션이 현실에 개입할 수 있는 방법을 탐구하는 <리:플레이>(장지혜, 2019, 11min 25sec) 등이 페미니즘 이슈를 전달하는 다양한 형식의 실험을 보여준다.
익명의 얼굴들
<사랑폭탄>(유나래, 2019, 114min 31sec)은 이번 인디다큐페스티발의 주요 경향인 사적 아카이빙의 적극적 활용과도 맞물리는 작품이다. 한 중년 여성의 연대기를 이야기 줄기로 삼은 <사랑폭탄>에서 주인공의 얼굴은 삭제된다. 과거 사진에서 주인공의 얼굴은 대부분 알아보지 못하게 편집된 채로 제시되며, 그 자리를 익명의 얼굴들이 차지한다. 이로 인해 한 개인의 연대기로 그녀의 이야기를 이해하려는 시도는 저지된다. “그냥 되는대로 살았”다고 말하는 그녀의 생은 그 시절 여성이라면 누구나 겪어야 했던 강제된 삶일 것이다.
어느 때고 쉽게 촬영되고 저장되는 사진과 영상은 무수한 사적 아카이브를 생성하고 있다. 여기 저기 흩뿌려진 영상들을 이야기 재료로 삼은 흥미로운 작품들도 이번 영화제에서 눈에 띈다. <8mm>(나선혜, 2019, 24min 58sec)에서 감독은 집에서 오래된 캠코더를 우연히 발견하고, 영상 속의 주인공을 추적한다. 오래전 촬영된 자신의 모습을 예상치 못한 상황에서 받아든 인물들은 각기 다른 반응을 보이며, 감독 역시 잊었던 과거와 마주한다. 사람들은 수시로 기록을 남기지만 대부분의 기록은 그대로 방치된다. 기록과 기억의 간극에서 비롯된 감정의 격차를 주제화하면서, <8mm>는 기록이 일상이 된 시대에 영상의 의미를 회의한다.
출산과 육아를 다루는 <3억 분의 1 : 난임부부 다이어리>(박일동, 2019, 84min)와 <윤하>(이강옥, 2019, 9min 37sec)는 일상 속에 깊게 파고든 카메라를 바탕으로, 당연한 일상이 흔들리는 경험에 대해 술회한다. <그곳, 날씨는>(이원우, 2019, 65min)은 감독이 촬영 당시 살고 있던 미국 집의 창밖을 타임랩스로 찍은 영상에 과거 한국에서 촬영했던 이미지를 중첩하여 만든 실험적 형식의 다큐멘터리로, 시공간과 감정이 빚어내는 보이지 않는 역동에 집중한다.
경계에서 유영하는
이주와 유랑을 주제로 한 작품들도 두드러졌다. <크리스마스>(김정아, 2019, 7min 10sec)는 유학생의 그리움이 가득 담긴 아름다운 크리스마스 캐럴을 선보인다. <혜나, 라힐맘>(로빈 쉬엑, 2019, 40min 20sec)은 방글라데시 출신의 아버지와 한국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나 한국에서 자란 혜나가 주인공이다. 방글라데시에서도, 한국에서도 이방인인 혜나를 그녀와 결혼한 방글라데시 출신 감독이 카메라에 담았다.
<표해록>(배혜원, 2019, 39min 1sec)은 각기 다른 시기 제주에서 길을 잃은 세 사람 이야기다. 이들이 계획한 희망의 여정은 불안한 표류를 거듭하는데, 이 과정에서 제주 4.3 사건이 끼어든다. <디어 엘리펀트>(이창민, 2019, 24min)는 일제 강점기 대표 영화감독으로, 태국으로 탈출해 여생을 보낸 이경손의 흔적을 확인하는 이야기다. 이경손의 딸 ‘이려’와의 서신교환을 통해 그에 관한 많은 사진과 일화를 얻지만, 감독은 선구적 영화인이 아닌 쫓기는 난민으로서의 이경손을 강조한다.
가시적 현재와 비가시적 과거의 공존에 천착하는 작품들도 한데 묶을 수 있다. <안개, 장막>(김예솔비, 2019, 14min 42sec)은 과거에 섬이었던 잠실을 상상하는 과정에서, 땅 위에 선 채로 물 위에 떠 있는 감각을 체험하는 어지러움을 혼령과 안개의 이미지로 표현한다. 역사적 상흔으로 인해 유령들의 무덤이 된 동아시아의 바다를 유영하는 <해협>(오민욱, 2019, 126min 40sec)은 단편 <상>에서부터 이어져온 감독의 관심사를 충분한 시간 속에 녹여낸 작품이다. <나는 사자다>(송주원, 2019, 10min 47sec)는 성남시 태평동 다세대 주택촌의 골목과 옥상을 거닐며 춤을 추는 소녀를 따르는 댄스 필름으로, 강제 이주라는 국가 폭력을 감내해야 했던 3대의 사연이 펼쳐진다.
다섯 무용수의 일상과 공연을 카메라에 담은 <아이 바이 유 바이 에브리바디>(김남석, 최승윤, 2019, 77min 50sec)는 허구와 실제의 경계를 허물고 동시에 반복과 차이의 운동에 주목하면서 무엇에도 잠식되지 않는 고유한 몸짓의 의미를 되묻는 작품이다. <내언니전지현과 나>(박윤진, 2019, 71min 12sec) 역시 주어진 경계를 허무는 독특한 시도 중 하나다. 1999년 출시되어 영화가 제작될 당시 20주년을 맞이했던 게임 ‘일렌시아’. 운영진 없는 이 게임을 아직 즐기는 유저들이 있는데, 감독 역시 ‘내언니전지현’이라는 아이디를 사용하는 희귀 게이머다. 본래 게임의 특성과 달리 정해진 루트만을 따르는 유저들은 무기력하게 사회에 순응하는 청년 세대를 표상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