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이름은 정애 혹은 복자
<히치하이크> 노정의(feat. 정희재·임성미)
글 차한비 사진 소동성 / Interview / 2019-04-01

2017년 3월 어느 날, 영화 <히치하이크> 촬영이 시작된다. 첫날의 분주함과 설렘으로 어지러운 촬영장에서 감독 정희재와 배우 노정의, 그리고 임성미가 만난다. 이마에 상처가 난 정애(노정의)에게 간호사(임성미)가 다가온다. “얘, 너 안 아파? 왜 여태 가만히 있었어?” 정애는 잠자코 앉아서 눈을 깜박거린다. 간호사는 마치 자신이 아프기라도 한 듯, 조심스러운 손길로 다친 부위에 약을 바르고 밴드를 붙여준다. 100분이 넘는 영화에서 두 인물이 함께 머문 시간은 단 30초. 우연히 마주친 사이여서일까. 인사도 없이 헤어진다.

2019년 3월 어느 날, 세 사람은 다시 한 자리에 모인다. 재작년 그날처럼 봄은 문턱에 있고, 감독과 배우는 나란히 앉아 카메라를 응시한다. 카메라 앞보다 뒤에서 보내는 시간이 훨씬 많기에, 정희재 감독은 못내 어색해한다. 그 모습을 발견한 배우들에게서 웃음이 터져 나온다. 임성미 배우는 말없이 한쪽 어깨를 기대고, 노정의 배우는 여유로운 미소를 머금은 채 팔짱을 건다. 문득 세 사람을 바라보며 궁금해진다. ‘복자’와 ‘정애’ 사이에서 감독은 지금 무슨 생각을 할까.

 

 

 

<히치하이크>에서 임성미 배우를 발견했을 때 굉장히 반가웠다. 아마 정희재 감독의 전작 <복자>(2009)를 기억한다면, 또 감독의 다음 작품을 기다려온 관객이라면 누구나 그 장면을 쉽게 지나칠 수 없을 것이다. 작품 사이에 10년이라는 시간차가 발생함에도, <히치하이크>는 자연스럽게 <복자>를 떠올리게 만든다. 임성미 배우가 연기한 복자와 노정의 배우가 연기한 정애라는 인물이 마주 보듯 닮아 있기 때문이다. 두 인물을 통해, 감독의 작업이 일정한 흐름으로 연결되는 연장선상에서 이해되기도 한다.

정희재_ 인터뷰 전에 잠시 카페에서 배우들과 시간을 보냈다. 세 사람이 만나서 어떤 대화를 하게 될지 생각만 해도 긴장되더라. 한 자리에 모이고 나니 ‘이제 정말 이 이야기에서 졸업해야지’ 싶다. (웃음) <복자>는 한국예술종합학교 재학 시절에 만들었던 단편영화이고, <히치하이크>는 졸업 후에 만든 첫 장편영화이다. 2014년 무렵, 영화를 만들기 위해 어느 영화교육기관에 응시했다. 면접에서 전작에 서사적인 오류가 있으며 캐릭터 설득력도 떨어진다는 평가를 받았다. 영화를 잘못 찍었다는 거다. 앞으로 나아질 수 있겠냐는 질문을 거듭 듣다 보니 당황스럽기도 하고 힘들었다. 내 입장에서는 그동안 만들었던 작품들을 긍정해온 부분이 있는데, 그 마음을 부정당한 상황이었다. 불합격 통지를 받고 나서, 앞으로 어떻게 영화를 해야 하나 싶었다. 그러면서 결국엔 다시 첫 작품인 <복자>로 돌아오게 되더라. 그때 영화를 통해 진짜 하려고 했던 말이 뭐였는지, 무엇을 지키고 또 놓아야 하는지 곰곰이 생각해볼 시간이 필요했다. 그 과정을 거쳐 만든 영화가 <히치하이크>이다. 완성하고 나니 <복자>와 <히치하이크>는 중심 캐릭터도 그렇고, 이야기의 진행방식이나 갈등이 벌어지는 흐름이 비슷하다.

 

<히치하이크>는 2014년에 기획하고 2017년에 제작했다. 개봉은 2019년이니 각 단계를 꽤 더디게 넘어왔다. 전 과정을 펼쳐보았을 때, 어느 지점에서 가장 고민이 길었나.

정희재_ 시나리오 자체는 크게 변하지 않았다. 다만 있는 그대로의 이야기를 할 수 있도록 조건을 만들어나가는 과정이 길고 험난한 편이었다. 개봉하고 나서 영화를 좋게 보신 분들이 남긴 리뷰를 보면, 지나치게 자극적인 설정 없이 영화가 다른 길로 빠지지 않고 가고자 하는 방향으로 나아간 점을 긍정적으로 평가해주신다. 사실 지금으로선 결과를 알 수 없는 문제지만, 제작지원이나 투자를 위해 관계자들을 만날 당시에는 현재의 평가와 상반되는 제안을 많이 받았다. 쉽게 말해서 좀 더 자극적으로 보여주라는 요구였다. 서사가 훨씬 드라마틱하게 전개된다든지, 인물이 어딘가에서 도발적으로 행동하는 장면이 추가된다든지 하면 투자해주겠다고 했다. 무슨 말인지는 알지만, 일단 나 스스로 소화가 되지도 않을뿐더러 애초 하려던 이야기와도 거리가 멀어지는 것 같았다. 촬영 전까지 제작비용을 조달하기 위해 노력한 시간이 제일 오래 걸렸다.

<히치하이크>
<복자>

만약 요구대로 영화를 바꾸었다면, <히치하이크>와 <복자>를 나란히 두고 볼 생각은 못했을 것 같다. 덕분에 오늘 이 자리가 만들어졌다. (웃음) <히치하이크>에서 간호사로 등장한 임성미 배우는 복자의 10년 후 모습 같기도 해서 기분이 묘했다. 어떻게 출연하게 되었나. 워낙 짧은 분량이라 일종의 우정출연일 거라고 짐작했다.

임성미_ 말하자면 우정출연이지. (웃음) 정희재 감독과는 이상하게 연이 닿는다. 괜히 생각도 많이 나고. <복자>가 나의 첫 영화라는 사실을 되새겨보면, 내 입장에서 감독님은 스크린 연기를 본격적으로 시작하게 된 계기를 마련해준 분이다. 영화를 시작한 후에 나름 알게 모르게 의지가 된 면도 있고, 꼭 같은 작품을 하지 않더라도 동료 작업자로서 꾸준히 만나고 싶다는 생각을 해왔다. <히치하이크> 출연 제안이 왔을 때, 흔쾌히 수락했다.

 

두 사람은 <복자> 이후로도 연락을 지속해온 건가. 어떤 인연인지 궁금하다.

정희재_ 학교에서 처음 만났다. 임성미 배우는 연극원 학생이었는데, 당시 박정희 연출가가 올린 작품에 출연 중이었다. 리허설 촬영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임성미 배우의 연기를 보고 굉장히 놀랐다. 연극 내용 자체가 힘들기도 하고, 등장인물의 감정 폭이 커서 웬만한 연기력이 아니면 소화하기 어려운 작품이었다. 연극과 영화라는 장르의 차이는 있지만, 다른 걸 떠나서 뭐가 되었든 연기를 너무 잘하니까 함께 작업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첫 영화를 나와 함께 하게 되었지. (웃음)

임성미 ⓒ소동성

<히치하이크>의 미덕이자 힘은 여성을 여성과 만나게 해주는 점이라고 생각한다. 정애에게는 효정이라는 친구가 있고, 엄마라는 목적지가 있으며, 간호사와의 만남이 있다. 거의 찰나라고 해도 좋을 순간에 불과하지만, 간호사는 이 영화에서 정애에게 아프지 않냐고 물어봐주는 유일한 어른이다. 상처를 알아보고 염려하는 사람. 상징적인 인물로 볼 수도 있는데, 의도한 캐스팅인가.

정희재_ 공식적으로는 그 설명이 맞다. 이미 내 안에서 두 작품이 연결된 지점이 있고, 곱씹어볼수록 ‘그래서 그랬구나’ 하며 의미를 찾게 되기도 한다. 하지만 비공식적인 이유를 밝히자면, (웃음) 그 장면이 1회차 촬영 분량이다. 당시 여러 가지 사정 때문에 준비가 완벽하게 되지 않은 상황에서 촬영을 시작했다. 아무래도 캐스팅이나 장소 섭외에 어려움이 많아서, 갑작스럽게 도움을 구하고 요청한 경우가 몇 번 있다. 임성미 배우에게도 그때 미안한 마음을 갖고 출연을 부탁했다. 우연이 많이 작용했는데, 결과적으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정애를 찾기 위해 꽤 오랫동안 오디션을 봤다고 들었다. 노정의 배우를 처음 만났을 때, 어떤 인상을 받았나. 주연 배우로서 믿고 의지한 바는 무엇이었는지 궁금하다.

정희재_ 사실 소속사를 통해 조심스럽게 연락하면서도, 오디션장에서 만날 수 있을 거라는 기대는 하지 않았다. 노정의 배우는 동년배 중에서 워낙 잘 알려진 배우이고, 당시에도 왕성하게 활동 중이어서 ‘설마 여기에 올까?’ 싶었지. 근데 온 거다! 솔직히 처음 봤을 때는 배역과 거리가 멀다는 편견을 가졌다. 우선 너무 예쁘고, 그날따라 기침도 많이 하고. (웃음) 정애를 맡기에는 연약해 보이는 이미지였다.

노정의_ 아니, 그 날만 좀 아팠는데. (웃음)

정희재_ 그래도 뭔가 마음에 남아서 두 차례에 걸쳐 긴 시간 대화를 나눴다. 막상 이야기를 하다 보니, 이전까지 출연한 영화나 드라마를 통해서 볼 수 없던 노정의만의 모습이 있더라. 제 나이다운 느낌이면서도 어딘지 고집스럽기도 하고, 씩씩한 마음이 느껴졌다. 전형적인 외유내강이기도 한데, 속에 무언가를 지닌 배우구나 싶었다. 남들이 그 모습을 발견하기 전에 내가 먼저 보여줘야겠다는 결심이 섰지. (웃음)

노정의 ⓒ소동성
노정의 ⓒ소동성

그 ‘무언가’를 좀 더 설명해줄 수 있나. 경험으로 쌓인 배우의 노련함인지, 아니면 타고난 당당함이었는지 궁금하다. 어떤 면에서 확신을 얻었나.

정희재_ 추상적이긴 한데, 잠시 생각에 잠길 때나 연기를 하지 않는 순간에 드러나는 특유의 분위기였다. 결핍이라고 해야 할까. 노정의 배우는 그동안 대개 화려하고 톡톡 튀는 역할들을 연기해오지 않았나. 하지만 대화를 주고받다 보니, 이 친구가 가라앉은 상태에서 발휘하는 힘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점이 <히치하이크>와 잘 어울릴 것 같았다.

 

노정의 배우는 2012년 드라마 <총각네 야채가게>로 데뷔했다. 아역 배우라고는 해도 벌써 경력 8년 차인 데다, 최근에는 드라마뿐만 아니라 <소녀의 세계>(안정민, 2018), <탐정 홍길동: 사라진 마을>(조성희, 2016) 등 영화 작업도 활발히 참여했다. <히치하이크>는 또 한 번의 도전이었으리라 예상된다. 우선 정애는 극을 주도하는 인물이고, 소용돌이치는 마음에 비해 대사가 많지 않다. 결국 표정이나 시선, 움직임 등으로 관객에게 영화를 납득시켜야 한다. 이 작품을 하고 싶다고 생각한 이유는 무엇인가.

노정의_ 솔직히 가장 큰 이유는 내 또래 인물을 주인공으로 삼는 작품이 거의 없기 때문이었다. 정애라는 캐릭터를 만났다는 것 자체가 너무 좋고 소중했다. 게다가 극 중 정애와 당시 내 나이가 똑같았다. 같은 나이로서 누구보다 현실적으로 캐릭터를 표현할 수 있지 않을까 싶었다. 물론 부담스러운 마음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굉장히 많은 부분을 책임지고 이끌어나가야 하는 역할이니까. 하지만 도전하고 싶다는 욕심이 더 컸고, 무엇보다 정애에게는 친구 효정(김고은)이 있지 않나. 또래 친구와 함께 연기할 수 있다는 점도 큰 매력이었다.

 

<복자>를 보았나. 연기에서 참고한 부분이 있다면 어떤 점인가.

노정의_ 며칠 전에 처음 봤다. 보자마자 깜짝 놀랐다. 헤어스타일부터 인물의 표정이나 처한 상황, 심지어는 소품 콘셉트까지 비슷했다. 복자가 어떤 위치에서 어떤 방식으로 영화를 이끌어 가는지 보였다. 감독님이 나에게 준 디렉션과 거의 일치하더라. 정애랑 닮은 점이 많아서 놀라기도 했고, 한편으로는 내가 알아차리지 못한 부분에서 더 연결되는 무언가가 있을까 싶어서 “감독님, 이 영화 대체 뭐예요?”라고 물어봤다. (웃음)

정희재_ 실은 촬영 전에 레퍼런스가 될 만한 영화를 보여주려는 계획을 세웠다. 물론 <복자>를 포함해서 내가 만든 전작도 리스트에 넣어두었다. 그런데 첫 작품으로 <아무도 모른다>(고레에다 히로카즈, 2004)를 보여줬더니, 노정의 배우가 어느새 잠에 든 거다. (웃음)

임성미_ 욕심이다, 욕심. (웃음)

정희재_ 그렇지, 감독 욕심이었다. 레퍼런스로 <아무도 모른다>, <로제타>(장 피에르 다르덴․뤽 다르덴, 1999) 등을 준비해두었는데, 그날 싹 다 지웠다. (웃음) 배우마다 성향이 다르지 않나. 노정의 배우는 다른 작품이나 캐릭터를 참고하기보다는, 시나리오에 집중해서 자신의 것을 만들어나가는 배우이다. 그런 부분이 좋았다. 오히려 레퍼런스를 분석하고 유창하게 해석해내려고 했다면, 정애를 연기하기에 부담스러웠을 것 같다.

ⓒ소동성

캐릭터를 준비하면서 무엇에 가장 집중했나. 이것만은 보여주겠다고 다짐한 것이 있나.

노정의_ 정애는 험난하고 고된 여정을 걷는 인물이다. 눈앞에 고난이 밀려올 때, 거의 무너질 듯 보이면서도 무너지지 않으려고 애를 쓴다. 그런 안간힘을 표현하고 싶었다.

정희재_ 내 영화의 주연배우를 내가 너무 많이 칭찬하기는 그렇지만, 질문을 들으니 기억나는 장면이 있어서 보태고 싶다. (웃음) 아버지가 사망한 후에 정애가 경찰서에서 조사를 받는 상황인데, 그날따라 현장이 정말 정신없게 돌아갔다. 외부 여건이 혼잡했을 뿐만 아니라, 촬영해야 할 장면 자체도 합을 정교하게 짜야했다. 경찰로 출연한 김태한, 박지수 등의 배우들은 사실 베테랑 연기자라 믿는 부분이 있었는데, “심장이 밖으로 나올 것 같다”면서 너무 긴장하시는 거다. 덩달아 나도 마음이 급해져서 “선배님, 여기서 이러시면 안 된다”고 매달렸지. (웃음) 정애한테 굉장히 중요한 장면인 동시에 영화에서도 포기할 수 없는 장면이었다. 이때 제대로 힘을 쌓지 않으면, 엔딩까지 가기 어렵겠다고 생각했다. 걱정하는 상태에서 촬영을 시작했는데, 노정의 배우가 집중해서 분위기를 잡더라. 다른 배우들도 노정의 배우를 보더니 자연스럽게 몰입했고, 덕분에 수월하게 촬영을 마칠 수 있었다. 그때 정말 고맙고 많이 의지가 되었다.

 

정애는 혼자 감당해야 할 몫이 큰 인물이지만, 동시에 여러 사람들과 관계를 맺기도 한다. 상대 배우들과의 호흡은 어땠나. 김고은 배우와는 실제로 무척 친해졌다고 들었다.

노정의_ 아역을 연기하면 대체로 남자 아역배우를 만나게 된다. 동갑내기 여자 친구와 연기한 적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출연이 확정되고 나서, 감독님께 계속 “효정이 누구예요?”라고 물어봤다. 빨리 친해지고 싶기도 했고, 개인적인 욕심에는 실제로도 동갑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나보다 나이가 어리지도 많지도 않고, 그냥 딱 동갑내기 친구. 현장에서 고은이를 처음 만났을 때는 사실 좀 어색했다. 아홉 살 때부터 알고 지냈으니 꽤 오래된 사이이긴 했지만, 아무래도 같은 역할에 오디션을 보는 일이 잦았기에 함께 연기할 기회는 별로 없었다. 말하자면 비슷한 꿈을 갖고 선의의 경쟁을 해온 친구라서, 반가우면서도 살짝 어려웠던 것 같다. 친해질 수 있도록 감독님이 중간에서 도와주시기도 했다. 발 사이즈를 물어본다든가 하면서. (웃음) 지금은 매일 연락하고 고민도 들어주는 사이가 되었다. 서로 이해하는 면이 많다. 박희순 선배님은 처음엔 무서운 분이 아닐까 싶어서 약간 얼었는데, 알고 보니 엄청 유머러스하신 분이었다. ‘아재개그’를 정말 잘하신다. (웃음) 현장에서 긴장을 풀고 조금이라도 빠른 시간 내에 다 같이 어울릴 수 있도록 이런저런 배려를 많이 해주셨다.

정희재 ⓒ소동성

의외의 캐스팅에 놀랐다. 박희순 배우나 이자람 배우는 독립영화에서 만날 수 있을 거라고 기대하지 않았던 배우들인데, 생각보다 전혀 튀지 않고 자연스럽게 녹아들더라.

정희재_ 개인적인 인연으로 출연한 배우들이다. 박희순 선배님과는 10년 전, 영화 <혈투>에 스태프로 참여했을 때 처음 만났다. 배우 캐스팅을 포함해서 배급까지, 영화 전 과정에 내가 쓸 수 있는 90퍼센트의 운을 다 써버린 것 같다. 앞으로 남은 인생은 나머지 10퍼센트로 살아야 할 정도다. (웃음) 독립영화에서 보여줄 수 있는 재미는 일반 상업영화와 차별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화면상의 스펙터클을 보여주기에는 불리한 조건이다 보니, 배우들의 연기에서 빈틈이 발생하지 않기를 바랐다. 전반적으로 캐스팅에 무척 공을 들였다. 한 분, 한 분 직접 메일을 쓰고 모셔왔다.

 

복자와 정애라는 이름은 어떻게 짓게 되었나. 촌스럽기도 하고, 인물의 상황을 떠올려보면 다소 아이러니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정희재_ 중요한 의미를 부여하기보다는 주변에서 실제로 만난 사람의 이름을 가져오는 경우가 많은 편이다. 복자는 제작 당시 동료들과 농담처럼 부르던 이름인데, 입에 붙어서 그대로 영화 제목까지 가게 되었다. 정애는 예전에 우연히 만난 분의 이름이다. 친구의 이사를 도와주러 갔다가, 이사 가는 집에 원래 살던 분을 마주쳤다. 왠지 기억에 남아서 정애라는 이름을 빌려왔다.

노정의_ 나는 이름 때문에 더 욕심이 났다. 시나리오에서 정애라는 이름을 보고 ‘내 거다!’ 싶었다. (웃음) 정애와 정의가 발음이 비슷하지 않나. 오디션 때도 감독님이 나를 부르는지, 영화 속 정애를 말하는지 분간이 안 갈 정도였다.

 

임성미 배우는 <히치하이크>를 어떻게 보았나. <복자>와의 연결성이 느껴졌나.

임성미_ 영화를 보면서 <복자>가 바로 떠오르지는 않았다. 오래전 영화이기도 하고, 시간이 지날수록 작품과 나 사이에 거리도 생겼다. 어떤 의미에서 두 영화가 연결될 수는 있지만, 결국에는 별개라는 생각이 든다. 한편으로는 영화가 만들어진 과정이나 감독의 고민을 전혀 모르지 않기에, 완벽하게 객관적인 눈으로 보지는 못했다. ‘정희재 감독이 한 걸음씩 나아가고 있구나, 계속해서 자기 세계를 만들어가고 있구나’ 하면서 자꾸 응원하게 되더라. (웃음)

ⓒ소동성

배우로서 노정의 배우의 연기를 보며 어떤 생각을 했는지 궁금하다.

임성미_ 나이나 성별 같은 조건에 굳이 구애받을 이유가 없는데, 처음에는 나도 모르게 ‘어린 배우가 이 영화를 잘 소화해낼 수 있을까?’ 하고 우려했다. 완성된 영화를 보고 나서 괜한 걱정이었다는 걸 깨달았다. 노정의 배우는 영화의 전체적인 톤을 반영하는 동시에, 어떤 순간에는 영화의 분위기와 상반되는 모습을 드러내기도 한다. 그런 점이 신선하게 느껴졌고, 영화를 마냥 무겁지만은 않도록 균형을 맞추는 역할을 했다고 생각한다. 여운이 긴 작품인데, 그 여운이란 배우의 역량으로 살려낸 힘이지 않나 싶다.

임성미 배우는 연극으로 시작해서 영화는 물론, 최근에는 웹드라마 <그 새끼를 죽였어야 했는데>(이가홍, 2018)까지 다방면에서 활동 중이다. 

임성미_ 근래 2-3년 동안 배우로서 동력을 찾기가 힘들었다. 지루하다기보다는 무기력한 상태였는데, 감사하게도 주변에서 같이 작업해보자는 권유가 꾸준히 들어왔다. 과정으로 놓고 보면 내가 먼저 찾아 나선 것이 아니라, 외부로부터 유입된 힘에 이끌려서 참여하게 된 작업이 많았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그 상태에서 연기를 할 때, 오히려 주체적인 인물로 자리 잡게 되더라. 나 자신과 현장이 점차 분리되면서 마음이 편해졌다. 이전에는 배우인 나와 등장인물을 구별하기도 어렵고, 그럴 겨를도 없었다. <그 새끼를 죽였어야 했는데>나 <열두 번째 보조 사제>(장재현, 2014)와 같은 작품을 만나면서, 거리를 두어야만 하는 상황에 놓이게 된 거다. 그러지 않으면 정말 말 그대로 죽을 것 같더라. 지금은 연기하면서 내 생활을 이어갈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나와 작품을 분리하며 각각의 다름을 인식하고 나니, 연기를 대하는 관점도 더 넓어졌다. 이제 직업란에 배우라고 쓸 수 있을 것 같다. 전문직업인으로서 내가 표현되어야 할 곳에 뛰어들면 되겠다는 확신이 생겼다. 일부러 새로운 매체에 도전을 한다기보다는, 연기할수록 영역에 특별히 경계를 두지 않게 된다. 나아가다 보면 결국 하나로 묶이기도 하고, 여전히 내가 모르는 미지의 세계가 넓구나 싶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할 수 있는 연기가 달라지고 늘어나는 과정이 즐겁다.

ⓒ소동성

배우의 일이라는 것이 무척 고되게 느껴진다. 두 배우가 걸어온 길은 사뭇 다르지만, 일을 대하는 태도는 공통적으로 진지하고 열정적이다. 그럼, 연기하지 않을 때는 보통 무얼 하며 쉬나. (웃음)

임성미_ 쉴 때는 정말 아무것도 안 한다. (웃음) 스트레스를 잠으로 해소하는 편이고, 대부분 집에서 혼자 시간을 보낸다. 대신 수영을 꾸준히 한다.

정희재_ 수영대회도 나갔다!

임성미_ 물속에서 헤엄치고 있으면 좋더라. 나중에 수영 영화를 하게 되면 좋겠다. (웃음)

노정의_ 나 역시 잠을 많이 잔다. 예전에는 ‘잠보다 밥’이었는데, 지금은 뒤바뀌었다. (웃음) 나머지 쉬는 시간은 어떻게든 친구들과 보내려고 노력한다. 지금이 아니면 누릴 수 없는 것들이 많다고 생각한다. 최대한 친구들과 추억을 쌓고 싶어서, 고등학교도 일반 인문계로 진학했다. 보통 친구네 집에서 놀거나 같이 영화를 보러 가기도 한다.

 

친구들도 <히치하이크>를 보았나. 가까운 사람들은 어떤 반응이었는지 궁금하다.

노정의_ 친구들은 “야, 학교에서는 모르겠더니 너 좀 배우 같더라?”면서 장난을 치기도 하고, 같이 사진을 찍자며 다가오기도 했다. (웃음) 엄마는 서울독립영화제에서 처음 영화를 보시고 많이 우셨다. 영화 속 정애가 고생하는 모습을 보면서 슬펐다고 하시더라. 정애의 영화인 동시에 엄마에 관한 영화이기도 하니까, 여러 감정을 느끼셨던 것 같다. 정작 나는 그 당시 가족보다도 관객들이 이 영화를 어떻게 볼지 너무 긴장해서 정신이 없었다. ‘나름 한다고 했는데 내 연기가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어쩌나’ 하는 생각에 초조했던 것 같다.

 

열여섯에 시작한 작품을 열아홉에 개봉하게 되었다. 관객과 만나면서 비로소 영화를 마무리했다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처음부터 끝까지 경험해본 입장에서, 영화의 어떤 점이 가장 매력적이라고 생각하나.

노정의_ 영화의 매력이라, 뭔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매력인데… (웃음) 드라마가 분주하면서도 재밌게 흘러간다면, 영화는 좀 더 가족 같다고 해야 하나? 포근하고 따뜻한 분위기가 느껴진다. 편안하게 소통하면서 촬영하다 보니, 서로서로 가까워지는 것 같다.

정희재_ 기억이 미화된 거다. (웃음)

노정의_ 영화라고 했지, “히치하이크”라고는 안 했다! (웃음)

ⓒ소동성
ⓒ소동성

안정적인 연기력을 바탕으로 배역을 탁월하게 소화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앞으로는 어떤 연기를 하고 싶나.

노정의_ 9개월이 지나면 곧 성인이 된다. 급하게 성인 연기를 하고 싶다는 뜻은 아니고, 차근차근 배워서 다양한 배역을 소화하는 연기자가 되고 싶다. 지금까지 안 해본 연기를 모두 경험해보고 싶은 마음이랄까. (웃음) 끌리는 역할은 무척 많은데, 때로는 오디션이나 현장 분위기에 영향을 받기도 한다. <히치하이크>도 마찬가지였다. 처음에 덜덜 떨면서 대본을 봤는데, 감독님이 괜찮다며 긴장이 풀리도록 도와주셨다. 그런 온기가 느껴지는 현장을 만나면, 배우로서 작품에 애정과 욕심이 더 생기는 것 같다.

 

감독에게 ‘10대 여성의 가족 찾기’라는 테마는 화두처럼 보인다. 차기작을 진행 중인가.

정희재_ <히치하이크>가 개봉되기까지 워낙 오래 걸렸기에, 틈틈이 다른 시나리오를 작업했다. 10대는 물리적으로나 상징적으로나 정체성을 찾아가는 시기 아닌가. 나 자신이 누구인지에 관해서는 이후에도 계속 고민하긴 하지만, 10대에는 그 시기만의 에너지가 있는 것 같다. 세상을 바꾸기는 쉽지 않은데, 나는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하나. 어떻게 세상에 반응하며 살아야 하나. 그런 고민이 담긴 영화를 좋아하기도 하고, 여태 만들어온 것 같다. 어쨌든 이 이야기는 여기서 매듭짓고, 이제 다른 이야기를 하고 싶다. 나로서는 다음 작품이 진짜 ‘시작’인 것도 같아서 더 어렵게 느껴진다.

임성미_ 공부 많이 해야겠다.

정희재_ 그래야지. 공부해야지. (웃음)

ⓒ소동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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