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12월 11일, 제18대 대통령 선거 8일 전, 민주통합당 의원들은 국가정보원 직원이 당시 야당 후보였던 문재인에 대한 비방 댓글을 작성하고 있다는 제보를 받고 경찰과 함께 역삼동의 한 오피스텔에 찾아간다. 대선 결과를 뒤집어버릴 수도 있었던 “국가정보원 댓글 조작 사건”의 시작이었다. 이 사건은 초기에 큰 논란을 불러일으켰지만, 박근혜 후보가 대통령에 당선되면서 흐지부지 마무리되는 듯했다. 그러나 이듬해 1월 수서경찰서가 국정원 직원의 하드디스크에서 댓글 공작의 흔적을 발견했다고 발표하면서 논란은 재점화 되었고, 이후 경찰로부터 사건을 송치받은 검찰은 특별수사팀을 구성하고 전면 재수사를 시작했다.
‘국가정보원의 비밀요원’을 의미하는 제목의 다큐멘터리 <더 블랙>은 논란이 끊이지 않았던 경찰의 수사 과정과, 채동욱 검찰총장이 옷을 벗고 윤석열 팀장이 좌천되는 검찰 초유의 사건을 겪으며 진행되었던 검찰 특별수사팀의 수사 과정을 따라가며 ‘국가정보원 댓글 조작 사건’을 재구성한다. 재구성의 주된 재료는 제작진이 입수한 2013년 국정조사 당시 경찰이 제출했던 서울시경찰청 사이버수사대 분석실 내부 CCTV 영상과 국정원 직원의 핸드폰 문자, 경찰의 내부감찰보고서와 제작진이 전직 검사의 증언을 토대로 구성한 배우의 재연 장면이다.
2014년 초에 시작되어 약 4년 만에 완성된 <더 블랙>은, 제작 초기 <야구 모자를 쓴 여인>이라는 제목으로 오피스텔 607호에 거주했던 국정원 여직원을 중심에 두고 이야기를 풀어나가려고 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이 사건과 관련된 어떤 사람의 증언도 카메라에 담을 수 없었다. 사건의 실체를 알리고 싶은 목표는 있었지만 방법이 없었다. 따라서 <더 블랙>이 선택한, 확보된 여러 증거 자료들과 극영화적 재연을 바탕으로 한 사건의 재구성은 조사와 취재는 가능해도 촬영이 불가능한 소재를 다루어야 하는 이 다큐멘터리가 막다른 곳에서 선택한 스토리텔링 전략이었을 것이다.

<더 블랙>은 그렇게 새로운 돌파구를 찾아냈고, 복잡한 사건의 전모를 세련된 편집과 구성으로 입체적으로 담아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더 블랙>이 다루는 ‘국정원 댓글 조작 사건’은 사실, 사건이 발생한 지 약 6년이 지난 지금 보기에 아주 새롭거나 특별하지 않다. 이미 국정원 개혁발전위원회 적폐청산 TF는 국정원이 2009년 5월부터 2012년 12월까지 민간인으로 구성된 최대 30개의 사이버 외곽팀을 운영한 사실을 공식적으로 확인했고, 원세훈 전 국정원장은 올해 초 징역 4년, 자격정지 4년을 확정 선고받았으므로, 많은 사람의 기억 속엔 ‘국정원 댓글 조작 사건’이 만족스럽진 않아도 어찌 됐든 일단락된 사건으로 남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더 블랙>은 여기서 이야기를 확장하기 위해 또 하나의 선택을 한다. 2013년 12월 31일 서울역 앞 고가도로에서 ‘국정원 댓글 조작 사건’에 대한 특검을 요구하며 분신자살로 세상을 떠난 고 이남종 씨의 이야기를 영화의 입구와 출구로 활용한 것이다. 당시 분신 상황을 재연한 장면과 주변인물들의 인터뷰로 이루어진 한 평범한 시민의 이야기는 언뜻 보기에, 대한민국을 뒤흔들었던 거대한 정치적 사건과 잘 어울리지 않는다. 그러나 꿈쩍도 하지 않을 것 같은 이 세상을 조금씩 변화시킨 건 망각하지 않는 보통사람들의 집요한 요구이고, 우리가 누리고 있는 많은 것들이 그들의 끊임없는 노력에서 비롯되었다는 걸 기억한다면, 감독의 이러한 선택이 큰 정치적 사건을 다룬 수많은 작품 중 하나로 남을 수밖에 없었던 이 영화에 또 다른 긴장을 불어넣고, 영화가 전달하고자 하는 주제를 다른 방향으로 전환하면서 동시에 확장했다는 점에 동의할 수 있을 것이다.
2016년 10월 24일 최순실의 국정 농단이 세상에 실체를 드러낸 이후 대한민국은 그야말로 대한민국 역사에서 다시 경험하기 어려울 어마어마한 변화의 시간을 경험했고, 지금도 일일이 다 기억할 수도 없는 사건들로 가득한 역동적인 시간을 보내고 있다. 덕분에 정말 기억해야 할 중요한 사건들은 먼 과거의 일이 되어 기억 저편에서 망각되고 있다. ‘국정원 댓글 조작 사건’도 그 중 하나일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더 블랙>은 비록 너무 늦게 우리 앞에 도착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조리한 사건과 그 앞에서 어떤 주목도 받지 못한 채 사라져간 한 보통사람을 통해 망각에 저항해야하는 이유와 그 의미를 이렇게 전하고 있다.

더 블랙 The Black 제작 아나레스 감독 이마리오 출연 김중기, 차지훈, 채송화, 서민성, 이승호 배급 이달투 제작연도 2018년 상영시간 68분 등급 전체 관람가 개봉 2018년 9월13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