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은 고향이다
DIAFF 2019 최아람 & 김명준
글 차한비 사진 이영진 / Festival / 2019-05-26

해방 이후, 일본에 남은 조선인은 조국의 언어와 문화를 배우겠다는 의지로 학교를 세웠다. 현재 60여 곳이 남아 있고, 이를 조선학교라고 부른다. ‘조선’ 자체는 이미 존재하지 않는 나라이지만, ‘조선인’으로서의 정체성을 바탕으로 한 ‘조선학교’는 동포사회의 중심축을 이루며 오랜 시간 교육과 투쟁의 현장으로 기능해오고 있다. 재일조선인은 그만큼 복잡한 경계에 위치한다. 일본도, 한국도, 북한도 그들의 뿌리를 온전히 설명해주지 못한다. 한반도 정치 상황과 긴장 관계에 따라, 재일조선인은 이방인이나 적으로 간주되며 존재를 위협받는다.

김명준 감독은 <우리 학교>(2006), <그라운드의 이방인>(2013) 등을 통해 재일조선인과 한국사회의 만남을 위해 노력해왔다. ‘혹가이도조선초중고급학교’ 구성원들을 진솔하게 보여준 <우리 학교>는 작품성을 인정받으며, 관객들로부터 기록적인 지지를 얻기도 했다. 그러나 대중적 관심과 이해를 촉구하는 노력에도, 재일조선인을 향한 차별은 여전히 거듭되는 문제이다. 최아람 감독이 카메라를 든 이유가 여기에 있다. 조선학교 탄압은 고교무상화 배제와 교육보조금 중단 같은 제도적 차별로 확산되었고, 현재 조선학교에서는 이와 관련한 소송을 추진 중이다.

제7회 디아스포라영화제에서 상영하는 <부당, 쓰러지지 않는>(최아람, 2018)은 오사카조선학교의 ‘무상화재판’ 2심 판결 당시 모습을 생생하게 전달한다. 재일조선인의 불안과 분노, 그리고 굳은 의지를 담은 이 영화는 혐오를 멈추고 인권을 향해 나아가자는 연대의 목소리를 담고 있다. 제작연도로는 10년 이상 차이가 나지만, <우리 학교>와 <부당, 쓰러지지 않는>은 마치 어제와 오늘 또는 오늘과 내일처럼 연속되어 있다. 영화제 개막을 앞두고 두 감독에게 만남을 청했다. 김명준 감독이 선뜻 인터뷰에 응해줬고, 두 사람은 영화의 주제부터 제작 방식, 배급에 관한 고민까지 폭넓은 대화를 나눴다. 이날 인터뷰는 김명준 감독과 최아람 감독이 활동하는 시민단체 ‘조선학교와 함께하는 사람들 몽당연필’ 사무실에서 진행되었다.

 

 

먼저 두 사람의 첫 만남부터 이야기를 시작해보자. 누구나 조선학교에 관심을 갖고 다큐멘터리 촬영을 결심한다면, 자연스레 김명준 감독과 <우리 학교>를 만나게 되리라 짐작한다. 이 과정에서 최아람 감독이 이번 작품을 만들게 된 배경도 들을 수 있을 것 같다.

최아람_ 재일조선인에 관해서는 어렴풋이 아는 정도였다가, 대학에 들어가서 <우리 학교>를 보고 구체적인 상황을 알게 되었다. 당시 영화를 보고 굉장히 감동 받았고, 마음에 와 닿는 이야기가 있었다. 하지만 막상 내 삶에서 실천하지는 못했다. 그렇게 조금씩 잊고 살다가 2017년에 몽당연필에서 주최하는 ‘우리또래’ 행사에 참여하게 되었다. 20대 한국 청년들과 일본에 거주하는 동포들이 2박 3일간 교류하는 프로그램이었다. 그때 아슬아슬하게 20대 후반이어서 갈 수 있었다. (웃음) 동포들을 직접 만나면서 많은 것이 달라졌다. 이전까지는 어딘지 모르게 불분명했는데, 실제로 얼굴을 보고 함께 생활하니 구체적인 존재들로 다가오더라. 친구나 동생처럼 뚜렷한 대상으로 인식한 다음부터는, 통일이나 민족이라는 개념 역시 새롭게 이해되었다.

김명준_ 그전에 전혀 모르는 사이는 아니었다. 최아람 감독이 ‘다큐창작소’라는 영상집단에 있는데, 소속 감독 중 한 명인 김철민 감독이 몽당연필 행사 때 종종 왔다. 그러다 스케줄 때문에 참석하지 못하는 상황이면, 대신 최아람 감독을 보낸 거지. 재일동포들과 연극을 올린 적이 있는데, 그때 “다큐창작소에서 최아람이라는 사람이 촬영하러 갈 테니 잘 부탁한다”는 연락을 받았다. 이후 세월호 추모집회나 촛불시위 등 시기마다 다큐창작소가 생산하는 영상을 지켜보았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최아람 감독이 만든 클립들이 눈에 들어오더라. 계속 업그레이드되는 느낌?

최아람_ 사실 다큐창작소에서 활동한지 4년째 될 때까지도 날 못 알아보셨다. (웃음)

김명준_ 내가 그랬나? (웃음)

<부당, 쓰러지지 않는>
<우리 학교>

다큐창작소에서는 언제부터 활동했나.

최아람_ 2014년부터 시작했으니 이제 6년차가 되어간다. 다큐창작소는 다큐멘터리 제작과 더불어 온라인을 기반으로 한 미디어운동에 주력하는 집단이다. 지금은 몽당연필 회원이기도 하다. ‘우리또래’라는 행사에 참여하고 나서 가입했다. 지금은 나름 초고속 승진(?)을 해서 운영위원을 맡고 있다. (웃음) 주로 청년 중심의 소모임을 꾸려간다.

김명준_ ‘우리또래’를 다녀온 후에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스스로 짤막한 영상들을 만들더라. 신규 회원이나 조선학교 문제에 딱히 정보가 없는 사람들에게 보여주면 좋을 영상들이었다. 당시 법률적인 문제로 굉장히 복잡한 상황이었는데, 영상을 보니 만듦새도 훌륭하고 사안과 관련해서 이해도도 높더라. 어려운 것을 쉽게 설명하는 느낌이었다. 게다가 영상을 보면 작업자의 마음이 느껴지지 않나. 어떤 마음으로 찍었고 무슨 이야기를 전달하고 싶어 하는지 보이는데, 그런 점이 무척 좋았다.

 

앞서 최 감독은 실제 동포들과의 만남을 통해서 민족이나 통일이 새롭게 다가왔다고 했다. 최 감독과 비슷한 또래인 나로서는 사실 굉장히 멀게 느껴지는 개념이다. 영화에도 통일을 소망하고 민족교육을 강조하는 이야기가 나오는데, 실제 내 삶과 바로 연결하기는 어려웠다. 감독에게는 무엇이 접점이 되었나.

최아람_ 글쎄, 나도 왜인지는 잘 모르겠다. 대학 다닐 때는 동아리로 풍물패를 했을 만큼, 이상하게 어릴 때부터 민속적이고 전통적인 문화에 끌렸다. 학창시절에도 나름 사회운동에 참여했는데, 그 과정에서 통일을 자연스럽게 고민했다. 결국 분단이나 북한을 바라보는 시선은 한국사회의 깊은 골로 남아 있지 않나. 더욱이 내 20대가 ‘이명박근혜’ 정권과 정확히 맞아 떨어지면서 꽤 치열하게 보낸 것 같다. (웃음) 그래도 역시 뭔가 풀리지 않고 막연한 부분이 있었는데 동포들을 만난 것이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지금도 말로 딱 떨어지게 설명할 수는 없지만, ‘드디어 빈 조각이 채워졌구나’ 하는 느낌을 받았다.

김명준_ 그렇구나. 나만 해도 학교 다닐 때, 8월이 되면 광복절 전후로 통일선봉대니 뭐니 하면서 거리 데모를 많이 했다. 단순히 발언하는 정도가 아니라, 거세게 시위하면서 통일을 외치던 때였다. 옆에서 경찰에 잡혀가는 사람들을 지켜보고 나도 다치고 하면서, 말 그대로 전쟁 같은 상황을 목격했다. 임수경 씨나 문익환 목사의 방북사건이 화제였고, 어떻게 보면 통일이라는 문제를 구체적으로 인식했다고도 할 수 있는 거지. 실체는 없지만 느낌은 있으니까. 통일이란 것이 진짜 힘든 거구나. 이렇게 사람이 많이 잡혀 가는구나, 하면서. 근데 듣고 보니, 최 감독 세대는 느낌을 가질 상황조차 없었겠다.

최아람 ⓒ이영진
김명준 ⓒ이영진

확실히 어떤 사회문제에 접속하기 위해서는 얼굴이 필요한 것 같다. 마주보고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실재하는 사람들.

최아람_ 맞다. 통일의 한 주체라고 할 수 있는 재일조선인을 만나고 나니 비로소 실감한 부분이 있다. 그동안 대상을 감각하지 못한 채로 활동해왔다는 사실을 깨닫기도 했고.

김명준_ 함께 먹고 자면서 끈끈해지는 순간이 있다. 서로 이해할 수 있는 면들이 점점 넓어지고. 게다가 요즘은 SNS 시대 아닌가. <우리 학교> 찍을 때는 스마트폰도 없었고 연락 수단이라고는 이메일과 편지뿐이었다. 이메일조차 한글 입력기가 없던 시절이라, 내가 써서 보내면 일본에서는 문자가 다 깨지는 거다. 결국 그림판에 편지를 써서 이미지로 보내야만 했다. (웃음) 지금은 만나는 시간이 짧아도, 소통할 수 있는 창구가 다양하다. 서로를 아는 밀도가 확실히 다르다. 부럽더라.

 

듣다보니 <우리학교> 촬영 상황이 궁금해진다. 3년 동안 일본에 거주하며 영화를 만들었는데, 촬영과 편집은 어떤 식으로 했나.

김명준_ 진짜 아날로그 시대였지. HD가 없었고, DV테이프로 찍었다. 촬영본을 디지털화하는 데에도 고사양 컴퓨터가 필요했다. 편집할 때 컴퓨터 메모리가 2기가밖에 안 됐는데, 당시엔 진짜 좋은 거였다. (웃음) 영화에도 나오지만, 당시 아이들이 북한으로 졸업여행을 갈 때 따라 가려고 했다. 북에 가면 어쨌든 한국으로는 못 돌아갈 테니, 일본에서 살 작정까지 했다. 여행 전날 테이프를 기숙사 방에 보관해두고, 당시 제작을 맡았던 고영재 프로듀서에게 찾아가달라고 부탁했지. 근데 결국 내가 북한에 못 가고, 아이들에게 카메라를 맡기지 않았나. 나중에 귀국할 때는 무섭기도 했다. 공항에서 갑자기 잡혀갈까 봐. 실제로 검찰청에서 통지가 오기도 했다. 국가보안법에 의거해서 수사관이 2005년 5월부터 2년 동안 전화기록을 조회했다고. 결과는 무혐의였는데 기분 이상하더라. 다행스럽기도 하고, 불쾌하기도 하고.

 

<부당, 쓰러지지 않는> 엔딩크레딧에 자료제공자로 김명준 감독이 나오더라. 어떤 자료였나. 김 감독은 언제 처음 이 영화를 보았고, 혹시 제작과정에서 두 사람이 대화를 나눈 부분이 있는지도 궁금하다.

최아람_ 영화에 삽입되는 자료화면이 <조선의 아이>라는 영화인데, 그 파일을 주셨다.

김명준_ 1950년대에 만들어진 다큐멘터리다. 동포들이 자본금을 대서 일본인 감독과 스태프를 섭외했다더라. 기록된 화면과 연출된 화면이 섞여 있는데, 사료로서도 작품으로서도 굉장히 훌륭하다. 제작과정에서 최 감독이 특별히 도움을 요청하거나, 내가 조언을 해준 부분은 없다. 물론 편집본을 보여주면 볼 의향은 있었는데. (웃음) 고교무상화 문제에 관한 작품을 만든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어서, 최 감독이 촬영하지 않은 내용을 보유한 다른 사람을 연결해준 적은 있다. 영화가 완성된 다음, KBS ‘열린채널’에 방영된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는 너무 기뻤다.

<우리 학교>
<부당, 쓰러지지 않는>

동료작업자로서 영화를 본 감상이 궁금하다.

김명준_ 정말 잘 만들었더라. 실은 내심 걱정하기도 했다. 우리 세대에서 독립영화를 하는 사람들, 특히 다큐멘터리 작업자들은 사회운동을 먼저 경험한 이가 많다. 소위 말하는 영상언어가 주는 쾌감이나 재미에 매력을 느끼고 사회문제로 확대되는 방향이 아니라, 효과적인 선전을 위한 도구로서 영상언어를 접하고 시작한 거다. 그러다 보니 영화가 메시지 전달에 몰두하면서, 결국 말하지 않아도 되는 것까지 전부 말하게 된다. 사실 관객은 스스로 판단할 수 있는데, 너무 답을 다 보여준다고 해야 할까. 명료하고 선동적인 방식일 수는 있지만, 일반 관객과의 접점을 늘리는 문제에 대해서는 확신하기 어렵다. 양쪽이 완전히 별개라기보다는 어떤 경계가 있다고 생각한다. 최 감독의 영화는 그 경계에서 ‘오버’하지 않는다. 동료로서도 관객으로서도 미덕이라고 느꼈다. 영화를 다 본 후에는 ‘기대를 걸어도 되겠는데’ 싶기도 했다. (웃음) 나로서는 목마름이 있었거든. <우리 학교>라는 작품이 좋고 나쁘고를 떠나서, 그 후에 나오는 영화에 아쉬움을 느끼던 차였다. 재일조선인을 이야기 할 때, 학교라는 공간과 1년 단위의 시간을 기본으로 하는 구성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거다. 뭔가 새롭게 말하는 사람, 관객과 또 다르게 대화할 수 있는 사람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던 시기였는데, 최 감독의 작품을 만나니 반갑더라.

최아람_ 예전에 어떤 비평가가 그랬는데, 재일동포를 다루는 영화들이 항상 비슷하다는 거다. 동포를 바라보는 시선이나 그려내는 방식이 전형적이라는 비판이었다. 일정 부분 동의했다. 재일동포가 고정된 존재도 아닐뿐더러, 창작자로서 자신만의 시각을 갖고 있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영화를 만들면서 재일동포를 피해자로 등장시키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물론 싸움에서 이긴 적은 드물고, 패배는 계속해서 이어진다. 하지만 그들이 쉽게 얻은 것은 단 하나도 없다. 일일이 싸워서 쟁취해냈고, 어려움 속에서도 포기하지 않았다. 그런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다.

 

러닝타임은 30분이지만, 현장취재부터 인터뷰, 풋티지, 애니메이션 등 여러 가지를 시도했다. 어떤 의도였는지 궁금하다.

최아람_ 인터뷰가 중심인 상황에서 너무 설명적으로 흐르지 않을 방식을 고민했다. 나만 해도 그렇고, 핸드폰이나 컴퓨터로 영상을 보는 사람들은 굉장히 빠른 호흡에 익숙하지 않나. 시각자료를 최대한 삽입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인터뷰이가 과거를 회고하는 장면에 풋티지나 애니메이션을 제공하고, 가능한 한 상상하게 해보자는 마음이었다. 애니메이션을 작업한 배주연 씨는 ‘우리또래’ 행사에 함께 했던 친구이기도 하다. 기본적으로 이 문제에 관심과 애정이 있기에 대화가 잘 통했다. 결코 제작비가 넉넉한 환경이 아니었는데, 동포들을 포함해서 주변에 있는 사람들이 하나씩 보태준 마음으로 완성된 영화라고 할 수 있다.

<부당, 쓰러지지 않는>

인터뷰 이야기를 좀 더 해보고 싶다. 영화 초반 ‘조선학교 무상화를 촉구하는 연락회’ 오사카 지부 사무국장인 나가사키 유미코가 상황을 명료하게 요약한다. 이후 전체적으로 2세대부터 4세대까지의 여성들이 중심화자로 등장하고, 마지막에는 고 김복동 인권운동가의 메시지로 마무리한다. 기승전결이 확실한 동시에, 핵심 주제가 여성들의 입을 통해 전달되는 방식이 인상적이다.

최아람_ 처음부터 ‘여성만 해야겠다’는 생각은 아니었다. 하지만 본격적으로 섭외를 고민하자, 생각나는 얼굴들이 공교롭게도 모두 여자들이었다. (웃음) 실제로 동포사회에서 ‘어머니회’를 주축으로 하는 활동이 제일 왕성하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할머니, 어머니, 딸로 이어지는 구성이 되었다.

김명준_ 섭외는 기존에 아는 사람들 중에 선택했나, 아니면 촬영하며 결정했나.

최아람_ 촬영 전부터 어떤 이야기를 누구에게 듣고 싶다는 그림은 있었다. 기획 단계에서 한 분씩 섭외했는데, 그중 배영애 선생님은 몽당연필 강연 때 처음 뵈었던 분이다. 과거 상황에 관한 증언은 선생님을 찾아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리향대 씨는 김철민 감독 작품의 조연출을 하면서 알게 된 분이고, 4세대인 학생을 섭외하기가 제일 어려웠다. 학교에 공문을 보내거나 한 명씩 찾아다니기엔 일정이 빠듯했는데, 다행히 리향대 씨의 딸인 리진희 양을 섭외할 수 있었다. 김복동 선생님이 등장하는 장면은 기획 단계에서는 전혀 생각지 못했던 부분이다. 그날 자리에 오시는 줄 몰랐다. 현장에서 새롭게 추가됐다.

김명준_ 결국 동포사회도 끊임없이 변화를 거친다. 어떤 종류의 봉건성과 가부장적인 문화가 ‘민족’이나 ‘전통’이라는 이름으로 유지되었는데, 최근 몇 년 사이에는 이를 벗어나려는 움직임이 시작되었다. 1년 전부터는 조선학교에서 젠더교육을 실시한다. 성희롱 예방교육뿐만 아니라, 여성과 성소수자 이슈에 관해서도 집중하고 있다. 그 운동을 주도한 친구가 30대 재일동포 여성이다. 나 역시 이러한 변화에 기대하는 바가 크다.

<부당, 쓰러지지 않는>

학교는 여전히 동포사회의 구심점인 듯하다.

김명준_ 그렇다. 흔히 조선인총연합회(조총련)가 학교에 우선한다고 잘못 생각하는데,사실 조총련의 전신인 조선인연합(조련)은 최초 학교 설립 이후에 생긴 조직이다. 조총련이 학교를 체계화하는데 역할을 한 것은 사실이지만, 학교를 만들겠다는 의지는 철저하게 시민들로부터 시작됐다. 조총련이 학교를 장악했다는 것은 착각이고, 동반적 관계로 보아야 한다. 어떤 조직이 유지되려면 하부가 튼튼해야 하지 않나. 반대도 마찬가지겠지만, 결국 학교가 어려워지면 조직도 힘들어지는 거다. 지금도 동창회가 열리면, 각지에서 동포들이 모인다. 거의 잔치 수준이다. (웃음) 학교라는 건 단순히 교육기관이 아니라, 유일하게 ‘우리 영토’로 느껴지는 공간인 거지. 그 안에서 모든 일이 벌어지니까. 마을회관처럼 전부 모여서 회의하고 술 마시고, 아이들은 노래도 부르고.

최아람_ 현재 우리에게 없는, 일본에도 없는 모습이 그곳에 남아 있다. 6-70년대 향수를 자극하는 분위기라고 해야 할까. 실제로 이 운동에 참여하는 일본인 중에도 어르신들이 많다.

김명준_ 한편으로는 젊은 사람이 부족하다는 이야기도 나온다. 박근혜 정권 탄핵을 거치고 나서, 일본에 가면 항상 듣는 질문이 그거였다. 대체 촛불집회가 뭐냐고. 어떻게 하면 사람들이 그렇게 모일 수 있느냐는 거다.

 

실제 일본 시위현장의 분위기도 궁금하다. 너무 온건한 방식 아닌가. <센난 석면 피해 배상소송>(하라 가즈오, 2017) 등 동시대 일본 사회문제를 다룬 다큐멘터리를 볼 때도 비슷한 감정을 느꼈다. 재일동포 역시 수십 년 동안 투쟁을 이어오고 있는데, 목소리를 내는 모습은 매우 ‘정돈된’ 호소처럼 보인다.

김명준_ 실제로도 그렇다. 일본 사회운동의 역사와 연결되는 지점이다. 과거 과격한 시위가 사회적으로 큰 파장을 불러일으키면서, 이슈는 정당했음에도 운동은 ‘망한’ 결과를 낳았다. 불법을 저지르는 것에 굉장히 조심하는 분위기가 있다. 한국에서는 일단 요구사항이 있으면, 점거를 하지 않나. 연좌농성 시작한 다음에 집회 신고하고. (웃음) 일본에서는 행진하다가 신호등이 나오면 파란 불로 바뀔 때까지 기다린다. 그 와중에 대열은 앞뒤로 떨어지고, 경찰이 막으면 멈춘다. 속으로는 ‘이게 무슨 데모냐’ 싶기도 하는데, 시위 참여자뿐만 아니라 공무원들도 마찬가지이다. 항의서를 작성해서 찾아가면, 면접실에 관공서 직원들이 쭉 나와 있다. 아무리 입장을 물어도 “위에서 시키니까 어쩔 수 없습니다”라는 이야기를 할 뿐이긴 하지만, 일단 나와서 항의서를 전달받고 사진까지 찍는다.

최아람_ 타산지석이라고도 하지 않나. 장기 투쟁으로 가면서, 세대별로 느끼는 바가 있는 것 같다. 동포사회뿐만 아니라 투쟁 상황 역시 계속 변화하고.

<부당, 쓰러지지 않는>

그동안 일본에 있는 동포들과 꾸준히 교류해왔겠지만, 막상 카메라를 들고 마주했을 때는 어땠는지도 궁금하다. 재판 2심 전후로 촬영했으니, 한참 예민한 시기 아니었나.

최아람_ 모든 다큐멘터리 작업에 적용되는 말이겠지만, 동포사회에서도 믿음을 쌓는 일이 제일 중요했다. 그동안 미디어를 통해서 공격받은 경험이 워낙 많아서, 아무런 감정적 연결 없이 바로 카메라를 들고 가기엔 어려운 상황이었다. 나도 상대에게 마음이 가고, 상대도 내게 마음을 좀 주는 과정이 필요했던 거다. 다큐멘터리 촬영을 허락 받았을 때는 기쁘고 감사했다. 이야기를 하는 과정이 힘들 수도 있는데, 나에게 흔쾌히 마음을 열어준 거니까.

김명준_ 나는 솔직히 영화를 보며 놀란 점이 있다. 조선학교 문제를 말하면서 학교에 들어가지 않는다. 감독 입장에서는 조선학교를 다룬다고 하면, 당연히 학교를 찍고 싶어지지 않나. 실제로 많은 영화들이 그렇고. 그런데 이 영화는 좀 다른 거다. 학교와 학생 이야기를 담고 심지어 감동적인데, ‘어라, 학교가 안 나왔네. 이거 뭐지?’ 싶었다. 영리하다는 것을 넘어서 대단하다는 느낌이었다. 이 작품은 과감하게 학교라는 장소를 제외하면서도, 힘 있게 영화를 이끌어나간다. ‘이렇게도 만들 수 있구나’ 라는 걸 새로 배웠다고 할까.

최아람_ 감사하다. (웃음) 사실 물리적 조건 자체가 좋은 편이 아니었다. 고교무상화 재판과 관련된 영화를 만들고 싶다는 욕구는 있었고, 시기를 보았을 때 당장 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기획안을 정말 여러 번 썼는데, 제작지원마다 다 떨어졌다. (웃음) 한국에서도 여유롭게 활동하는 형편이 아닌데다가, 해외를 나가면 절대적으로 요구되는 비용이 있지 않나. ‘이대로 접을 수밖에 없는 건가’ 하던 순간, 신기하게 타이밍이 맞았다. 2심 재판 결과가 나오기 전에 동포들이 나를 행사요원으로 초청한 거다. ‘아, 이건 계시다!’ 싶었지. 마음을 다하면 온 우주가 도와준다는 누구의 말이 떠오를 정도였다. (웃음) 있는 돈, 없는 돈, 다 끌어 모았다. 사실 가기 전까지는 신나면서도 두려웠다. 혼자 해외에 나가기도 처음이었고, 일본어를 진짜 한 마디도 못했거든. 나중에는 먹고 자고 할 돈도 없는 상황이었는데, 동포들이 숙식을 제공해줬다. 정말 다 같이 만든 영화라고 할 수 있다.

ⓒ이영진

인터뷰 장소는 어떻게 섭외했나. 자택이나 서점처럼 보이는 공간인데.

최아람_ 배영애 선생님은 선생님 댁에 가서 진행했고, 다른 분들은 ‘샛바람문고’라는 작은 서점에서 했다. 내가 거기서 묵었거든. (웃음) 정말 좁은 공간이고 조명도 칠 수 없는 상황이었다. 나와 리향대 씨, 리진희 양 세 명의 핸드폰 플래시로 조명을 급조했다. 그래서 조명이 미묘하게 다르다. 딸이 인터뷰 하는 동안 리향대 씨는 끝까지 플래시를 들고 계셨는데, 진희 양은 팔 아프면 중간에 내려놨다. (웃음) 스태프가 따로 없으니 화면이 아쉬운 부분도 있는데, 한편으로는 더 내밀한 공기를 담을 수 있기도 했다. 정말 작은 방에 카메라 한 대 세워놓고, 세 여자가 다닥다닥 붙어서 대화했으니까. 진희 양이 엄마 이야기를 하다가 울기도 했는데, 그 장면은 넣지 않았다.

 

“피해자로 보여주고 싶지 않다”는 결정 때문이었나?

최아람_ 그런 생각과 동시에, 영화 흐름상 꼭 필요한 부분이 아니라고 판단했다.

김명준_ 근데 편집을 하다보면 그런 장면이 있지 않나. 버리기 싫은데, 버릴 수밖에 없는.

최아람_ 지금은 잘 기억이 안 난다. 있긴 있었을 거다. (웃음)

김명준_ 맞다, 결국 잘라놓으면 기억도 안 난다. 근데 당시엔 되게 아깝고. (웃음) 그럼 반대로 방점을 찍은 장면은 무엇인가. 말하고 싶은 주제가 드러나는, 거기에 배치한 이유가 정확히 있기에 관객들의 반응을 기대하게 되는 장면은?

최아람_ 재판 직후에 기자회견 장면이다. 일본어를 할 줄 모르니 당시에는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전혀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근데 뭔가 느껴지더라. 여러 분들이 발언하셨지만, 고기련 씨가 말할 때는 분위기가 달랐다. 애초 기획에는 없었지만, 중요하다고 생각해서 삽입한 장면이다. “조선인이 나쁩니까?”라면서 “이 자리에 있는 기자 여러분, 제발 학교에 와서 아이들을 직접 봐 주십시오”라고 하는데, 기자에게 하는 말로만 들리지 않았다. 여전히 인터넷에 조선학교와 재일동포를 폄훼하는 글들이 올라오지 않나. 한국에 있는 사람들에게도 유의미한 말이라고 생각했다.

김명준_ 와, 그거 통했네. (웃음) 그 장면은 나도 인상적으로 봤다.

최아람_ “지성 있는 여러분들, 차별과 결별해야 합니다”라는 말이 영화의 주제라고 생각했다. 그 의미를 전달하고자 했고, 이어서 김복동 선생님이 발언 중에 “조선”이라고 말씀하시지 않나. 한국사회에서 조선은 ‘북조선’으로 인식되며 차별을 덧씌우는데, 김복동 선생님이 언급한 조선은 모든 폭력이 발생하기 이전의 ‘고향’을 지칭하는 단어이다. 비난의 대상이 아니라는 점을 한 번 더 확인시켜 주고 싶었다.

ⓒ이영진

김명준_ 자, 그럼 이제 장편은 언제 찍을 건가. (웃음).

최아람_ 슬슬 생각하는 중이다. (웃음) 그동안 미디어활동가로서 크고 작은 작품에 결합하면서 고민을 이어왔다. 장편은 아무래도 내 마음에 무언가가 깊숙이 들어왔을 때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지금은 조연출을 맡고 있으니, 그 작품이 완성된 후에 시작하지 않을까 싶다.

김명준_ 차기작도 재일조선인 문제를 다룰 예정인가?

최아람_ 아마도. 현재로서는 가장 마음을 차지하는 이야기이니까. 구체적인 주제나 소재를 정한 것은 아니다. 당장은 투쟁 상황을 가급적 알려서, 여론을 만들어내는 일에 집중할 계획이다. 영상이 또 하나의 도구가 되기를 바라기도 한다. 동포들이 투쟁 과정에서 영상을 많이 사용한다. 벌써 내 작품을 직접 일어, 영어 등으로 번역해서 보더라. 영화제가 아닌 유튜브로 작품을 먼저 공개한 이유도 같은 맥락이었다. 동시에 인터넷 환경에서 영화를 본다는 것은 극장 관람과는 다른 방식이기에 더 고민하게 되는 부분도 있었다.

김명준_ 유튜브와 같은 온라인 플랫폼이나 방송과 영화제는 좀 다르지 않나. 출품 당시 재편집을 하고 싶다거나, 등장인물의 개인적인 면모를 보여주는 데 집중하고 싶은 욕심이 생기지는 않았나.

최아람_ 솔직히 말하면 재편집할 영상이 없다. (웃음) 일정이 타이트해서 거의 처음 구성한 대로 촬영을 진행했다.

김명준_ 단편이라지만 기존에 만들던 짧은 영상과는 꽤 다른 호흡이었을 텐데.

최아람_ 어쨌거나 미디어활동으로 영화를 시작했고, SNS에 익숙한 세대로서 나 또한 호흡이 짧을 수밖에 없다는 걸 새삼 느꼈다. 한편으로는 정체성에 혼란을 느끼기도 했다. (웃음) ‘내가 어디쯤 있는 거지?’ 하고. 짧은 클립들을 때맞춰 내놓는 미디어활동이나 다큐멘터리 제작이나 모두 내가 지향하는 바인데, 두 작업의 호흡과 화법이 다른 거다. 무엇에 집중해야 할지 파악이 안 돼서 한참 방황하기도 했다. 지금은 둘 다 잘하고 싶다고 결론을 내렸다. 결국 극단적으로 다르다기보다는, 작업 간에 상호 보완할 수 있는 연결고리를 찾아내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유튜브 조회수는 7천을 넘겼더라. 온라인 상영이 또 다른 대안상영으로 자리 잡는 것 같다.

최아람_ 나도 놀랐다. 그동안 다큐창작소가 온라인 미디어를 기반으로 활동해왔기 때문에 가능했다고 생각한다.

김명준_ 배급환경이 눈에 띄게 바뀌고 있다. <우리 학교> 때는 디지털 배급이라는 개념 자체가 없었으니까. 지금은 극장에서도 영화를 파일로 상영하지 않나. 단지 방식뿐만 아니라 시스템 자체도 변화했다. 개봉 첫 주가 지나면 상영 여부와 규모를 결정한 다음, 정말 빠른 속도로 IPTV로 넘어가더라. 뭐라고 해야 할까, 감독들이 어떻게 할 수가 없다. 영화를 만들면 완성하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이후에 관객을 직접 만나고 대화를 나누면서 느끼는 바가 분명히 있거든. 그렇게 감독으로서 영양분을 흡수하는 거다. 자기 영화를 다시 생각하고, 다음 영화를 고민할 수 있는 에너지를 쌓는 거지. 근데 지금은 되게 허전하게 느껴진다. 달라지는 배급환경에 다큐멘터리, 특히 독립적인 방식의 작업들이 어떻게 반응을 해야 할지 고민스럽다. ‘무엇을 지향하며 가야 하나? 현재 조건을 적극적으로 이용하는 것이 맞나?’ 질문하다 보면, 근본적으로 다큐멘터리를 만드는 이유를 묻는 데까지 가게 된다.

ⓒ이영진

공동체 상영이라는 개념도 과거와는 달라진 것 같다. 이전에는 보다 사회참여적인 무브먼트로서 인식되는 면이 강했다면, 요즘에는 문화기획의 이벤트로 자리 잡는 경향이다. 감독이나 제작진의 참여 없이, 온라인 링크를 전달하는 형태로 상영이 이뤄지기도 하고.

김명준_ 다큐멘터리 제작 목적에 부합하는 상영 방식은 무엇일지 고민하게 된다. 극장 개봉 역시 여러 가지를 고려해야 하고, 최근에는 제작지원이나 심사 과정에서 감독에게 요구되는 능력이 이전과 달라지기도 했다. 결국 다큐멘터리를 작업하는 사람으로서, 변화된 배급환경에 맞게 새로운 형식과 내용을 발굴하는 노력이 필요해진다. 이미 시간이 지나긴 했지만, <두 개의 문>(김일란, 홍지유, 2012)을 보면서 멋지다고 느꼈다. 인터뷰도 굉장히 정성 들여 진행했고, 실제 사건을 재현하는 수준도 뛰어났다. 이런 창작자들이 있으니까 발전하는 구나 싶더라. 말이 나와서인데, 요즘 나는 프로듀싱에 흥미를 느낀다. 최아람 감독이 다음 작품을 할 때 생각해주면 좋겠다. (웃음)

최아람_ 나야 영광이다. (웃음)

 

연출 계획은 없나.

김명준_ 나는 연출할 때 사전조사부터 진을 다 빼는 스타일이다. 정말 나를 갉아 먹으면서 작업하기에, 당장은 엄두가 안 난다. 오히려 같이 기획하고 감독이 자유롭게 작품을 할 수 있도록 보장하는 역할을 해보면 어떨까 싶다. 최 감독이 일본에서 고생한 이야기를 들으니 아쉽더라. 나와 좀 더 대화가 오고 간 상황이었다면, 아주 큰 도움까지는 아니더라도 약간은 도울 수 있었을 텐데 싶은 거다. 그래도 내가 오사카에 지인이 오죽 많겠나. (웃음) 단지 편하게 생활하는 문제가 아니라, 동포사회의 특수성이 있으니 중간 역할을 했으면 좋았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두 사람이 연출자와 프로듀서로 만나면 꼭 연락주시라. (웃음) 끝으로 향후 계획 들으며 마무리하자.

최아람_ 기회가 되는 대로 영화제에 출품하고, 지역 상영도 적극적으로 진행할 예정이다.

김명준_ 기획전을 할 수 있다면 좋겠다. 재일동포 관련한 주제로 작품들을 좀 엮어서.

최아람_ 그럼 너무 좋지.

김명준_ 몽당연필은 회비로 운영되는 회원조직이다. 최근 회원 수가 늘면서 약간의 저축이 가능해졌는데, 이 돈을 모아서 영화 제작비로 지원할 수 있게 되면 좋겠다. 1년이 될지 2년이 걸릴지는 모르겠지만, 주변에 관심 있는 분들이 있다면 알려주시라. 다큐멘터리도 좋고 극영화도 좋다. (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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